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고 공부벌레들의 해외유학 10년

“흥미 느끼는 분야에서 한 우물 파라”

최근 미국 주요 대학에 입학한 한인 학생 중 44%가 졸업을 못하고 중퇴했다고 미주 중앙일보가 보도했다(재미교포 김승기씨의 컬럼비아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인용했다). 1985년부터 2007년까지 하버드, 예일, 코넬, 컬럼비아 등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14개 명문대에 입학한 한인 학생 1400명을 조사한 결과 졸업생은 56%인 784명에 그쳤다.

김씨는 한인 학생들의 높은 중퇴율에 대해 “지나친 학업 위주의 교육방식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 조사는 미국 현지의 한인 교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어쨌든 민족사관고등학교(이하 민사고) 관계자들은 이 통계를 보면 거꾸로 뿌듯해 할 듯하다. 1996년 개교 후 올해까지 해외 대학에 입학한 민사고 졸업생 300명 중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온 이들이 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두 명은 건강상의 이유로, 한 명은 집안 사정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학교 측이 교사들과 동문회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엄세용 민사고 기획담당 부교장은 “외국 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를 시키는 다른 학교와 달리 민사고는 대학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공부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자랑 삼아 말했다.

“민사고의 교육 프로그램이 미국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조사와 토론, 논문 작성 등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해외 유명대학에 진학해도 ‘생존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민사고의 교육 방침이 미국의 고교 교육과 비슷하게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이야기다.

1999년 민사고 2학년생 두 명이 미국 코넬대와 일본 쓰쿠바대에 합격할 때만 해도 국내 고등학생이 해외 대학에 곧바로 입학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민사고가 그 후로 10년간 300명의 해외 유명대학 합격생을 냈지만 요즘도 어느 고교가 어느 명문대학에 몇 명의 입학생을 보냈느냐에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민사고 출신의 해외 대학 진학률은 1996년 개교 이래 올해까지 배출한 졸업생 725명 중 41%나 된다. “하지만 많은 졸업생이 해외 유명대학에 많이 입학했지만 학교가 그들의 생활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관리하지는 못했다”고 이 학교의 이청 사무국장이 말했다. “이제 민사고 출신들의 해외 유학 10년을 맞아 우리 학교에서도 유학생들의 삶의 질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현재 운용하는 민사고의 교육 프로그램이 세계적인 대학에 진학한 졸업생들에게 도움이 됐는지, 모자람은 없는지 되돌아볼 시점이라는 것이다. 국내 고교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 대학으로 곧바로 진학하는 대열은 해가 갈수록 북적거린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국내 외국어고, 과학고, 국제고를 나와 해외 대학에 곧바로 입학한 학생의 수가 2006년 210명에서 2007년 351명으로 늘었고, 올해는 559명으로 증가세가 더욱 가팔라졌다.

국내 외국어고의 경우는 전체 졸업생 가운데 유학생 비율이 2006년 3.8%에서 올해 9%로 높아졌다. 하지만 민사고의 유학생 비중에는 크게 못 미친다. 민사고는 지난해까지 학생들을 국내 대학을 목표로 하는 ‘민족반(일반계열)’과 해외 대학을 꿈꾸는 ‘국제반(국제계열)’으로 나눠 진학지도를 해 왔다.

양쪽 계열의 학생 수는 해마다 들쭉날쭉하지만 대략 50대 50의 균형을 유지해 오다 최근년에 와서 국제반 학생 수가 느는 추세다. 현재 3학년 학생은 국제반 71명에 민족반 40명으로 운영되고, 2학년 학생은 99명 대 57명으로 국제반 학생이 더 많았다. 민사고는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자 올해부터 계열 분리를 하지 않고 신입생을 받았다.

하지만 1학년 학생 중에도 해외유학을 꿈꾸는 이들이 4대 1가량으로 많은 것으로 비공식 집계됐다. 민사고가 올 신입생 150명의 수강 과목을 분석하고, 학생 면담을 통해 학생들의 진로를 가늠해 본 결과다. 물론 이들 학생이 모두 해외 대학에 진학할지는 불투명하다. “학생 중에는 해외유학을 가고 싶어도 막대한 유학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포기한 경우도 더러 있다”고 나병률 학사부교장이 말했다. 이런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유학생 수는 매년 급증한다.

“대학 가보니 토론 능력 부족했다”

그런 민사고에 최근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감지된다. 많은 학생을 해외 유명대학에 진학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적응능력을 미리 키워주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얼마 전엔 미국 컬럼비아대에 다니는 졸업생 한 명이 모교를 인사차 찾아왔다. 그는 입학 초기 한국 학생들이 대학에서 겪는 힘든 경험들을 교사들에게 전했다.

민사고 교사들이 전하는 내용은 이렇다. 컬럼비아대에선 그리스 고전이나 경제사상사 같은 교양과목은 전면 토론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 졸업생은 고교 시절부터 영어실력이 발군이어서 토론수업을 즐길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대학 첫 수업부터 20명의 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토론시간에 끼어들 틈이 없더라고 실토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토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면서 특정 주제에 부합하는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미국의 경우는 텍스트를 나름대로 소화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토론수업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고 그가 교사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고교 시절 독서토론 프로그램에 비교적 열심히 참여했고, 영어 원서와 한국어 고전 등 40권 이상을 독파했는데도 토론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책 읽을 때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그걸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런데 그저 진도를 나가는 데만 급급했을 뿐 정작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소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뉴스위크 한국판과 민사고가 지난 9월 공동 실시한 민사고 출신 유학생들의 실태조사에서도 학생들은 유학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로 “부족한 토론능력”을 꼽았다. ‘외국 대학에 다니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모두 고르라’는 질문과 사고능력, 외국어 능력, 인문학적 소양, 전공지식, 토론 능력 등 5개 보기를 제시했다.

졸업생 가운데 55.4%가 ‘토론능력’을 꼽았다. 그 다음은 외국어 능력(44.6%), 인문학적 소양(40.6%), 전공 지식(16.8%), 사고 능력(10.9%) 등 순으로 나타났다(178쪽에 관련기사). 인터뷰에 응한 졸업생들도 어려움은 비슷한 듯하다. 미 하버드대 학부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뒤 현재는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 케네디스쿨 1학년 과정에 있는 이상준씨(186쪽에 관련기사)는 민사고 6회 졸업생이다.

그는 “토론을 통해 정해진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한국 학생들과는 달리 미국 학생들의 태도는 무척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영재는 혼자만 잘하면 그만으로 여기지만 이곳에선 토론을 통해 상대편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나야 인정을 받는다.” 그는 학부 학업성적이 중상위권이었지만 토론에서는 미국 학생들에게 다소 밀렸다고 돌이켰다.

이씨와 민사고 동기생인 공학도 박수홍씨도 마찬가지였다. “토론이 없으면 대학에서 학문의 발전도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2003년 제1회 대통령과학장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학부과정을 거친 뒤 현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기계공학)을 밟고 있다.

그도 외국 학생들과 토론할 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낄 정도다. 케임브리지의 박사과정은 수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 뒤 연구에 착수하는 미국 대학과 달리 첫해부터 곧장 리서치(연구활동)에 들어가서 전공지식을 습득하는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리서치 참여자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통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처음엔 그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그래서 처음 6개월 동안은 아예 예상 질문서를 만들어 답변까지 외우다시피 해서 진도를 맞추기도 했다. 지금도 토론 과정에서 간혹 막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감이 붙었다. 그 또한 고교 시절 수학부터 화학 과목까지 영어로 토론수업을 진행했던 경우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마저도 흉내 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민사고 시절 우리의 토론은 근본 원리를 찾아내기보다는 단순하게 대답하고 언쟁을 벌이는 데 머물렀다.”

민사고 졸업생들은 이번 설문에서도 고교 시절의 학습에 대해 나름대로 아쉬움과 당부 말을 쏟아냈다. 해외 생활 8년 차인 한 학생은 “SAT(미국대학수능시험) 점수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토론 능력 등 미국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Soft Skill)을 갖춰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국 대학 3년 차인 한 졸업생은 한국 학생들의 섣부른 자신감을 경계하기도 했다.

“미국의 초등·중등교육 과정이 너무 쉽다고, 또는 SAT 등 입시 시험 점수가 한국 학생들이 더 높다고 미국 학생들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나 집중력, 그리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엄청난 깊이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박수홍(6회)씨는 “한국에서는 독서에 몰입하지 않아도 맘 먹기에 따라서는 시험을 잘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갈고닦는 데 소홀하다 보니 자신의 논리를 세우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윌리엄스 칼리지에 재학 중인 조은혜(8회)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녀는 고교 시절의 토론방식과 대학에서의 토론방식이 너무 달랐다고 말한다.

“민사고 토론수업은 주제와 토론을 위해 주어진 자료를 발표하고 반론하는 식이다. 대부분 순서를 정해 놓거나 찬-반-찬-반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국 학생들은 주어진 자료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른 책에서 발췌한 사전지식을 연구해 오고, 실생활 사례까지 끌어들여 토론한다.”

브라운대에 재학 중인 이예인(9회)씨는 구체적이고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역사수업의 사례를 들었다. ‘9월 11일 테러 조직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주제가 주어진다면? 한국 고교 토론수업 시간엔 전후 사실을 숙지하고 사건 자체에 대한 평가에 그치는 게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 교육에선 ‘이슬람과 미국은 왜 이런 갈등이 있나? ’ ‘문화적 충돌은 일반인들의 삶에 어떤 비중을 차지하나?’ 등 자유 해답식(open-ended) 토론이 이어진다.“

5~10분에 거쳐 자신의 의견을 깊이 있고 다양하게 발표하는 걸 보고 신기하고 부러웠다”고 그녀가 말했다. 언어능력이 부족하면 토론에서 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영어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토론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민사고 3회 졸업생 김세인씨는 미 코넬대 경제학과를 자퇴하고 지금은 영국 런던 ULC대 의학부 진학을 앞두고 있다.

중 1때 조기유학을 떠나 중학 과정을 해외에서 공부한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민사고를 졸업한 뒤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덕분에 영어실력이 원어민 수준으로 능숙했다. 하지만 토론 능력은 달랐다. 그는 “단순히 어학 실력을 갖췄다고 해서 토론 실력까지 보완되지는 않더라”고 말했다. 그는 코넬대를 중퇴한 뒤 결국 영국 런던 UCL대 의대에 입학했다.

“토론교육 방법론이 완성되지 않았다”

민사고 학생들은 영어상용정책(EOP: English Only Policy)이라 해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상생활 중 영어를 사용하도록 지도 받는다. 수업 또한 영어만으로 진행되거나 영어를 보조언어로 활용한다. 1학년 때부터 토론시간을 별도로 두고 글쓰기와 토론을 몸에 익힌다. 게다가 영재들이 대부분이다.

일상적인 영어와 토론 환경을 체험한 이 학생들의 절반이 토론이 어렵다고 느끼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사고나 국내 외국어고 학생들은 SAT(미국대학수능시험)와 AP(미국대학과목 선이수제도) 같은 입학시험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심도 있는 인문교육과 토론수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학교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정황으로 볼 때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민사고 토론교육을 주관하는 백춘현 교사(윤리 담당)는 “학생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토론 능력”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의욕과 노력만으로는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이기도 하다

토론 담당 교사의 입장에서 봐도 종합적인 학습능력인 토론 능력을 키우려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미국 학생들은 초등학교부터 10년 이상 토론 능력을 닦아 왔다. 따라서 제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민사고에서 2∼3년 만에 외국 학생들의 토론 실력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사실 민사고조차 학교 커리큘럼에서 토론교육을 강조한 지가 4∼5년밖에 안 된다(민사고 측은 2004년부터 토론교육을 시작해 이전 졸업생들은 토론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토론 방식을 제대로 알고, 익힌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간 지가 고작 1년밖에 안 됐다는 것이다. 백 교사는 “토론교육 방법론이 아직 완성됐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박순용 연세대(교육학과) 교수는 같은 미국 대학이라도 상위권 대학과 중하위권 대학 간에는 뚜렷한 격차가 있다고 설명한다. 민사고 졸업생 상당수가 미국 명문대에 갔다고 치면, 그들과 함께 토론하는 현지 학생들도 매우 뛰어난 영재들이라는 것이다.

“토론이 몸에 밴 상태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미국 학생들과 견주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민사고 학생들이 힘에 부칠 수 있다”고 그가 말했다. 손은주 민사고 국제진학실장도 “미국 학생들은 고교 시절부터 토론 수업, 발표 수업을 통해 자기 마인드를 형성하는 습관을 길렀다. 문제는 한국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연하게 얘기하는 데 서툰데 반해 미국 학생들은 그런데 능숙하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구조적 현실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영주 한솔영재교육연구원장은 “다 아는 얘기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데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오 원장은 1996년 민사고 설립 직전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민사고 학생선발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선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민사고 학생들의 토론 능력은 설문조사 결과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며 “고교 교육과정에서부터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 원장은 토론을 잘하려면 많은 지식과 깊은 사고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식과 사고력 배양 방식에서 한국과 미국은 좀 다르다. “한국은 많은 걸 가르치지만 깊이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아는 게 많은데 모두가 피상적인 상식에 그친다. 반면 미국 아이들은 몇 가지 자신들이 아는 부분에 바닥까지 파고든다. 그래서 어떤 때는 미국 아이들이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이 아는 걸 자기 관점에서 연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사고력이 길러지는 건 당연하다.”

토론 능력 부족은 학생 개인의 성격 탓도 있지만 한국의 가부장적 유교 문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브라운대 학생인 이예인씨는 자신에 대해 약점을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내길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준비한 발표를 할 때도 내가 실수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조마조마할 때도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민사고 출신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이해인(2회)씨도 “한국에서 가만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공부에 익숙해져 있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은 대부분이 ‘No question is Stupid(아둔한 자는 질문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학생들은 실수해서 망신당하면 어떨까를 고민하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지난 6월 프린스턴대를 졸업한심현석(7기)씨도 “어른들에게 조목조목 따져서는 안 된다고 배운 예절교육이 토론문화와 상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미를 느끼는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라”

민사고 교사들도 변화가 절심함을 잘 안다. 이 학교 백춘현 교사는 “과거처럼 암기나 이해 수준의 지식이 아니라 비교, 분석하는 탐구능력과 훈련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는 3단계 토론교육을 도입했다. 3단계 과정은 ‘논증적 글쓰기 및 토론’→ ‘과목별 심층지식 습득’ → ‘토론을 통한 치밀한 표현능력 확보’를 말한다.

이를 통해 비판적 사고방식을 기르려고 한다. 그러자면 형식 못지않게 내용을 채우는 방법도 중요하다. 손은주 국제진학실장은 “토론수업 도중에 토론의 기술만 익힐 게 아니라 토론 내용을 확대할 수 있는 교육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2004년 이래 4년 동안 민사고 교장을 지낸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은 교장 재임 중이던 지난해 펴낸 ‘대한민국의 희망은 교육이다’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공부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울 뿐이다’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면 위태롭다.’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을 빌린 것으로 지식과 사고력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잘된 교육이라는 말이다.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가의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졸업생들의 주문과 재학생들의 입장이 다르고, 학교 측과 학부모 의견이 갈릴 때는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스탠퍼드대 학부와 대학원(전기전자 전공)을 졸업하고 현재는 병역근무 중인 박재만(4회)씨는 자신의 유학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다. “미국 학생들은 고교시절에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성적이 그 목표에 부합하면 그 뒤부터는 공부에 목숨을 걸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에 와서 잘 적응한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은 입시공부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따져볼 기회가 없다.”

전문가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소장도 “한국 유학생들은 스스로 사고하는 힘이 약하다. 이른바 창의적 문제 해결능력, 자기 관심에 따라 연구하는 능력 등 고등 정신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민사고 졸업생 가운데 고교 시절 입학준비뿐만 아니라 입학 후 대학생활 준비를 함께 했다고 답한 졸업생 응답자는 21.8%에 불과했다.

민사고 측도 입학만이 당면목표가 아닌, 대학에 입학해서 더 잘 적응하는 학생들을 키우려 애쓴다. 학생들에겐 모든 분야를 다 잘하기보다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잘하는 분야에 몰입하라고 지도한다. 동아리 역시 여러 군데 전전긍긍하기보단 특정 분야에 신명을 가지라고 말한다. 민사고에 입학할 만한 인재라면 분야별로 많은 교양을 섭렵하면서도 해외 대학에 입학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손은주 실장은 “재미를 느끼는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입시를 앞둔 학생들과 학부모의 마음은 조급할 수밖에 없다. 일단 뭐든 많이, 또 잘해 놓고 봐야 마음이 놓인다. SAT도 잘 치러야 하고, 내신도 완벽하게 하려 하고, 경시대회에도 한 번쯤 나가고, 봉사활동도 한두 군데는 해 놔야 안심이 된다.

백순근 서울대(교육학과) 교수는 이러한 심리가 일면 당연하다고 말한다. “미국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여러 대학에 응시원서를 보내 입학 허가를 내준 곳으로 가는 식이다. 따라서 객관적 지표와 같은 모집요강이 원하는 걸 열심히 준비할 수밖에 없다. 또한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가 아니라서 당장 필요한 일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학부모 입장도 약간씩 갈린다. 졸업반 아들을 둔 홍미경씨는 아이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니 협력할 때도 있지만 암암리에 경쟁심리가 작용한다고 했다. “1, 2학년까지 객관적 지표 올리기에 치중하다 3학년에 와서야 불필요한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게 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 다른 학부모 이영음씨는 “더 좋은 대학을 가자면 객관적인 지표도 중요하므로 이를 경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율을 중시하는 민사고 풍토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자율에 맡기다 보면 챙겨야 할 것을 놓치진 않을까 염려될 때도 있다”는 심정을 덧붙였다.
학부모와 학생, 학교라는 3자가 맞물린 고등학교 교육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다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더구나 학생들의 능력차도 분명한 상황에서는 말이다.

“해외 대학도 한국의 입시 몰입교육 우려”

한국 유학생들은 현지에서 동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이번 설문에 응한 민사고 졸업생 가운데 “동료들이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41.6%를 차지했다. 이는 졸업생들 스스로 “학업성적이 우수하다”는 응답률 80.2%와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대학 당국의 한국인 학생 평가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한다”는 응답이 35.6%에 그쳤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박재만씨는 이와 관련해 “한국 학생과 현지 학생들 사이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메우기 힘든 간극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에 가서도 학점에 목숨을 거는 일이 미덕이다. 설문에 응답한 민사고 졸업생 가운데 54.5%가 “과외 할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학점이 좋아야 한다”고 답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박재만씨도, 한국에서 온 다른 유학생들도 그랬다. 교내 동아리 활동이나 여름방학 중 인턴생활 등 학과 공부에서 조금 비켜난 활동은 소홀히 하기 쉽다는 것이다. 프린스턴대를 거쳐 지금은 MIT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임지우(5회)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신입생 시절 가깝게 지낸 미국인 친구는 학점은 시원치 않았지만 주말마다 동아리 활동에 몰입했다.

그런 친구들에게 임씨가 “학점 관리에 치중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미국인 친구의 반응은 이랬다. “공부는 일이고 동아리 활동은 노는 건가? 그렇지 않다. 둘 다 미래를 위한 ‘work(일)’다.” 오영주 원장은 “학과 공부만 열심인 학생은 대학생활을 잘했다고 착각할지 몰라도 졸업 후 미국 주류사회에서 인정받는 데는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인기 있는 회사에는 일류들만 모이게 마련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점수보다는 그 밖의 뭔가를 찾는다. “동아리, 커뮤니티, 방송, 선거 등 각 분야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학생들이 회사에서 바라는 인재상이라는 점을 한국 학생들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오 원장은 말한다.

미국에서 초·중등 과정을 거친 한인교포들은 민사고 등을 졸업한 한국 유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군복무차 일리노이대 회계학과를 휴학한 김영석씨는 “한국 유학생 중에는 같이 협력하면서 공부하기보단 ‘이기기 위한’ 이기적인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며 “이들에게서 시너지 효과를 바라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변화의 바람은 외부에서 더 세차게 불어올지도 모른다. 해외 대학도 한국 고교의 입시 과잉 몰입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뉴스위크 한국판은 한국 고교 졸업생들이 주로 가는 미국 내 10개 대학 입학사정담당관에게 e-메일 질문서를 보냈다. 예일, 코넬,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윌리엄스 칼리지 등 4개 대학에서 답신을 보내왔다(182쪽에 관련기사).

예일대의 경우 몇몇 한국 고교에서 벌어지는 최고 대학에 보내기 위한 몰입교육과 고강도 경쟁이 학생들의 정신적·정서적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까를 우려했다. 진 리 예일대 입학사정관은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런 교육은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자아를 개발하거나 관심사를 숙고할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윌리엄스 칼리지 입학사정관 임슬기씨는 “모집요강의 자격을 갖추려고 열심히 준비하지만 한국 고등학교의 교육환경은 학과 외의 지적열정을 개발해 준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그냥 흘려버리기엔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민사고는 성적 쌓기 식의 고교 교육이 대학 진학 후 학생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성 교육, 심화학습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은 하지만 그 선택은 학생들 본인 몫으로 남겨둔다. “학교는 창의력을 높이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밥상을 잘 차려 놓아도 먹는 사람이 잘 먹어야 한다. 부모들이 뒤에서 팔짱을 끼고 본다. 객관화된 시험의 결과는 눈에 금방 들어오지만 토론 능력 심화나 창의력 개발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나병률 부교장이 말했다.

이는 비단 민사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고교 전반의 현실이다. 한 학교가 문제의식을 갖고 변화를 시도한다고 해서 한국의 교육 풍토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박순용 연세대 교수는 최근 국내 고교의 아이비리그 등 미국 상위권 대학 합격률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이 정량 지표에 충실할 뿐 정성 지표에서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와 입학사정관들이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듯하다”고 그가 설명했다.

“스스로 깨치게 하는 게 올바른 가르침”

어쩌면 민사고는 해외 유학에 관한 한 다른 고등학교보다 입시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입장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민사고 졸업생 중에서는 해외 대학에 응시해 합격하지 못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민사고 관계자들은 “역대 민사고 졸업생 중 해외 대학에 응시한 학생 모두가 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원 합격 행진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또 기왕 해외로 유학 갈 바에야 더 유명한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은 게 학생과 학부모의 심정이다(지난해 미국 대학에 합격했다가 등록 포기하고 올해 재도전해서 합격한 졸업생도 1명 있다). 민사고가 학생들에게 토론수업 기회를 늘린다고 하면서도 선뜻 각종 시험을 줄이지 못하는 것도 학습능력 저하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입시를 뛰어넘어 대학이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둬야 한다는 여론도 확산된다. 이 학교 손은주 실장은 “학생들이 시험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여유와 생활공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교사들에게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저것 모든 분야를 다 섭력하려 들기보다는 자신 있고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깊이 있게 밀고 나가라고 가르친다.

이를 위해 학부모 설득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올 초까지 민사고 교장을 역임한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은 “학교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지나쳐 학교로서는 간섭으로 느낄 만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민사고는 개교 13년 역사를 3기로 분류한다. 1기는 1996년 개교 이래 2004년까지 설립자 최명재 이사장이 황무지에서 학교의 주춧돌을 쌓아 올리던 시절이다.

2기는 2004년부터 2008년 초까지 약 4년 동안 교육학자인 이돈희 전 교장이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을 다듬었던 기간을 이른다. 3기는 올 3월 서울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한 윤정일 교장이 부임하면서 세계적인 학교로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변신을 주도하는 단계다. 윤 교장은 취임 이후 글로벌 리더 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먼저 모든 학생에게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도록 했다. 글로벌 리더가 되자면 인명 구조의 기본은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나아가 학생들에게 수영을 의무적으로 가르친다. 윤 교장은 “1학년은 100m를, 2학년은 200m를 수영하는 학생에 한해 진급을 허락할 것”이라고 다그쳤다. 민사고는 ‘체(體)·덕(德)·지(智)’를 학생들이 우선 갖춰야 할 덕목으로 내세운다.

“머리는 결국 엇비슷하게 마련이다. 승부는 체력에서 결정된다. 미국 학생들은 며칠밤을 새워도 끄떡없이 버틴다. 고교 시절부터 체력을 기르지 않으면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힘이 부친다.”

그는 50년가량 교직에 몸담으면서 실천해 온 원칙이 있다. “답을 미리 주기보다는 길을 찾도록 한다. 어떤 때는 학생들이 미로에 빠지더라도 그냥 내버려둔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게 올바른 가르침이다.” 윤 교장 교육철학이 민사고에서 꽃피울지 아직은 미지수다. 살벌한 입시 전쟁터에서 자율식 교육이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반론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민사고는 졸업생들에게 지운 ‘시행착오’를 더는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이미 새로운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민사고의 새로운 선택과 진화는 날로 뜨거워지는 국내 고등학생들의 해외 대학 진학 바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듯하다.

With Gea Kang and Choi Chang Geun ps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