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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2)] 영화 '자산어보'와 명태의 남하(南下) 

“소빙기로 작물은 말라갔지만… 바다는 풍년이었다” 

신유박해로 흑산 유배된 정약전, 어부 창대 도움으로 [자산어보] 집필
일본, 청어어비(魚肥)로 농업 생산력 높여… 해운업과 상품 경제도 발전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영화 [자산어보]는 조선 순조 때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과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의 우정과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조선 순조 때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과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의 우정과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대역 죄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좀처럼 사람들과 가까이할 수 없었던 정약전은 창대가 글공부에 목말라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자고 접근한 것이다.

자신이 유배된 흑산도 일대 어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정약전은 창대의 도움으로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리고 거기엔 그의 1등 조력자였던 창대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청어는 길이가 한 자 남짓하며 몸이 좁고 빛깔이 푸르다. 맛이 담백하여 국을 끓이거나 구워 먹어도 좋고 어포를 만들어도 좋다. 정월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해안을 따라 떼를 지어 회유해 오는데, 이때의 청어 떼는 수억 마리가 대열을 이루어 오므로 바다를 덮을 지경이었다. 석 달 동안 산란을 마치면 청어 떼는 곧 물러간다. (중략) 이 물고기는 동지 전에 영남 좌도에 나타났다가 남해를 지나 해서(海西)로 들어간다. 서해에 들어온 청어 떼는 북으로 올라가 3월에는 해서에 나타난다. 해서에 나타난 청어는 남해의 청어에 비해 몇 배나 크다. 창대는 ‘영남의 청어는 척골이 74마디이고, 호남의 청어는 척골이 54마디이다’라고 했다.”

정약전은 동해와 서해의 청어 크기가 왜 다른지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여기엔 중요한 기후적 요인이 있었다. 청어는 수온 2~10℃의 한류가 흐르는 연안에서 서식하는 어종이다. 원래는 동해 북부에 사는 이 한류성 어족이 정약전이 귀양 갔던 흑산도 같은 서남해에서도 풍부하게 발견된 것은 기후 변화 덕분이었다.

소빙기가 가져다 준 선물, 청어


▎자신이 유배된 흑산도 일대 어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정약전은 창대의 도움으로 조선 최초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17세기는 소빙기의 절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강원도 간성의 바닷물이 6월에 얼음이 얼어 종이처럼 두꺼웠다”([숙종실록] 35년 1월 10일)처럼 바다가 얼어붙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나온다. 소빙기는 밥상도 바꿔놓았다. 추위와 함께 수온이 내려가면서 대구나 청어 같은 한류성 어종이 크게 늘어났고 서식 범위도 확장됐다. 이전엔 동해안 북쪽에서나 발견되던 명태가 전국 모든 바다에서 나타나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혔다. “땔나무처럼 많아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거나, “깊은 산골 궁벽한 고을에서도 명태를 물리도록 먹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청어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소빙기 시대를 살았던 이익(1629~1690)은 “(청어가) 모든 연해에서 모두 나고”, “4월이 되면 청어가 바다를 메워 몰려오니 사방 수백 리 사이에 청어를 먹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소빙기 겨울에 청어는 리만 해류를 따라서 동해→남해→서해로 이동했다. 그런데 한 번 서해로 간 청어가 다시 동해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동남아시아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쿠로시오 해류 때문이다. 동해에서 내려올 때는 오호츠크해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해류를 타지만, 서에서 동으로 올 때는 따뜻한 난류와 만나게 된다. 그래서 서해에 고립된 청어는 동해의 청어와는 다르게 독립적인 생태계를 맞이하게 됐는데, 동해보다는 몸집이 작아졌다. 서해가 동해보다 덜 차가운 바다였기에 청어가 크기에는 적당치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소빙기로 인해 농업 생산이 급감한 조선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북쪽 바다에서 한반도 인근으로 몰려들어 온 청어였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국가의 주요한 재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조선은 바다세(海稅)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청어 산업이 큰 몫을 차지했다. 17세기 한랭화는 바닷물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한류성 어종인 청어, 명태 어업은 도리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후변화라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기존 기후에 익숙한 많은 산업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도 농업이 큰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망연자실하기보다는 새로운 변화를 주시하고 기회를 엿본다면 돌파구를 찾게 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정약전에 앞서 조선에서 청어에 주목한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다. 그는 [하멜 표류기]에서 “(조선에는) 12~3월에는 많은 양의 청어가 잡힌다. 12월과 1월에 잡히는 청어는 북해(North Sea)에서 잡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뒤에는 우리나라의 튀김용 청어처럼 작은 종류가 잡힌다”라고 썼다. 그가 청어에 주목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멜의 조국 네덜란드가 경제 부국으로 올라서는 데는 청어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멜이 청어에 주목한 사정


▎하멜 기념비는 헨드릭 하멜의 공덕과 네덜란드와 한국 간의 우호증진의 증표로 1980년 4월 1일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 제주 서귀포 산방굴사 바로 앞 해변가 언덕에 세워졌다. / 사진: 제주 공식 관광 포털(Visit Jeju)
16세기 독립한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에 열악한 산업 기반 때문에 변변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신생국에 불과했다. 이런 네덜란드에 찾아온 것이 청어였다. 유럽에서도 17세기 소빙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바닷물의 온도가 내려가자 본래 발트 해 인근에 살던 청어가 네덜란드 앞바다인 북해까지 밀려온 것이다. 네덜란드는 청어를 통해 어업과 선박 제조 등을 발달시켰고 이것은 해운업의 발달을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 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무역 강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때 조선에 표류한 하멜도 네덜란드 무역회사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조선에 떠밀려온 뒤 무려 13년간을 감금당했다. 그러던 차에 조선에서 고국을 떠올리게 해주는 청어를 보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가 청어로 재미를 본 상황은 동아시아도 비슷했다. 청어는 앞서 언급한 조선뿐 아니라 중국, 일본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런 청어를 상업과 연결시켜 네덜란드처럼 규모를 확장한 것은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홋카이도(北海道)를 새로운 개척지로 삼았지만, 상업적으로 큰 가치를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춥고 농사가 불가능해 전복 같은 해산물이나 소규모로 거래하는 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퇴비를 적극적으로 쓰고 있었다. 특히 생선을 이용한 어비(魚肥)가 많이 쓰였다. 기존에는 정어리로 만든 어비가 많이 쓰였는데, 이 무렵 청어가 급증하면서 청어어비가 대량 생산됐다. 19세기가 되면 정어리어비는 가격 경쟁에서 도저히 청어어비를 따라오기가 어려웠다. 이제 일본의 농업에서 청어는 가장 중요한 비료 재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청어가 가장 많이 잡히던 곳이 바로 홋카이도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청어를 잡기 위한 어선들이 홋카이도로 몰려들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확보한 청어어비를 전국으로 유통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해운업과 상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 역시 한랭화를 도리어 새로운 기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청어 산업은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소빙기가 꺾이고 날씨가 온화해진 18세기 중반 이후 청어는 점점 감소했고, 결국은 한반도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기후 변화는 반드시 위기일까


▎온난화로 따뜻해진 그린란드는 최근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진은 여름에 그린란드 남부 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 / 사진: 그린란드 공식 관광 포털(Visit Greenland)
소빙기의 청어 산업은 ‘기후변화 = 위기’라는 등식에 물음표를 제기한다. 꼭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최근 지구가 온난화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팩트다. 하지만, 온난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꼭 같은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온난화로 미소를 짓는 지역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그린란드다. 그린란드는 약 300년 동안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거대한 섬이다. 지금 이곳은 풍부한 석유와 광물자원, 그리고 관광업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는 지역 중 하나다. 이런 활기를 뒷받침해준 것은 바로 온난화다. 과거만 해도 너무나 추운 얼음덩어리의 땅에 불과했던 그린란드는 이제 여느 북유럽 국가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땅이 되어가고 있다. 꽁꽁 얼어붙어 중장비가 접근하기 어려웠던 땅에는 이제 석유와 광물을 시추하는 장비들이 속속 설치되는 중이다. 심지어 관광업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에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먹거리도 늘어났다. ‘지구온난화’ 덕분에 그린란드 남부는 이제 감자와 당근 농장과 더불어 양 떼를 먹일 목초지도 늘어났다. 이런 활기를 바탕으로 그린란드는 최근 덴마크로부터의 독립도 꿈꾸고 있다. 성공한다면 기후변화가 만든 독립국이 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간척사업으로 유명한 네덜란드는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한 덕분에 돈을 벌고 있다. 네덜란드는 간척을 위해 오랜 기간 방파제 건설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태평양 섬나라를 비롯해 바다와 접한 저지대를 둔 국가들은 이제 육지를 잠식하는 바다를 막기 위한 방파제 건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고객은 바로 이런 국가들이다. 저탄소 발전을 위해 원자력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도 한국 등 원자력 기술 강국에는 미소 지을만한 일이다. 위험성 때문에 여전히 부정적 인식도 강하지만, 빌 게이츠 등 오랜 기간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유명 인사들도 원전의 확대를 주창하고 있다.

한편 한국도 온난화로 인해 지역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주요 농수산물의 산지가 바뀌면서다. 사과의 산지는 경북 청송이 유명하지만, 실제 재배지역은 많이 북상해 강원도 양구와 인제까지 와있다. 감귤도 제주도에서 충북 진천까지 올라왔다. 제주도에서 잡히던 방어는 이제 동해안 일대에서 보게 됐다. 인삼도 충남 금산뿐 아니라 경기 연천이 명산지로 떠오르는 중이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북으로 향한 것이다. 기존 재배지로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지만, 새롭게 이런 작물들을 재배하게 된 지역들로서는 온난화가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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