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서 뜨려면 문경중학교로? 무형문화재 많은‘화려한 시골’

커버스토리 문경인물지


신석호’를 아는가? 문경은 예부터 신(申·辛)씨가 많고, 돌(石)이 많고, 호랑이(虎)가 많다고 하여 이 같은 별칭이 붙었다.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문경의 강기(剛氣)를 돋우는 돌은 여전하고, 또 신씨들의 활약도 만만찮다.

우선 현 시장이 신현국 씨이고, 3선 국회의원 출신이자 문경대 총장인 신영국,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전직 국회의원 신국환 씨가 있다. 문경 출신인 언론인으로는 한국경제신문 신상민 사장이 있다.

또 문경에서 자유총연맹 회원을 가장 오래 지냈다는 분은 신현정 씨이며, 시에서 가장 크게 소 사육을 하는 농부는 신명균 씨다. 전북현대모터스의 청소년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신광훈 씨도 있고, 활공랜드에서 맹활약하는 패러글라이더는 신성철 씨며, 문경사과 생산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흙벗농원에는 신범철 씨가 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신석호의 신씨는 평산 신(申)씨를 말한다. 2004년 산양면의 한 무덤에서 400년 된 미라가 발견됐다. 금선단(金線緞) 저고리와 치마를 걸친 생생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살았던 집안이 평산 신씨 가문이다. 이들은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조선 말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 초대 국회부의장인 신익희가 유명하다. 문경 출신 중에는 신씨가 아니라도 씩씩한 산악의 기운을 받은 듯 각계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서도 지역 명문인 문경중학교는 쟁쟁한 인물을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해왔다.

각계에서 활동 중인 문경중 출신은 대부분 중학교 졸업 후 대구나 서울의 명문 고교로 진학했다. 특이하게도 문경 출신은 한국의 건설업계를 주름잡고 있다.

서종욱(15회·59) 대우건설 사장과 이상한(12회) 부사장은 같은 회사에서 중추를 이루고 김중겸(15회) 현대건설 사장, 남선건설의 윤성길(4회) 회장과 윤정호(25회) 대표, 태영의 변탁(4회) 이사회 의장과 권오훈(15회) 상무, 황민욱(5회) 전 한화건설 전무, 김석구(6회) 경주월드 대표, 홍승표(6회) 남진공영 대표 등이 있다.

올 봄 대우건설 서 사장은 새로 사장에 취임한 경쟁사 현대건설의 김 사장에게 술을 샀다. 그들은 문경중학교 15회 동기동창으로 1, 2위를 다투던 친구였다. 두 사람은 모두 지방에서는 유지로 꼽히는 양조장집 아들이었다. 서 사장은 인물이 잘생기고 말주변이 좋아 ‘탤런트’로 불렸고, 김 사장은 조용하면서 집념이 강해 ‘진국’으로 통했다.

해외건설 붐이 일었던 1970년대 서 사장은 리비아에서 땀을 흘렸고, 김 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변탁 태영 이사회 의장은 태영건설 대표를 지냈고, 2002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대한스키협회 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2006년 토리노겨울올림픽 단장으로 세계 7위라는 역대 최고 기록을 냈다.

문경중학교 출신으로 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은 미 항공우주국(NASA) 핵물리학자로 미국에서 생활하는 여영기(4회) 씨와 케이스웨스턴대학 교수인 이동훈(4회) 씨다. 고려대 법대 학장인 채이식(14회) 교수, 서강대 신방대학원장인 김학수(15회) 교수, 서울대 농대 부학장인 김경욱(15회) 교수도 있다.

젊은 학자로는 경희대 전자정보대학 정연모(23회) 교수, 신흥대학 행정학과 김정호(24회) 교수 등이 있다. 관계에서는 황원탁(4회) 전 독일대사, 천기호(2회) 전 경찰청 치안감, 국토해양부 도로국장인 권진봉(18회) 씨, 행정안전부의 고윤환(23회) 국장이 눈에 띈다.

기업계 인사로는 코콤의 고진태(4회) 회장과 고성욱(13회) 사장, 이창무(7회) 아세아제지 대표, 박병재(7회, 영창악기 대표 부회장 겸 현대산업개발 상근 고문) 전 현대자동차 대표, 류장림(23회) 시공테크 대표가 있다. STX의 유럽대표이사 사장인 신상호 씨는 지난해 산업포장을 수상했고, 벌크선 수주를 확장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

[한국경제신문] 대표인 신상민 씨는 신씨 문중의 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문경중 출신만 뛰어난 것은 아니다. 예천중학교를 나온 문경 동로면 출신의 이한성(53) 씨는 현직 국회의원으로 창원지검 검사장(사시 22회)을 지냈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판·검사가 대결을 벌여 승리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랑스런 문경인상을 받은 아시아트레딩 엄태우(71) 대표와 대우건설 이상한(62) 부사장은 각각 문경 산양면과 점촌 출신의 뛰어난 기업인이다. 금융계에서는 유진투자증권의 이인환(50) 전무가 돋보인다.

점촌 출신으로 대우증권에서 뼈가 굵은 그는 업계 최초로 기업의 경영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통합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하고,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과 업무원가관리시스템을 도입해 효율적 원가관리를 실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대통령 표창과 함께 ‘신지식금융인’에 선정됐다.

이제 문경에 살고 있는 인물을 살펴보자. 지리산 청학동에서 한학을 배운 특이한 학력을 지닌 조수복(60) 선생은 <본초강목>에 나오는 청려(명아주)장 지팡이를 만든다. 청려장은 어버이날과 노인의날에 선물로 불티나게 팔리는 문경의 특산품이 됐다. 문경새재아리랑을 전수받은 송옥자(58) 선생은 문경읍 출신으로 현재 충주여중에서 국악 강사를 하고 있다.

문경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공장(한 해 매출 1,400억 원)을 운영하는 사람은 이이주(58) 사장이다. 전기·전자용 코일을 생산하는 삼동문경공장을 1999년 설립해 지난해 산업훈장을 받았다. 동로면 간송리에 사는 하문상(31) 씨는 최연소 이장이다. 2007년 추석 때 TV에서 하는 이장·통장 전국노래자랑에서 인기상을 받기도 했다.

문경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이 사람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조령초등학교를 나온 김정옥(61) 선생이다. 중요무형문화재인 도예 명장으로 찻사발축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경북대 명예교수로 7대째 가업을 이어 도자기를 빚고 있으며 2006년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받았다. 젊은 도예가로 경북 무형문화재인 이학천(49) 선생도 유명하다.

그는 2007년 신지식인에 선발되기도 했다. 방짜유기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이봉주(83) 선생은 평북 정주 사람이다. 문경에 정착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징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자수의 달인인 김시인(63) 선생은 경북무형문화재다. 그는 자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렵다는 육골침을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장수 황씨 소윤공파 집안의 독특한 가양주인 ‘호산춘’을 빚어내는 권숙자(78) 선생도 문경의 자랑이다. 안동에서 19세에 이곳으로 시집온 그는 200년 전통의 술을 빚어 문경의 풍류를 돋우는 경북무형문화재다. 신현국 시장이 가장 고마운 분이라고 표현한 강덕수 STX 회장도 ‘문경의 사람들’에서 뺄 수 없다. 고향은 이웃 구미이지만, 기꺼이 문경에 리조트를 지어 이 고장 경제에 큰 도움을 준 은인이다.

다양한 문경의 인물들에 접근하다 보면 하나같은 공통점이 있다. 이 고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문경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 애향심과 뚜렷한 정체성이 문경을 움직이는 힘이 아닐까? 문경은 자연도 아름답지만 사람 또한 아름답다.

한지제조장 ‘김삼식 정신’
배 곯아도 허튼 짓 않는 58년 뚝심
<조선왕조실록> 담는 1등 종이 뽑히다



문경을 말하려면 초등학교 3학년 중퇴 학력이 전부인 구릿빛 얼굴의 스승 하나를 만나야 한다. 열 살 때 시작해 58년간 한지를 만든 김삼식(68·사진) 선생이다.

전쟁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자형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워 시작한 종이인생. 종이를 만들어 지게에 지고 집집마다 나눠준 뒤 나중에 추수철에 곡식으로 받는 장사로 시작했다.

종이 한 짐을 팔아도 보리 몇 되를 못 받는 배고픈 거래였지만 다른 일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일만 했다. 이력이 붙은 뒤에는 오토바이 한 대를 사서 전국을 누비며 배달을 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전국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는 스스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경의 한지 제조장 김삼식 선생이 유명해진 까닭은 모두 포기하고 떠나버린 길을 바보처럼 혼자 지켜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보니 혼자만 남았다. 혼자 남으니 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를 찾아간 날 마침 전주시청 직원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복사할 종이를 사기 위해 방문했다. 공무원들은 남아있던 200장을 구입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던지 흠이 있어 제쳐두었던 50장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들이 김 선생의 한지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주시에서 실록 용지 선정을 위해 여러 곳에서 한지를 받아 자외선 테스트를 해봤더니 김 선생의 종이가 1등으로 나왔다. 햇살에 들어 있는 자외선을 농축해 쬐어보면 얼마나 세월을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도대체 김 선생은 한지를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경북도 무형문화재 30호인 그는 어릴 때 배운 원칙대로 종이를 뜬다.

우선 다른 많은 한지 제품은 닥나무를 적게 쓰거나 아예 중국에서 화학약품으로 처리한 닥나무를 쓴다. 백피를 칼로 긁지 않고 약품을 써서 녹인다. 이렇게 해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인건비 950만 원이 들 것을 25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제품은 질기지도 않고 인체에 해롭고 오래 보존되지도 않는다.

김 선생의 방식대로 하면 고작 1년에 200장 정도 만들 수 있다. 그것도 겨울 석 달 동안에만 생산이 가능하다. 날씨가 더우면 원료가 상하기 때문이다. 김 선생이 외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첫째, 돈이 없어서. 생산하는 데 돈이 들어갈 것이 거의 없는 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양잿물도 돈이 드니 안 쓰고, 풀도 못 사서 천연풀을 만들어 썼다. 둘째, 욕심이 없어서. 욕심이 끼면 많이 벌려고 하는데, 그러면 절대로 성가시고 생산성 없는 전통 한지를 지키지 못한다. 셋째, 게으름이 없어서. 이는 순 몸으로 때우는 일이기에 기계에 의존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을 싫어했다면 벌써 다른 길로 샜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 선생은 셋째아들 춘호(35) 씨에게 가업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아들이 이 고단한 일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 두려워 10년간 다른 데서 실컷 고생하고 오라고 말했다. 아들은 자동차 세일즈를 해서 4,000만 원을 벌었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동안 사장에게 인정받기도 했지만 결국 한지공장으로 돌아왔다.

일을 자신의 대에서 접으려 했던 선생은 아들이 고마워 1억 원을 들여 집 앞에 닥나무밭을 사서 가꿨다. 춘호 씨는 충북대 제지 관련 학과에 다니며 이론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공장 이름을 삼식지소(三植紙所)라고 붙이고 ‘진실’과 ‘양심’과 ‘전통’ 이 세 가지를 심어 나가겠다고 아침마다 부자가 나란히 앉아 다짐하는 풍경. 문경이기에 더욱 어울리는 한 장면이다.

찻사발 고을의 고선희 ‘문경다례원’원장
茶 안 나는 도시가 찻잔 품격은 최고
다기는 쓸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칠석날 ‘낡은 그릇 선발대회’ 눈길



찻사발은 차(茶)를 담는 사발이다. 차는 아열대에 가까운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경남 하동이나 전남 보성의 차가 유명한 것은 우선 기온 때문이다. 중부로 올라오는 문경에서는 녹차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경만큼 녹차를 즐겨 마시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이 도시는 가히 ‘찻사발의 도시’라고 부를 만하다. 차는 나지 않는데 차를 마시는 그릇을 만드는 도예요가 25곳 이상 있다.

그 중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도예가만 세 명이다. 그들은 말한다. “차 생산지보다 찻잔 생산지가 제대로 차를 즐기는 곳”이라고 말이다. 찻잔이 좋아야 차생활의 품격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문경은 차 ‘산’지(産地)가 아니라 ‘용’지(用地)이다. 이곳의 자부심은 여기서 나온다. 문경다례원 고선희 원장(사진)은 해마다 음력 칠월 칠석만 되면 문경새재에서 다례식(茶禮式)을 갖는다.

벌써 13년째 이어온 행사다. 만남의 큰길인 영남대로의 길목에서 견우와 직녀를 생각하며 차를 마시는 일은 회자정리 이자필반(會者定離離者必返)의 세상 이치를 음미하게 한다. 이 모임에서 인상적인 것은 ‘가장 아름다운 찻잔’을 뽑는 일이다. 그 해 문경에서 생산한 일등품 찻잔에 상을 주는 행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한 찻잔 중에서 고른다.

말하자면 ‘낡은 찻잔 콘테스트’다. 갓 생산한 찻잔은 아직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 고 원장의 견해다. 사람의 손을 타고 차를 담으면서 자연스럽게 찻빛이 스며들어 인간과 차와 그릇이 오랜 벗처럼 서로 어울려야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 원장은 찻잔을 들어 보이며 곱게 낡아가는 찻잔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다.

찻잔을 날마다 닦아주면 처음에는 까칠하고 서먹해 보이던 것이 윤기가 나면서 호흡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찻물을 가늘게 터진 잔금 속으로 받아들여 애잔하고 생기 있는 무늬를 돋운다. 이 지방의 평범한 주부였던 고 원장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갑자기 몰려오는 허한 느낌을 떨치기 위해 차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법, 거칠고 일그러지는 표정을 부드럽게 펴는 법, 들뜨고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는 법, 상대방의 입장을 곰곰이 생각하는 법, 다시 한번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다례교실의 넓은 유리창 밖에서는 대나무 그림자가 햇살을 쓸었다. 고 원장 뒤에는 조선시대 차의 달인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이 씌어진 병풍이 향기를 뿜는 듯했다.

문경의 길 닦기 17년 동일건설 고대용 사장
“건설업 투명해져 술상무도 잘랐죠”
지방 건설업자가 털어놓는 ‘지역에서 기업하기’



"나는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데….”동일건설 고대용 사장(사진)은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17년간 문경의 도로포장공사를 도맡아 한 사람인데 왜 할 말이 없겠는가?

다만 지역사람들의 질서라는 것이 있어서 기라성같이 포진한 선배들을 두고 나서는 일이 염치없게 느껴진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문경에서 기업하기가 어떠하냐는 질문에, 지방마다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요즘 같은 때는 지역 건설사가 살아남기 힘겹다고 말한다.

입찰면허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고 나서 업체가 난립해 과잉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도로와 교량 건설로 먹고살아온 회사인데 이제는 업종을 다각화하지 않으면 못 먹고산다고 했다. 동일건설은 조경과 산업설비 쪽으로 업무영역을 넓히기 위해 연내에 업종 면허를 보완할 계획이다.

고 사장은 지방선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가슴이 많이 멍든다고 말한다. 시장선거나 농협·축협 등의 조합장선거를 치르고 나면 사람들이 갈갈이 찢어져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선거 후유증만 보자면 차라리 관선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 업체로서도 줄을 잘못 섰다 당선된 사람들의 등쌀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기업하는 일에 전력해도 살까 말까 한데 이런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말이다. 상대 입장을 배려하고 남의 의견도 존중하는 선거문화가 정착돼야 하는데 중앙이든 지방이든 그게 참 어려운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음을 짓는다. 시장이나 의원이 중앙 정당의 공천에 매달리는 시스템도 지역으로서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고도 말했다.

조금 예민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혹시 최근 불황에 감원하셨는지요?”

그런데 별로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예. 2년 전쯤 한번 구조조정하고, 올해 하고 해서 두 번쯤 됩니다.”

고 사장은 50명이던 직원을 30명으로 줄였다고 한다. 이윤이라는 것이 빤한데, 사람에게 드는 비용을 줄이지 않으면 계산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고 한다. 퇴직금을 감당하기도 버겁다. 결국 전문성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부터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예전에는 진짜 ‘술상무’도 뒀는데, 요즘은 건설업이 투명해져 술 먹자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그런 직책도 필요없어졌다고 한다.

문경의 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아마도 도로에 관한 한 문경만큼 잘돼 있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시장들이 오시면 길부터 신경 쓰시더군요. ‘신규’로 길을 놓을 데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동일건설은 1992년 창업해 온천~진안 간 도로와 골프장으로 연결되는 지역 간 도로를 놓았다. 휴일에는 가끔 골프를 치는데, 문경에서 골프 치기가 참 좋아졌다고 한다.

10여 년 전 골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예천비행장 골프장까지 가서 배웠는데, 요즘은 몇 십 분만 가면 좋은 골프장이 있어 접대하기가 좋다고 말한다. 그는 가끔 등산도 간다. 주로 사불산을 오르는데, 그 산의 다른 이름이 ‘공덕산’이어서 수주 잘되게 해달라고 공덕 쌓으러 간다고 한다.

농업도 벤처다, ‘민들레식품’서수분
“나는 이제 일편단심 민들레랍니다”
인생 새로 갈아 ‘문경 명물’ 심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주역과 <동의보감>에 관심이 많았던 고명열(60) 씨는 어느 날 민들레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보통사람들은 야생화로 보지만 건강전문가들은 약초로 보는 풀이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에서 민들레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다. 치과기공사로 일하던 아내 서수분(57·오른쪽 사진) 씨는 남편의 열정적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주흘산 끝자락과 포암산이 맞닿은 하늘재 아래 땅 3,000m2를 샀다. 2005년의 일이었다. 문경 일대 자생 민들레 씨앗을 채취해 실험재배를 시작했다. 이듬해 첫 수확한 민들레로 그들은 김치를 만들어 특허를 신청한다. 밭을 7,500m2로 늘리고 2007년에는 아예 공장을 만들었다. 민들레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민들레고추장·민들레차·민들레비누·민들레진액까지.
이들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정한 원칙은 이것이다. 첫째, 사람들의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서 자잘한 이익을 위해 장난치지 않겠다. 둘째, 민들레를 빨리 키우려고 무리한 방법을 쓰지 않겠다. 하우스를 하는 일도 자제하고, 농약을 치지 않으며 화학비료도 쓰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셋째, 문경이라는 고장의 깨끗한 물과 공기를 먹고 자란 민들레의 장점을 잘 살려 지방 명물이 될 수 있게 하겠다.
넷째, 새롭게 개발되는 건강식인 만큼 민들레를 맛있게 먹고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제품으로 실험해보자. 다섯째, 가족이 모여 힘겨운 농사를 짓지만 민들레 꽃처럼 환한 웃음을 서로에게 늘 보여주자. 문경시청은 일편단심 민들레 가족(‘민들레식품’의 대표는 아들인 고창곤 씨다)의 이런 뜻을 높이 사 벤처육성농업 지원사업으로 채택한다.
늦여름 넓은 밭에 푸르게 돋은 민들레 앞에 선 서수분 씨는 자식을 바라보는 눈길로 농작물을 바라보았다. 날마다 풀을 뽑느라 무릎이 닳을 만큼 힘겨운 노동의 결과가 저 무성함일 것이다.
“민들레는 3년이면 다시 갈아엎고 새로 씨를 뿌려야 해요. 처음에 씨앗을 뿌렸던 것들은 이제 다 차(茶)와 김치와 고추장과 진액이 되어 팔려나갔지요.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힘든 만큼 사람들에게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에요.”
민들레부부는 삶을 새롭게 경작한, 흙 위의 벤처다. 문경이 새로운 지자체로 거듭날 수 있는 바탕에는 이런 실험정신이 숨어있었다.
민들레의 잎과 뿌리의 약효
_ 민들레 잎에 들어있는 베타카로틴은 유해산소를 제거해 노화와 성인병을 막아주는 항산화물질이며, 비타민A와 비타민C가 풍부해 야맹증과 감기에 그만이다. 칼슘 함량도 높아 뼈·치아 건강을 돕고 혈압도 조절해준다. 빈혈을 막는 철분도 꽤 들어있다. 잎 몇 닢만 먹으면 병원에서 처방받은 이뇨제와 별 차이 없을 만큼 소변 보기가 좋다.

몸에 난 사마귀와 검버섯도 없애준다. 뿌리는 해열제이며, 종기를 삭이고 위를 튼튼하게 하는 약재다. 간 기능 개선 효과도 뛰어나며 당뇨병과 고혈압 치료에도 좋다. 뿌리를 먹으면 모유가 부족한 산모는 젖이 나온다. 호흡기 염증과 홍역·이하선염·수두에도 위력을 발휘한다.

도천 천한봉 선생과 막내딸 천경희 씨.

일본에서 스타로 모시는 ‘이도다완의 거장’…무형문화재 ‘문경요’ 천한봉 선생
“문경 막사발은 글로벌 경쟁력 지녔죠”

이 땅의 옛 백성들은 막사발에 밥이나 국, 그리고 반찬을 담았다. 목이 컬컬해지면 이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들이켜기도 했다. 서민의 애환이 서린 막사발에는 필요한 것 이상의 꾸밈이 없다. 소박하고 단아한 맵시여서 보기만 해도 정겨움이 생겨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영남지방에서 가져간 막사발에 반해버렸다.

막사발로 막 쓰기에는 그 물건이 너무 귀해 보였다. 그는 이것을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고 부르며 차회를 열었고, 그때 사용한 찻사발은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문경 운달산 자락에 있는 ‘문경요’는 청자도 백자도 아닌 조선의 막사발을 구워낸다. 문경요의 도천(陶泉) 천한봉(76) 선생은 일본에서 더 유명한 도예가다.

도쿄(東京)를 비롯한 대도시 백화점에서는 자주 그의 찻사발 전시회가 열린다. 일본 다도계에서는 그를 ‘옛 백제인’ 모시듯 한다. 1976년 그곳에서 다기 전시회가 열렸을 때 일본인들은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국보로 모셔둔 이도다완을 직접 만들어내는 도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와 골동품 애호가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고, 이날 이후 도천 선생은 일본의 스타가 됐다. 1990년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 도천의 작품이 일본 왕실에 주는 선물로 채택됐고, 왕실에서는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도천 선생은 1974년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다완에 관한 공부를 했는데, 이때 국보 이도다완을 눈여겨본 뒤 그것을 만드는 도공의 손길과 호흡을 상상하며 기억해 놓았다.

그런 눈썰미와 열정이 ‘일본 국보’의 재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도천 선생은 일본의 흙과 한국의 흙이 달라 일본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사발을 그대로 만들기 어렵다고 말한다. 특히 문경의 흙은 찻사발을 만들기에 좋은 석회암이 많이 섞여 담백한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일본 내각부는 도천 선생에게 문화훈장인 ‘욱일쌍광장’을 걸어주었다. 도천은 1970년대부터 전시회를 통해 매년 15만 달러 내외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2005년 우리 정부는 그의 수출실적을 평가해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도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의 조부는 독립운동을 한 천보락 장군이라고 한다.

부친은 일제 때 징용을 갔다. 그 바람에 그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대동아전쟁의 폭격 속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다. 그의 피 속에는 일본과 싸우고 일제에 희생된 조상의 비원(悲願)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옛 슬픔과 분노를 주무르고 구운 듯 도자기를 만들어 오히려 그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

해방 후 도천은 귀국해 아버지의 고향인 문경에 정착했다. 부친이 돌아간 후 열네 살에 도자기공장에 취업한다. 그러다 전쟁을 맞아 난리통에 세 번씩이나 입대하는 기구한 기록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 도자기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를 쓰는 바람에 도자기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요강을 만들어 판다. 이 요강장수는 1970년대 차문화가 생겨나면서 다시 다완을 만들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1년간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 도천은 다섯 딸을 두었는데 그 중 맏딸 천명숙(48)과 막내 천경희(38)가 가업을 잇고 있다. 그의 거실에는 큰 마루를 놓아 그 위에 도예 작품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물어보았다. 몇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 그릇을 왜 명품이라고 하는 건지요?”

“그릇을 뒤집어보면 매피(梅皮)가 올라 붙은 것이 보이지요? 우연히 만들어진 그것이 귀한 것이지요.”

“실수로 잘못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요?”

“허허…. 바로 그것입니다. 진짜 귀한 작품은 인간이 실수하는 사이 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문경 대승사 철산스님, ‘칠장(漆醬) 맛’의 비밀을 설법하다
“송홧가루가 된장 만들 듯 보시하게”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不作不食)’는 불교의 치열한 혁명정신은 봉암사뿐 아니라 대승사에서도 느껴졌다. 이곳의 주지 철산 탄공스님(사진)은 절 옆에 아예 단지와 그릇을 만드는 요(窯)를 차렸다. 거기서 만든 단지를 이용해 칠장된장을 담근다. 칠장(漆醬)은 옻을 넣어 담근 장을 말한다.

하안거가 끝나는 날인 8월5일 오후 나절 수천 개의 단지가 늘어선 절 입구에 들어섰다. 수행정진을 끝내고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들의 인사로 잠시 시끌시끌한 절간. 한쪽에는 선원(禪院) 건물을 짓는 공사로 붉은 흙이 배를 드러내고 있다. 절집답지 않게 넓은 유리창이 있는 방에 앉아 철산스님은 말없이 차를 따랐다.

“어찌하여 스님은 된장을 직접 담그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절에서 신도들에게 이것저것 받기만 하니 뭔가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오래 됐는데 요즘 사람들이 된장을 잘 안 담그더라고. 그래서 내가 담가 나눠줘야겠다 싶었어요. 한 5년쯤 됐습니다.”

“된장 담그는 법은 어디서 배우셨는지요?”

“절에서 오래 내려오는 전승(傳承) 된장이 있습니다. 간장도 담그지요. 절에서 하는 방법 그대로입니다.”

“절 앞에 있는 단지들을 보았습니다.”

“예. 그것들은 모두 이 절의 가마에서 만든 단지입니다. 항아리 또한 된장 맛에 영향을 미칩니다. 항아리가 덜 구워지거나 더 구워지면 장맛이 달라집니다. 또 이 고장의 흙으로 빚은 단지 속에서 된장이 익어야 제대로 맛이 나지요. 그래서 가마를 만들어 아예 단지와 그릇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철산스님은 된장 맛이 좋은 비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 넣습니다. 옻을 넣고 오미자도 넣고 표고도 넣고. 소금은 간수를 5년 이상 빨아낸 죽염을 씁니다. 소금물에 메주를 넣지 않고, 물을 먼저 넣고 메주를 넣은 뒤 한 달쯤 두어 발효꽃이 피면 그때 소금을 넣지요. 여기는 물 좋고 공기도 좋아 된장이 맛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탄공스님은 혼잣말처럼 칠장된장의 진짜 비밀을 슬쩍 흘린다.

“사실은 저 된장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지. 사불산(대승사의 뒷산)이 만드는 거지. 사불산의 소나무가 송홧가루를 뿌릴 때 단지를 다 열어놔. 송홧가루가 들어가야 칠장된장이 완성되는 것이거든. 햇살과 바람과 송홧가루가 된장 맛을 만드는 천연 조미료지. 세상 일이란 나 혼자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다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이지. 저 소나무들은 자기네들이 된장을 다 만들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셈이니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가? 된장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까지 해낼 줄 알면 진짜 보시받은 것이지. 사불산 소나무가 된장 만들 듯 다른 사람에게 공덕 베풀며 살아라. 그것이 칠장된장의 설법이야.”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낮은 소리로 말하던 대승사 된장스님의 목청이 딱 한 번 높아지던 때는 바로 그때였다.

대승사
_ 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의 말사다.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죽령 서남쪽 40리 지점에 있는 사불산의 품에 안겨 있다. 조선 초 득통기화가 이 지역에 머무르며 ‘반야경’을 연구하다 절을 개창하고 후학을 지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몇 차례 중수했다. 1912년 절 내에 유일강원이 개설돼 권상로·안진호 등의 석학을 배출했다. 부속 암자로 성철스님이 정진했던 묘적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