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산성기행 | 관산성과 옥천

구진벼루 외진 굽이에 서린 聖王의 恨
백제의 운명 가른 관산성전투… 중흥조 잃고 쇠락의 길로


▎구천으로 비정되는 구진벼루. 매복에 걸린 성왕은 관산성 아래 구천에서 신라의 말먹이꾼에게 머리를 내줬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꿈도 스러졌다.

백제 성왕 32년(554) 7월 어느 날 밤, 한 무리의 군마가 밤길을 달려 지금의 충청도 옥천 부근의 구천에 이르렀다. 구천은 옥천읍 서쪽에서 금강을 향해 북류하는 서화천 일대를 말한다. 성왕이 직접 거느린 병력은 보병과 기병 50명이었다. 관산성 부근에 주둔했던 백제군 본영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백제군 본영은 고리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태자 여창(餘昌)이 대군 3만 명을 이끌고 신라군과 대치했다.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성왕은 비밀리에 태자 여창이 주둔한 고리산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전투에 시달리던 태자 여창을 위로하려던 길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 회의를 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간을 단축하고 비밀을 유지하려는 기·보병 50명의 단출한 야간행군이었다. 밤길을 달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비장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있었지만 성왕의 호위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신라군은 성왕이 소수의 호위병만 대동하고 움직인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지금의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구진벼루에 매복했다. 비밀스러운 왕의 동정을 정확히 파악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신라의 첩자가 성왕의 측근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매복한 군대는 비장(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이끄는 부대였다. 매복에 걸린 성왕은 결국 도도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조’에는 이러한 사실을 짧게 기록했다.

“성왕 32년(554)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도 관산성전투 기록이 나타난다.

“백제왕 명농(明襛·성왕)이 가양(加良·왜)과 더불어 관산성을 공격해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참지 등이 마주 나가 싸웠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 이에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병사를 이끌고 와 교전해 비장인 삼년산군(보은)의 고간 도도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한강 유역을 상실한 성왕은 신라 공격을 준비하면서 일본에 원병을 청했다. 1000명의 군대와 100필의 말이 군선 40여 척에 나누어 타고 백제에 도착했다. 백제는 사비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먼저 동쪽으로 진군해 옥천의 관산성과 보은의 삼년산성을 점령하고 신라군을 소백산맥 너머로 물리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백제의 전략은 성왕의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백제는 개로왕을 고구려에, 성왕을 신라에 잃는 국가적 비운을 맞았다. 국내 사서에는 성왕의 죽음을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일본서기> ‘흠명 15년 12월조’는 더욱 자세하다.

“여창이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에 요새를 쌓았다. 아버지 명왕(성왕)이 걱정했다. 여창이 오랜 싸움에 지쳐 괴로움을 당하고 또한 오랫동안 침식을 폐함이 많았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명왕이 친히 위로하려 했다. 신라가 이를 듣고 나라 안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길을 끊고 공격했다. 이때 신라 사람들이 좌지촌의 사마노(飼馬奴) 고도(‘도도’ 혹은 ‘곡지’로도 불림)에게 ‘고도는 천한 종이요, 명왕은 이름 있는 왕이다. 지금 천한 종으로서 군왕을 죽였다 하면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했다. 명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종놈이 감히 왕의 머리를 베려 하느냐’ 하니, 고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은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명왕이 체념한 듯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과인은 매양 너의 나라 배신이 골수에 사무쳤다’ 하고 걸터앉았던 의자에서 차고 있던 칼을 풀어주었다. 명왕은 마침내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했다. 고도는 성왕을 참수한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일설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는 수습하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명왕의 뼈는 도당(都堂)의 계단 아래 묻었다).”


▎관산성은 6세기 중반의 두 영웅인 백제의 중흥군주 성왕과 신라를 도약시킨 진흥왕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 격전지다.

신라는 말먹이꾼인 도도로 하여금 참수한 것도 모자라 성왕의 두개골을 신라 도당 북청 계단 아래 묻고 도당에 드나드는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승자의 비정함이 보이는 대목이다.

산책 코스로 변한 나제 격전지

성왕을 삼년산군의 군대가 기습했지만 고리산성에 있던 태자 여창의 군대를 배후에서 공격한 군대는 신주의 김무력이 이끌었다. 사방이 포위된 백제군은 식량이 떨어지자 어떤 방식으로든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백제군은 탈출 과정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이 전투에서 좌평 4명과 병사 2만9600명을 잃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말 한 필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의 참패였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 태자 여창은 신라 정벌을 반대하는 노대신들에게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고 큰소리치며 출정을 강행했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대에도 전쟁을 주도했다 참패당하고, 부왕의 죽음까지 자초한 태자 여창은 즉위하지 않고 출가해 부왕의 명복이나 빌고자 했다. 대신과 백성들의 만류로 출가해 수도하려던 여창의 계획은 철회됐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죽음으로부터 위덕왕의 즉위까지는 몇 년의 공백이 있다. 관산성 패전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백제를 중흥하고자 힘썼던 성왕이 신라의 매복에 걸려 어이없게 전사한 곳은 관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산성은 의외로 그 정확한 위치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관산성을 현지에서 찾으려면 쉽지 않다. 관산성으로 추정되는 성터를 현지에서는 삼성산성으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직 관산성의 위치가 고리산(환산)이라는 설과 삼성산이라는 설이 맞서 옥천 향토사학계에서는 어디가 관산성이라고 확증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이곳은 관산성이 아닌 삼성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경부고속도로 옥천IC를 지나 옥천읍으로 들어서면 시내에서 쉽게 갈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산천조’에도 “삼성산은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옛 성의 남은 터가 있다”고 기록해 성이 고을 가까운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성벽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현지에서는 그저 시민들의 산책 코스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 산성 곳곳에는 체육시설을 갖추어 놓아 역사의 현장이라는 인식보다 체력 단련 장소로 알려진 듯했다.

삼성산성은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와 군서면 월전리 경계의 해발 약 310m의 삼성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이다. 삼성산성은 성황당산석성 혹은 삼성산고성이라 불리며 최근에는 월전리산성으로도 불린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황당산석성이라 하였다. “옥천군 관아에서 서쪽으로 4리에 있으며, 성 둘레는 396보로 성벽이 험저하고 성 안에는 우물이 한 곳 있는데 가물 때는 물이 마르며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옥천읍에서 금산지역을 지나 백제의 옛 수도였던 부여 땅으로 가려면 지금도 삼성산 고성 밑을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이 지역은 백제 성왕의 중흥정책과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정책이 충돌하는 지역이 되었다. 나제동맹이 깨진 이후에는 신라가 주도권을 확보해 후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게 된다.

백제 성왕이 지름길로 백제군의 본영을 향하다 사로잡혀 처형된 관산성 부근 구천이 어느 곳인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관산성은 삼성산성이고, 구천은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을 싸고 도는 협곡인 구진벼루를 가리킨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어간다.

관산성인 삼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흔히 옥천읍 현대금빛아파트에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삼성산체육공원 시설안내도’가 있고, 이곳에서 체력 단련을 겸한 산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쪽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우리 일행은 산성의 주방향인 남쪽 사면을 살펴보려고 좀 더 서쪽으로 나가 양수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양수리 입구에는 양수마을 유래비가 세워져 있고, 차도가 끝나는 농가로부터 비교적 완만한 비탈길이 나타난다. 해발 300여m의 높지 않은 산을 천천히 오른다. 참나무·소나무·떡갈나무가 적당히 섞여 있는 남쪽 사면으로 오르는 길은 편안하고 푸근하다. 30분 정도 올랐을까? 산의 안부(鞍部)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오르면 오른쪽 산비탈에는 흘러내린 성벽 돌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 능선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삼성산성이 축성됐다.

삼성산성은 둘레가 500m 정도 되는 규모가 작은 성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기에 형태가 삼태기 모양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에 세 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세 곳의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산성이 동남쪽을 주방향으로 축성됐으니 애초 이 산성의 주인은 백제였을 것이다.

성의 남쪽 능선에서 기와편이 출토됐는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유물이라고 했다. 특히 토기편은 적갈색을 띤 백제 계통의 경질토기가 주류를 이뤄 이 성이 백제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성안 북쪽 능선 위에 건물 터와 우물 터가 있다고 하나 우리 일행은 그 형적을 찾지 못했다.

능선의 남쪽으로 망대로 보이는 석루지(石壘址)가 있고, 중앙에는 장대지로 보이는 대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옥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산성들, 특히 서산성과 삼양리토성이 내려다보인다. 장대지로 보이는 곳에 지금은 정자를 세워 놓았다. 동쪽으로 4번 국도가 철길과 나란히 영동읍으로 길게 이어진다. 경부고속철도가 군서면 방향에서 이원면으로 지나간다. 또한 경부고속도로가 옥천읍을 가로질러 이어진다. 국도와 철로,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옥천은 교통의 요지 중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도 나제(羅濟) 간 주요 동서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신라군이 옥천 일대로 침공한 루트이기도 하다.

4번 국도가 지나는 옥천읍 동이면과 이원면의 경계가 되는 산이 도덕봉(407m)이다. 도덕봉 남서쪽 아래 고개가 솔치로, 옛날에는 이 길을 거쳐 영동으로 갔다. 그런데 솔치 주변에 도적떼가 극성을 부려 지금의 4번 국도가 나 있는 구둔치로 우회해 이원면이나 영동으로 갔다고 한다. 원래 도둑봉으로 불리다 후대에 와서 좋은 이름인 도덕봉으로 고쳤다고 한다. 전국에 산재한 도덕봉은 대부분 산적들이 출몰하던 도둑봉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틀림없다.

지금의 삼양리사거리 경찰초소 부근이 나제 간 교통로의 길목으로, 이곳이 나제 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진터벌’이다. 지금은 교각이 놓여 교통이 편리하지만, 고대에는 소옥천(서화천)이 굽이굽이 돌며 절벽을 이룬 곳이고 지금의 삼성산성·삼양리토성·서산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방어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태자 여창이 이곳 공격에 주력하다 그만 신주에서 내려온 김무력 부대의 급습을 받아 고리산에서 포위되었다.

나제동맹과 백제·신라의 쟁패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서쪽보다 훨씬 가파르다. 곳곳에 밧줄을 설치해 산행을 돕는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처음 지나쳤던 현대아파트 뒤편이 된다. 관산성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신라군과 백제군의 대치 상황에서 먼저 확보해야 할 요충임이 틀림없다.

답사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옥천과 대전 일대에는 산성이 유난히 많다. 마치 바둑판의 포석처럼 산봉우리마다 산성이 빼곡하다. 백제로서는 옥천이 뚫리면 대전의 평지를 지나 바로 부여나 공주가 위험에 빠지고, 신라의 경우 옥천을 돌파해 영동이 무너지면 김천·구미가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옥천 일대의 사수는 쌍방의 사활이 달렸다. 이곳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략적 우위의 확보가 결정되는 셈이다.

삼성산성 주변에는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삼양리토성과 서산성 외에도 무수한 산성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성은 오래되고 쇠락해 원래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체계적 발굴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이름은 현지의 향토사가들에게 구전되던 이름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이 지역 산성의 체계적 발굴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전투를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세기 후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한마디로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왜·가야 연합의 대결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요동지역의 모용 선비족과 충돌하면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격전을 치러 치양전투와 패강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당시 백제는 최전성기라 할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왕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결국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 부자가 거느린 3만 군대의 기습을 받아 평양성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다. 그 후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내부 정비를 통해 국가 체계를 개혁하고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정복군주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의 등장으로 최전성기를 이룬다.


▎삼국시기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양국의 싸움이 치열할 때는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던 옥천은 주위에 수많은 산성이 분포해 삼국시기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내물왕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해를 도모했다. 양국의 관계가 긴밀해졌다고는 하나 완전한 동맹 관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항했고, 특히 371년 평양성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신라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동맹을 맺은 때는 433년으로 신라 눌지왕 17년이며, 백제 비유왕 7년이다. 이들의 동맹은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 장수왕의 남방 경략에 대항하려는 포석이었다. 장수왕은 79년이라는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부왕인 광개토태왕의 위업을 계승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장수왕은 먼저 백제를 침략해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백제는 개로왕의 뒤를 이어 문주왕이 즉위한 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에 위협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라에도 위협이 되었으므로 두 나라는 한반도 안에서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는 견제세력권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433년 백제가 먼저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가 이에 응했다. 백제는 좋은 말과 흰 매를 보냈고, 신라는 이에 답해 황금과 구슬을 보내면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갔다. 백제의 동성왕은 493년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 서로 국혼을 맺는 것을 계기로 고구려에 맞선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고구려에 빼앗긴 땅의 회복에 힘썼다.

그 결과 백제는 가야까지 끌어들여 성왕 29년(551) 마침내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했다. 그러나 중국과 직접적 교통로와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 확보를 바라던 신라 진흥왕이 2년 후인 553년 7월 군사를 돌이켜 백제의 수복지역인 한강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동맹 관계는 깨져버렸다.

성왕 부자는 비전파(非戰派) 귀족들의 반대에도 554년 신라정벌군을 일으켰다. “과인은 매양 너의 나라 배신이 골수에 사무쳤다”는 말처럼 신라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의 공격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우세한 듯했지만, 결국 성왕은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양국 사이의 동맹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그 뒤 백제와 신라는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100여 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삼국의 각축이 처절했던 산성의 고장 옥천의 신라 때 이름은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다. 경덕왕 때 관성(管城)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때는 경산부(京山府=星州)에 속했다. 이후 충선왕 때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시켜 경산부에 속했던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을 관리토록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옥천으로 고치고 경상도에서 옮겨 충청도에 편입시켰다.

충절과 향수의 고장 옥천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옥천은 금강의 본류가 굽이굽이 관통하며, 주변으로 소백산맥의 속리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비교적 험준한 산악을 이루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경북 상주군, 서쪽으로는 대전시, 남쪽으로는 영동군, 북쪽으로는 보은군이 둘러싸는 옥천분지에 위치한다. 한반도 남북 교통의 요지에 속하는 옥천은 예부터 추풍령을 넘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옥천지역은 금강 줄기를 따라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안내면 용호리와 막지리의 구석기 유적을 비롯해 동이면 석탄리의 고인돌·선돌 같은 거석문화와 석기류 유물을 남겼다. 금강 강안과 구릉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자연조건을 이루어 비교적 많은 유적이 확인되는데, 대청댐 수몰 때 학술적 발굴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시기에는 주로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양국의 싸움이 치열할 때는 수시로 주인이 바뀐 격전지였다. 신라 소지왕 때 보은의 삼년산성과 함께 옥천에 쌓은 성이 굴산성이다. 이 밖에도 관산성을 비롯해 지금의 옥천읍을 중심으로 분포한 산성 터는 이 지역이 삼국시기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려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학교조’에는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 있는 고을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다. 맑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영특한 인재들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선비들의 학문이 다른 고을에 으뜸간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인재의 고장 옥천에서 먼저 꼽히는 인물이 이곳에서 전사한 신라 명장 김흠운이다. 김흠운은 태종무열왕의 사위이며 딸은 신문왕의 왕비가 되었다. 어려서는 화랑 문노의 낭도로 수행했으며, 명예와 기개를 중시했다고 전한다. 이 지역에서 불렸다는 <양산가(陽山歌)>에 그의 호국사상이 전해진다.

<삼국사기> ‘열전 김흠운조’에 나오는 <양산가>는 백제 군사와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신라 장군 김흠운의 넋을 달래려고 지어 불렀던 노래라고 쓰여 있다.

김흠운은 양산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공략하다 백제군의 야습을 받았다. 대사 전지가 후일을 기약하라고 권유했다.

“지금 어둠 속에서 지척을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으로 대왕의 사위인데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이 되나 우리에게는 수치가 됩니다.”

그러나 흠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대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치겠다고 했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상관없다.”

흠운은 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대감 예파, 소감 적득과 함께 전사했다.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아가 싸우다 또 죽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지은 노래가 신라 가곡인 <양산가>다.

중봉 조헌은 그의 수백 명 문하생에게 김흠운의 양산사상을 틈나는 대로 가르쳤다고 한다.

“몇 번이고 대궐 난간을 꺾고, 몇 번이고 임금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던고.”

이 말은 일찍이 율곡이 조헌을 두고 한 말이다. 그가 올린 상소문만 수십만 자가 되어 끌어내면 대궐 난간을 붙잡고 늘어졌고, 임금이 피하면 그 옷자락을 붙잡고 곧은 말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에는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도끼 하나를 든 다음 ‘왜란이 일어나니 대비하시라’는 상소를 올리고 “만약 이 상소가 불측하거든 도끼로 목을 쳐달라”며 며칠이고 엎드려 있던 과격파 강골이다.

옥천에는 중봉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二止堂)은 제자를 가르치던 서당이며, 안내면 도일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선생의 위해를 모시는 사당이다. 묘소는 안남면에 있다. 김포 출신인 선생이 옥천과 인연을 맺은 까닭은 반대 세력의 음해를 받아 파직당한 후 이곳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옥천군 안읍 밤티마을이 그곳인데, 선생은 이곳에서 지방 선비들과 교유하며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주와 옥천에서 기병해 금산전투에서 700의사와 함께 순국했다.

옥천의 또 하나의 인물을 꼽으라면 정지용이다. 인구 5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 옥천이 그나마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유는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찾는 방문객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옥천IC와 가까운 옥천군 하계리에 있다.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 정지용은 그의 뛰어난 시재(詩才)에도 한때 이 땅에서 금기시되던 인물이다. 그의 북쪽행을 놓고 월북이냐 납북이냐 말이 많았다. 1988년에야 해금돼 지금은 국어 교과서에 그의 유명한 시 <향수>가 수록돼 있다.

그는 <문장>이라는 잡지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비롯해 많은 시인을 등단시켰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도 가입했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다 납북되었고 도중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옥천은 한때 유명한 포도 산지였다. 서화천과 보청천의 금강지류가 옥천 땅을 휘돌아 나가고, 금강이 굽어 도는 풍요한 땅이 이름 그대로 옥천이다. 소백과 노령맥이 만나는 산골 마을임에도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던 곳이 옥천이다. 그래서 옥천은 산성의 고장이요, 충절의 고장이다. 지금은 <향수>의 고장으로 많은 이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