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선 60여척 담합해 일제히 ‘북방한계선’
넘었다고 한 부분은 나의 실수”

① NLL 越線 보도 어디까지 사실인가 - 최초 발언자 연평총각 特種인터뷰


‘월간중앙’은 ‘연평총각’ 김씨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의 실명과 그가 탔던 배 이름 등 그와 관련된 실명 정보를 밝히지 않음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연평도 인근 해역에 떠 있는 해군 2함대 해상기지.어로순시선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해상기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6월29일 연평교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7월1일, 가수이자 라디오 음악방송 DJ로 활동하고 있는 신해철씨의 공식 홈페이지(http:// ghoststation.lycos.co.kr) 자유게시판에는 ‘연평총각’이라는 아이디로 누군가 쓴 장문의 글 한편이 올라왔다.

“어제 방송을 듣던 중 용기를 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이곳 연평에서 꽃게잡이를 하는 어민입니다. (중략) 이번에 진실이 밝혀지면… 이곳 어민도, 해군 당국도 타격이 큽니다. 어민은 어민대로 조업이 제한되면서 밥줄이 끊기고, 군 당국은 이번 사건 은폐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정치권 싸움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번 연평교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중략) 북방한계선으로 올라가면 꽃게가 지천에 깔려 있는데 못들어가니 안달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작업선 선장 60여명이 단합하여 북방한계선을 넘게 된 것이고, 이번 사건이 터지게 된 것입니다.(후략)”
이렇게 시작한 글은 6월26일부터 교전이 있던 29일까지 우리 어선의 조업 상황은 물론이고 우리 해군과 북한 해군의 대치상황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정체불명 ‘연평총각’의 충격 폭로

연평총각은 또 ‘어선들이 그 지역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을 즈음에 내려왔다면… 위와 같은 충돌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어업에 종사하지만 너무 후회됩니다. 교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10여척의 어선들은 그 지역에서 조업하고 있었고, 그것을 저지하고 퇴각하라는 해군 함정에 심한 욕설까지 퍼부었다고 합니다. 저는 사건 현장에 있었고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사건이 무마되는 것 같아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해군 병사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죄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대마왕님(사이트 운영자인 신해철을 ‘대마왕’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 부상병 하나가 들것에 실려 헬기로 이송중 우리 어민들을 보며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립니다. 당신같은 뱃놈들이 정말 밉다’고…큰소리로 흐느끼며 말입니다 라는 충격적인 증언으로 끝을 맺었다.
이 글은 곧 네티즌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각 사이트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다음(Daum) 등 주요 포털사이트 게시판은 물론이고 각 언론사 게시판에는 연평총각이 쓴 글을 놓고 그 진위 여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국방부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 ‘서해교전의 원인은 우리 어민의 무리한 조업 때문이었다’며 연평총각의 글을 신뢰하는 네티즌이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작문임이 분명하다’ ‘우리 병사가 죽은 것이 어민들 탓이란 말인가’ ‘연평총각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이 글을 쓴 사람은 빨갱이나 다름없다’는 등 연평총각을 맹렬히 비난하는 글도 줄을 이었다.
이어 연평총각의 정체가 도마 위에 올랐다. ‘어민 맞느냐. 어떻게 어민이 이렇게 논리정연한 글을 쓸 수 있느냐’ ‘연평도에서도 인터넷이 되느냐’는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만약 연평총각의 글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해전 자체보다 더 큰 파문을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뉴스가 될 판이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6월29일 교전 직후부터 북한 군사령부와 외무성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연 3일에 걸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0시10분경 10여척의 어선들과 함께 연평도 서남쪽 우리측 령해 깊이까지 침입한 남조선 해군 전투함선들의 행동을 저지시키려고 출동한 우리 해군경비함에 대하여 적 전투함선들은 수백발의 총포사격을 가하였다.”(6월29일)
“우리 인민군 해군은 남조선 해군 함선들과 어선들이 최근에 거의 매일과 같이 우리 령해 깊이 침범해 왔지만 북남 사이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려는 념원으로부터, 그리고 세계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사정을 고려하여 여러 모로 자제력을 발휘해 왔다.” (6월30일)


MBC ‘월선조업이 서해교전의 원인’ 최초 보도

“그러한 유령선(NLL을 지칭)을 코에 걸고 우리측 령해 깊숙이 숱한 전투함선들과 어선들을 침투시킨 그 자체가 엄중한 침략행위이다.” (7월1일)
이처럼 군 당국이 언급하지 않았던 ‘우리 어선들의 존재’는 연평총각의 글과 그동안 북한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돼 왔던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통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희 합참 작전본부장은 서해교전 첫 공식 브리핑에서 “30여척의 북한 어선이 북방한계선(NLL) 북방에서 조업중이었다”고 밝혔으나 북측이 주장한 ‘10여척의(남측) 어선’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브리핑에 참석했던 한 중앙일간지 국방부 출입기자는 “이본부장이 우리 어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취재기자들도 ‘교전으로 인해 아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만 주목, 우리 어선의 동태에 대해서는 미처 아무도 신경쓰지 못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각 언론사는 곧 사실 확인 취재에 들어갔다. 연평총각의 글 외에도 어민책임론을 주장하는 제보전화가 몇몇 언론사에 걸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7월1일 저녁 MBC 뉴스데스크는 일부 어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교전이 있기 이틀전 30여척(27일), 20여척(28일)이 조업구역에서 선을 넘어(越線) 조업했고, 29일 오전에는 50여척이 조업구역을 벗어나 이탈 조업했다”고 최초로 보도했다. MBC는 다음날에도 ‘어선 통제 제대로 안됐다’ ‘어민들 사전 월선 담합’ 등의 보도를 통해 이번 교전의 중요한 원인으로 우리 어민들의 ‘불법 조업’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어 ‘한겨레신문’ ‘오마이 뉴스’ 디지털 ‘말’지 등도 ‘월선 조업’이 북한군을 자극했고 결국 서해교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루기 시작했다. 교전의 한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본 수많은 네티즌과 일부 언론은 그동안 사실 여부를 놓고 논쟁이 오갔던 연평총각의 글이 마침내 ‘진실’로 밝혀졌다고 평가했다.
국민들은 일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치권과 군 당국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특정 언론들’이 우리 어선의 ‘NLL 침범’을 기정사실화한 채 무책임한 보도를 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대해 ‘특정언론들’은 “우리는 어선들이 NLL을 넘었다는 단정적 보도를 한 적은 없다. 다만 우리 어선들의 월선 조업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하지 않는 북쪽 경비정을 자극한 하나의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부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언론사와 국방부에 대해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파문이 점점 커지자 국방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국방부는 처음에는 “교전 당일 ‘월선조업’은 없었다”고 발표했다가 일부 어민들의 증언이 속속 나오자 “월선조업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번 교전의 원인이라는 식의 주장은 잘못됐다. 자칫 북한의 주장을 옹호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월드컵으로 하나 됐던 國論 서해교전으로 분열돼

KBS와 SBS를 비롯해 소위(?) ‘보수적’이라고 네티즌들로부터 ‘찍힌’ 언론사들은 국방부의 이런 발표를 비중있게 다루는 한편, 현지 어민들의 또 다른 증언과 반응을 통해 MBC의 보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오마이뉴스는 ‘MBC 특종에 타언론의 딴지걸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시 내보내 교전배경과 원인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이는 한편 ‘월선’ 문제를 보도하지 않거나 비판하는 보수 언론을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비평가이자 재야 진보진영의 대표적 논객으로 유명한 진중권씨가 논쟁의 불길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논쟁으로 현재까지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가 논쟁에 휘말리게 된 데는 바로 연평총각의 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원이기도 한 진씨는 우선 민주노동당이 7월1일 서해교전 사태와 관련해 발표한 대변인 논평 ‘안타까운 연평도 교전’에 대해 다음날 ‘경향신문’ 시론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진씨는 ‘서해교전이 안타깝다고?’라는 제목의 시론에서 ‘일약 제3당으로 부상한 민주노동당에서 서해교전에 대해 논평을 내놓았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이리저리 미루다 이번 사태로 숨진 병사들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에야 비로소 내놓은 것이다. 그나마 읽어 보니 온통 문제투성이다. 내 비록 개인적으로 그 당에 속해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비약한 이상 앞으로 유권자들 앞에서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고 싶다’고 운을 뗀 뒤 ‘(당의) 논평은 마치 이번 무력도발이 NLL의 책임인 양 호도하고 있다.

이런 논법에서 슬쩍 사라져 버리는 것은 다짜고짜 발포하여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의 윤리적 책임이다. NLL이 갑자기 인간으로 둔갑하여 고속정을 타고 남한측 경비정에 포격을 가했다는 얘기일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서로 이견이 있는 NLL에 대해서 남북은 대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남측의 함정에 기습 공격을 한 북측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진씨는 또 7월3일 민주노동당 게시판에 쓴 ‘연평총각의 정체’라는 글을 통해 ‘(연평총각의 글은) 한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목격담이 아닌 작문이다.’(중략) 민주노동당 역시 (연평총각이 묘사한 상황들과) 비슷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 같다….(후략)”고 언급하면서 확인되지 않은 남측 책임론(어민 책임론)을 비판했다.

진씨는 위의 글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으로 확대되는 한편, 몇몇 언론에서 연평총각과 관련한 기사가 나가자 다음날(7월4일) 같은 게시판에 ‘문제의 핵심은 연평총각의 정체’라는 제목의 글을 다시 올렸다. 그는 ‘한겨레·오마이뉴스·말지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언론의 본분을 망각하고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 뒤 ‘취재원의 신원도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연평총각의 글에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이들 매체가 어떤 정치적 예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강력한 논조로 비판했다. 그는 아울러 ‘이 세 매체는 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집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진씨의 비판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진중권에 대한 그동안의 지지를 철회한다’ ‘진보의 탈을 쓰고 있던 진씨의 진면목을 이제야 확인했다’며 그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입’으로 자리매김해온 진씨의 이런 입장표명은 진보진영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씨는 마침내 오마이뉴스 기자회원 자격으로 7월9일 ‘연평총각과 대마왕들, 진보는 유언비어를 먹고 산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연평총각을 둘러싼 제 논쟁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내보였다. 그 기사의 요지는 진보진영이나 진보언론은 ‘진보’를 위해 유언비어(연평총각의 글을 뜻함)에 입각한 여론조작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연평총각의 글은 서해교전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켰고, 이후 진씨와 같은 논객들의 입과 MBC를 선두주자로 한 언론들의 후속취재를 통해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
한편 보수진영의 상황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표적 보수지인 ‘조선일보’는 연일 햇볕정책을 비판하면서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었던 북 함정을 그대로 돌려보낸 군의 대응이 미흡했다’며 질타했다.
급기야 지난 7월5일 자유민주민족회의(my. dreamwiz.com/ncfd) 베트남참전전우회 등 15개 단체로 구성된 ‘친북좌익세력명단공개추진본부’(회장 서정갑)는 MBC를 형사고발하고 시청거부운동을 펼칠 것이라는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서해교전의 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며칠 전까지 월드컵으로 하나가 됐던 우리 국민이 서해교전으로 다시 좌·우, 진보·보수로 갈라져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극한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평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북녘땅이다.
언론 특명, 연평총각을 찾아라!

사실 연평총각의 글과 우리 어선의 ‘월선’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북한의 도발 배경은 물론이고 교전 사태를 몰고온 책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6월29일 교전 직후 수많은 대북문제 전문가들은 그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1999년 서해교전에서 패한 데 대한 복수극’이라는 분석에서부터 ‘미국의 특사 방문을 앞두고 NLL 문제를 공론화할 목적’이라는 분석까지.

또 이날의 도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직접 지시에 의한 계획된 도발’일 것이라는 추측에서부터 ‘군부의 단독 결정에 따른 우발적 사건’이라는 추측까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시나리오일 뿐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결국 ‘북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결론만이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연평총각이 내뱉은 ‘서해교전의 진실’은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여러 가지 의문을 비교적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교전의 원인은 월선’이라는 MBC의 최초 보도 이후 연평총각의 글이 진실을 담고 있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평도에 들어온 수십명의 취재진은 연평총각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일부 언론사 기자들은 신해철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 연평총각의 이메일 주소를 확보하고 이메일로 그와 접촉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말지 취재팀은 우연히 연평총각에 대한 단서를 연평도의 한 PC방에서(연평도에는 두개의 PC방이 있다) 포착하고 연평총각의 신원 일부를 확인했다. 연평총각을 둘러싼 의혹도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지 취재팀은 그가 자주 이용했다는 연평도의 한 PC방을 찾아가 PC방 주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말지 취재팀은 7월5일 ‘디지털 말’ 홈페이지(www.digitalmal.com)에 급히 띄운 1신 보도를 통해 연평총각은 실제로 연평도에서 배를 타는 어부가 맞으며 이로써 그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밝혔다. 또 말지는 연평총각이 탔던 꽃게잡이 배의 선장 인터뷰를 통해 그가 쓴 글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도 했다.
그런데 말지는 연평총각의 글 중 ‘우리 어선이 집단으로 북방한계선(NLL)을 넘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하면서도, ‘사건 당일(6월29일) 어민들이 NLL을 넘었다는 직접적인 증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간혹 NLL을 넘었다는 일부 어민의 증언을 청취했다’고 밝혀 우리 어민들이 평소 과도하게 월선한 것이 교전의 원인이 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연평총각의 글로 촉발된 서해교전의 최대 논쟁거리인 ‘NLL 월선’ 문제는 ‘어로한계선’(조업박스)이나 ‘어로저지선’(적색선)을 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육지로 치면 우리 민간인 60여명이 집단으로 휴전선을 넘어 ‘월북’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NLL 월선 문제는 군 당국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이번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에서 다른 어떤 문제보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문제를 처음 제기한 연평총각을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 주변인들을 통한 간접취재만으로 ‘진실’을 판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조업박스에서 몇 마일 이상 간 배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는 식의 부정확한 증언을 토대로 NLL 침범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보도는 위험천만할 수밖에 없다.

어로한계선이나 어로저지선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임의대로 설정한 구역인 데 반해 NLL은 북한이 인정하지 않는 라인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국경선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연평총각을 만나야 했다. 서해교전의 발발 원인으로 중요하게 부각된 ‘월선’문제, 특히 NLL 월선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그가 쓴 글의 사실 여부와 ‘그날의 진실’을 직접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로 언론사마다 연평총각을 찾으라는 특명이 내려지고 이에 따라 취재기자들의 집중추적이 벌어졌으나 끝내 그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매체에서도 그를 만났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기자 역시 7월2일 1차 연평도 현지취재를 통해 그의 실체에 접근하려 했으나 그의 행방은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사 기자들이 철수한 뒤인 7월8일 기자는 2차로 연평도에 들어가 4박5일에 걸쳐 본격적인 현지 취재를 시작했다. 2차 취재는 약 20년에 걸쳐 꽃게잡이 삶을 살아온 연평도 어민들의 삶을 르포 형식의 기사로 엮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연평총각의 실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접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연평총각은 자신의 신분이 서서히 노출되면서 모든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고 이미 잠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첫 폭로 이후 네티즌들의 끊임없는 의혹 제기에 대해 다섯번에 걸쳐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이 그동안 올린 글마저 삭제하는 등 극도로 방어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기자는 연평총각이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없앤 뒤에야 그의 글을 본 탓에 그의 이메일 주소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디지털 ‘말’지가 3신으로 띄운 기사(연평총각과 같은 배를 탔다는 선장 A씨의 인터뷰 기사)에서 선장 A씨는 “연평총각은 이미 연평도를 떠나 인천으로 갔을 것”이라고 언급해 연평도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아직 연평도를 떠나지 않고 있던 그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