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 관리 스타일 전혀 다른 3인의 군 출신 대통령

盧泰愚·교하(交河) 노씨(盧氏), 쇠락한 거족(巨族)의 부활

利權 대신 국정 장악한 진짜 權府 ‘청와대 가족회의’

1987년 대선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에서 출발해 대권을 거머쥐었다. 여당 프리미엄이 작용했다고 쳐도 당시 민정당의 전략은 선거기법상 3김이 이끄는 세 야당보다 확실히 앞섰다.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노태우 후보가 갑자기 ‘친인척 배제’ 선언을 했다.
“내가 당선된다면 친인척이 이권에 개입하거나 정치에 나서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

효과 만점의 공약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두환 일가의 온갖 비리 소식에 국민들은 넌덜머리를 쳤다. 노태우의 친인척 배제 공약은 민심을 파고들었다. ‘후계자’ 노태우가 상왕(上王) 전두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겼다. 과연 노태우는 이 공약을 지켰는가.

6공화국때 정치권과 언론이 귀를 쫑긋 세우고 염탐하려고 애쓰던 ‘세력’이 있었다.‘청와대 가족회의’.세간에서는 ‘작은 청와대’라고도 불렀다. 권부(權府) 중의 권부, 권력의 이너서클이라는 얘기다. 참석 멤버는 노태우 대통령·김복동(金復東·처남)의원·금진호(琴震鎬·동서) 전 상공부장관·박철언(朴哲彦·처 고종사촌) 정무장관, 최종현(사돈) 선경그룹 회장·신명수(사돈) 동방유량그룹 회장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6공 초대 안기부장을 맡았던 안무혁(安武赫·육사 14기·하나회)씨는 1988년 5월 노대통령을 독대하고 안기부가 파악한 가족회의의 부작용과 비판적 여론을 전달하며 친인척을 배제하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오히려 화를 냈다. 안씨는 사표를 내고 안기부장직을 떠났다. 5공때 전두환 친인척이 배경을 활용해 이런저런 이권에 관여하는 ‘비리’를 저질렀다면 6공화국 들어서는 성격이 달라졌다. 국정의 큰 줄기가 가족회의를 거쳐 방향을 잡아나갔다. 주요 정책과 인사가 이 가족회의 테이블 위에서 결정됐다.

노태우의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창성군파에 속한다. 한국의 노씨는 중국 당나라때 안록산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한 노수(盧穗)를 시조로 한다. 노수의 아들들이 신라에 공을 세워 여러 지역의 주백(州伯)으로 분봉되는데, 둘째 아들 노오(盧塢)는 파주군 교하면 교하백(交河伯)으로 봉해졌다. 교하 노씨는 노오의 후손 노강필(盧康弼)을 시조로 하고 노오를 원조로 모신다. 교하 노씨는 고려말부터 거족(巨族)이었다.

노태우의 20대조 노척은 딸을 원나라 황제인 순제비로 보내면서 고려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17대조 노한은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동서지간으로 우의정을 지냈고, 노한의 아들 노물재는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이었다. 노물재의 아들이 노태우의 15대 직계조인 유명한 영의정 노사신이다.

노사신은 수양대군과 이종사촌이다. 노사신의 아들 노공필은 6조 판서를 모두 지냈는데, 조선 왕조에서 정약용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18년) 유배생활을 했다. 이런 오랜 유배생활 탓인지 노공필 이후의 노태우 직계조 가운데 문과 급제자는 나오지 않았다. 교하 노씨 문중은 급격히 쇠퇴했고 198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4만5,812명이었다.

노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 가면 ‘구파일원손 만동근원’(九派一原孫 萬同根源)이라고 쓴 노태우의 휘호가 걸려 있다. ‘9파가 모두 한 조상의 후손이고, 그 후손이 여러 갈래로 뻗었으나 조상은 같다’는 뜻이다. 1985년 기준으로 노씨 전체 인구는 19만6,284명. 인구가 이 정도이면 굳이 본관을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실제로 1987년 대선에서 노씨 문중은 총력으로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친족들의 조용한 처신

노태우는 1932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 둘이 태어났지만 막내는 죽고 둘째 노재우(盧載愚)만 남았다. 신용리는 천수답이 많아 가뭄이 들면 배를 곯아야 하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노태우는 어엿한 ‘직장’을 갖고 있는 아버지 덕에 이웃보다 곤궁함이 덜했다.

하지만 노태우 나이 일곱살때 아버지는 막내 동생 노병상(盧秉祥)이 중학 시험을 치르는 것을 돌봐주러 대구로 가다 버스가 기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지경으로 전락했다.
삼촌 노병상의 유언 “장례를 조용히 치르라”

30대에 청상과부가 된 김태향은 어린 두 아들을 이끌고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이때 막내삼촌 노병상(盧秉祥)은 자신을 뒷바라지하다 죽은 형님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조카 태우·재우 형제를 공부시키기 위해 헌신한다. 노병상은 둘째형 노병도를 찾아 중국으로 갔다가 만주에서 사업을 해 모은 돈을 갖고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노태우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노병상은 1965년 서울에서 한성보일러를 인수해 한성기공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자신이 아들처럼 키운 노태우가 대통령에 오르자 노병상은 “조카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며 주변에 ‘대통령의 삼촌’이라는 사실조차 티를 내지 않고 살다 1988년 8월 조용한 장례식을 당부하면서 작고했다. 동생 노재우씨도 6공화국 내내 소리 없이 지냈다. 대선 때는 노태우의 사조직 ‘태림회’(泰林會)를 조직해 형님의 당선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자 다시 철저히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1980년부터 한성기공 사장으로 근무하던 노재우는 회장으로 취임했지만 회사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노병상씨의 장남 성우와 차남 용우가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노재우는 원래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는 삼촌의 당부를 의식해서인지 6공 내내 아무런 잡음 없이 조용하게 지냈다. 현재는 (주)성화산업 회장으로 있다.


청와대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노대통령 가족.
재벌가와의 혼맥

노태우의 친가는 이처럼 단촐하고 평범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아들과 딸은 ‘아버지 임기 동안’ 재벌가와 혼인하면서 ‘권력과 돈’의 정략적인 결합이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을 내내 받았다. 노소영은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장남 최태원(SK그룹 회장)과 결혼했고, 정치를 지망하던 노재헌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의 맏딸 신정화와 결혼했다. 미국 유학중이던 노소영·최태원 부부는 임기말 노태우로부터 ‘스위스은행 20만달러’를 건네받았다가 미국에서 외화 밀반출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고, 15대 총선에 출마하려던 노재헌은 1995년말 터진 노태우 비자금사건으로 꿈을 접었다.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6공때 노씨 종친들은 노태우라는 ‘큰 나무’를 만난 덕분인지 사회 각 분야에서 소리없이 성장했다. ‘九派一原孫 萬同根源’이라는 노태우의 휘호대로 종친들은 본관에 상관없이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성장한 케이스가 대다수인데, 어쨌든 6공때 주요 직책에 오른 노씨(盧氏)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盧信永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직업외교관 생활을 했다. 인도 대사(73), 외무부 차관(74), 제네바 대사(76)를 거쳐 1980년 외무장관에 기용되었다. 이때 노태우가 장관 추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신영은 그후 안기부장(82)과 국무총리(85∼87)로 정치적 성장을 거듭했는데, 민정당 대표 노태우와 ‘노-노체제’를 구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태우에게 수행비서 이병기를 추천한 인물이 바로 노신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스트 전두환’에 대한 시각차이로 관계가 서먹해졌다. 현재는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당대의 보수주의 논객 노재봉(盧在鳳)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에서 6공 출범과 함께 대통령 정치특보로 ‘발탁’되어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며 한때 대망론까지 나왔으나 이를 견제하는 YS의 공세로 꺾였다.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외무관료 노창희(盧昌憙)는 5공때 나이지리아 대사·외무부 본부대사로 있다가 6공화국 초대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유엔 대사, 외무차관, 영국대사를 지냈다. 현재는 전경련 상임고문.

▷노건일(盧健一)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내무관료로 진출해 5공때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충북지사를 지낸 후 6공 들어 산림청장, 내무차관, 청와대 행정수석,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하대 총장.
▷노재원(盧載源)은 노태우와 나이가 같은 교하 노씨 동본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1979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있을 때 노태우의 추천으로 금진호(국보위 상공위원장)와 함께 국보위 외무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5공때 외교안보연구원장, 외무차관,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고 6공 이후에는 외무부 본부대사, 초대 중국대사 등을 지냈다. 지금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노인도(盧仁道)는 교하 노씨 동본으로 벼락출세한 케이스. 충남 아산 둔포면 농협조합장이던 노인도는 1990년 농협중앙회 초대 상임감사가 되더니 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래서 ‘종친 덕을 보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노인환(盧仁煥)은 10대 국회의원(거창·산청·함양)을 지내고 5공때 정계를 떠나 전경련 상임부회장을 했다. 6공 들어 13대 전국구 의원을 지낸 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대표를 지낸 권익현을 밀어내고 산청·함양 공천권을 따냈다. 3선으로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
▷노정기(盧正基)는 노태우와 육사 동기다. 5공때 제2공병단장을 역임한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를 거친 후 6공때 필리핀 대사와 외무부 본부대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