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 관리 스타일 전혀 다른 3인의 군 출신 대통령

朴正熙·고령(高靈) 박씨(朴氏), 1,000년만에 나온 임금

“집안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를 기억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고 고령(高靈) 박씨(朴氏) 문중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박정희의 17대조와 박문수의 11대조가 동일인물이다.

1961년 5·16으로 권력을 잡고 18년만인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에서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쓰러질 때까지 친인척이 권력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을 극도로 꺼린 탓에 박정희 주변에서 득세한 고령 박씨 문중의 인사는 ‘전무’(全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령 박씨는 조선조에서 56명의 문과 급제자와 1명의 정승을 배출했지만, 광복 이후에는 대중들이 기억할 만한 명사(名士)를 배출하지 못했다. 굳이 찾자면 문민정부때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통산산업부 장관을 역임한 박재윤(현 부산대학교 총장)씨 정도다.
대한민국 최장수 대통령을 배출한 문중치고는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가 친족을 가까이 두고 쓰기 시작했다면 사태는 달라졌겠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령 박씨 인구가 워낙 적은 탓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은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한국의 성씨와 본관을 함께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고령 박씨 인구는 3만5,527명이었다. 그 이후 정부차원에서 성씨와 본관에 관한 센서스를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발표는 아직도 성씨별 인구순위를 정하는 준거가 되고 있다.

고령 박씨의 시조는 신라 54대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둘째 아들 박언성(朴彦成·고양대군)이다. 본관 고령은 고양과 영천 두 지명을 합쳐 만들어졌다. 고령 박씨는 박씨 가운데 큰 집인 밀양을 비롯해 ‘8朴’으로 꼽힌다. 고령 박씨는박섬(사인공파·舍人公派)·박환(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박연을 중시조로 하는 3파가 있다. 시조 고양대군의 29세손인 박정희는 사인공파 중 경파(京派)인 직강공파(直講公派)의 후손이다.

박정희의 직계 선조 중에서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2∼3명의 참봉 벼슬이 고작이었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朴成彬·1870년생)이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영변에 군수 자리를 얻었지만 부임하지는 못하였다.박정희의 직계선조 중에서 정상적인 벼슬 코스인 문과급제자는 부친으로부터 17대조까지 한사람도 없다. 조상 대대로 ‘학생부군신위’ 신세를 면치 못한 한미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고령 박씨 문중에서는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되자 “신라 55대 경애왕조 이래 1,000년만에 돌아온 대경사”로 받아들였다.


朴正熙의 親家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있을 때 종친의 청와대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장조카인 박재홍만 겨우 청와대 출입을 허용했는데, 종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3공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박종규 경호실장, 박종홍 교육문화담당 특보, 박승규 민정수석, 박진환 경제특보, 경제비서관을 지낸 박성용·박숙현, 박명근 정무비서관, 박상길 공보비서관(대변인)이 모두 고령 박씨의 큰집 격인 밀양 박씨 문중이다. 정부쪽에서도 박충훈 상공장관, 박경원 내무장관, 박주명 보사장관이 밀양 박씨 출신이다.


엄격했던 친족 배제 원칙

박정희는 부친 박성빈과 모친 백남의 사이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이인 박동희는 막내동생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10여마지기의 땅을 일구면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간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박재홍 전 의원의 아버지인 동희씨는 대통령의 친인척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교훈적인 일화를 남겨 놓았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됐을 당시 66세였던 동희씨는 “대통령은 내 동생이지 내가 아니며, 그럴수록 형인 나 자신은 근신하는 것이 동생을 돕는 일”이라며 동생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고향인 경북 구미면 상모리를 지키다 1972년 사망했다. 1965년 9월 추석,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다. 그런데 맏형 집에 호롱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박정희가 답답하고 미안했던지 전기를 넣어주겠다고 했는데 동희는 “야야, 그만두거라. 또 신문에 나면 우짤라고”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박동희씨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은 5·16이 났을 때 고대 법대에 재학중이었다. 재홍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할 직장을 갖지 못하다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낸 박태준 포철 사장이 비서실에 취직을 시켜 주었다. 박재홍이 정계에 진입한 것은 박정희 사후였다. 포철에 있다가 동양철관을 설립해 사장을 지냈고, 5공이 들어선 뒤인 11대때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입해 내리 4선을 지냈다.

14대 때는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13대 총선 때는 사촌동생인 박준홍과 맞붙어 박정희 일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동희의 딸 재선씨는 1971년에 남편을 따라 도미(渡美)했다. 남편 정동하(鄭東河)는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해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박정희는 형제 중에서 특히 셋째형 상희씨 가족에 애틋한 감정을 가졌다. 해방후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집안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제이기도 했다. 구미의 박정희가에서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상희”라고 할 정도로 집안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박상희는 일제 때부터 신간회 간부로 항일투쟁을 벌여 구미 좌익계에서 영향력과 신망이 대단했는데, 구미폭동을 지휘하다 경찰에 사살됐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남겨두고 간 유족에게 유달리 애착을 가졌다. 군인 시절에도 틈틈이 셋째형 일가를 도왔다. 그중에서도 박준홍은 외아들이자 유복자였다. 준홍은 경희대를 나오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박정희의 배려로 국토통일원과 무임소장관실 정무조정실장으로 근무하다 유신 말기에는 대한축구협회장까지 지냈다. 현재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 회장 겸 자민련 당무위원으로 있다.

3공 때부터 ‘영원한 2인자’로 살아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박상희의 큰사위다. 어릴 때부터 셋째 형님의 큰딸 박영옥을 귀여워했던 박정희는 군에서 만난 핸섬한 장교 김종필을 배필로 주선했다. 이후 김종필은 박정희사단의 2인자로서 5·16 쿠데타를 기획해 성공시키고 3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주역이 됐다. 박정희 집권 시절 JP가 권력의 단맛, 쓴맛을 보면서도 2인자 자리를 놓지 않았던 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하는 사나이들의 세계와 달리 조카 박영옥과 숙모 육영수 여사의 항상적인 인간관계가 주효했다는 지적도 있다.

박상희의 둘째딸 계옥(桂玉)씨는 김용태(金龍泰)씨(민간인 신분으로 5·16에 참여해 후에 국회의원과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金龍泰와는 동명이인)에게 출가시켰는데, 박정희는 생전에 ‘조카사위 김용태’를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도록 했다. 김용태는 1984년 처남인 박준홍과 함께 사업을 하기도 했다. 셋째딸 금자(金子)씨는 총리실에 근무한 적이 있는 반기언(瀋琪彦)씨에게 출가시켰고, 막내딸 설자(雪子)씨는 벽산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인득(金仁得)씨의 차남 김희용(金熙湧) 현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했다.

박정희의 둘째형 무희(武熙)씨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동희씨와 마찬가지로 경북 선산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살다 박정희가 권좌에 오르기 1년 전인 1960년에 사망했다. 무희씨는 2남1녀를 두었다. 무희씨 일가는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웠다. 무희씨의 장남 재석(在錫)은 한때 구미에서 연필장사를 했고, 차남 재호(在浩)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등극으로 신세가 폈다. 재석씨는 박정희 재임 시절 국제전기기업 회장을 지냈고, 재호씨는 동양육운 회장을 지냈다.

박정희에게는 누이가 두명 있었다(바로 위 형인 4남 박한희는 박정희가 여덟살 때 죽었다). 큰 누이 귀희(貴熙)씨는 박정희가 태어나기 전 칠곡군 석적면의 은(殷)씨 집안으로 출가해 그곳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 귀희씨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한 3남 은희만씨를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박지만군이 중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선물한 지구본을 둘러보는 박대통령 가족.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 살지 말라는 법 있느냐!”

또 다른 누이는 박정희의 누이 재희(在熙)씨다. 재희씨는 갓난아기 박정희를 업어 키운 바로 위 누나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다닐 때는 재희씨 남편 한정봉(韓正鳳)씨가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박정희가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친근감을 나눈 사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상주의 모 국회의원이 재희씨 부부를 서울 성북동으로 모셔왔다.

‘대통령 누님’ 집에 청탁꾼들이 몰려들고 정치인들도 기웃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경찰을 배치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집권 초기 친인척 관리를 맡았던 대구사범 동기동창 권상하(權尙河) 비서를 보내 상주로 내려가라고 압박했지만, 재희씨는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버텼다. 은인자중하는 맏형 동희씨의 처신과는 딴판이었지만 박정희도 누나를 어쩌지는 못했다.

박정희는 육영수와는 재혼이었다. 육영수와 사이에 근혜(槿惠·현 한나라당 부총재)·서영(書暎·현 육영재단 이사장)·지만(志晩·사업) 3남매를 두었고, 이혼한 첫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는 큰딸 재옥(在玉)을 두었다. 재옥씨의 남편 즉, 박정희의 사위가 한병기(韓丙起).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일 때 전속부관이었다. 부하 김종필을 조카와 인연을 맺어준 것처럼 박정희는 한병기를 첫 딸과 맺어 주었다. 그러나 한병기는 과거 상관이자 장인인 박정희 통치 아래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지 못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을 지낸 것 말고는 칠레·유엔·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면서 해외로만 돌았다. 10·26 이후 동서지간인 JP와 함께 공화당 재건에 나섰던 한병기는 5공이 출범하자 정계를 떠나 설악산 케이블카를 운영하는 설악관광회 회장으로 물러났다. 13대때 서울 서초을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현재는 JP와 정치적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근혜씨는 현재 한나라당 부총재로 예상 외의 정치력을 보이며 TK 지역의 리더로 발판을 다져가고 있다. 차녀 서영씨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1982년 풍산금속 사장 유찬우(柳纘佑)의 장남 유청(柳靑)씨와 결혼했지만 몇달만에 이혼했다. 외부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서영씨는 현재 육영재단에만 관여하며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거듭된 마약 복용으로 박대통령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지만씨도 요즘에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박정희는 집권 내내 친척이 정부 고위관리나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자격을 갖추었든 아니든 이 원칙을 밀고 갔다. 물론 이권개입도 차단했고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 원칙에서 예외가 있다면 무임소장관실에서 정무조정실장을 지낸 셋째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 정도였다. 조카사위 JP의 경우는 ‘혁명 동지’라는 점에서 다른 인척과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기 곤란하다.

중간에서 이런 일을 도맡은 이가 권상하 비서관이었다. 권상하는 1964년부터 약 5년여간 청와대 정보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대통령의 친인척과 학교 동창생들을 관리했는데, 관리대상 인물의 주거지역 관할 경찰서를 통한 사실상의 감시였다. 권비서관 이후에는 김시진(金詩珍)·박승규(朴承圭) 민정비서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미행까지 하면서 매일 친인척과 관련한 정보와 동향을 체크했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친족들의 정치관여와 이권개입을 막았다. 대신 궁핍한 생활을 하는 친족들에게는 연탄과 쌀을 대주는 식으로 소리없이 돌보았다. 1975년부터는 친족들의 청와대 출입을 아예 금지했고, 장조카 박재홍을 통해 친족들의 소식을 보고받았다.

이처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인척 관리에 신경쓴 탓인지, 박정희 재임 시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친인척 비리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족(親族)에게 엄격했던 반면 처가(妻家)인 육씨 집안에 대해서는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는 등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