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법원은 양형 문제에 대해 국민의 비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며,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양형에 대한 판사들과 국민의 의식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는 듯하다.예전에 언론에 보도된 한 사건을 소개한다. 폭력전과가 10여 차례 있는 50대의 한 남성이 동네 막걸리집에서 무전취식을 하다가 나가라는 여주인을 구타해 전치 3주의 상해를 가하고 집기를 파손하고, 피해자를 협박했다. 동네에서 소소한 피해를 끼쳐 온 골칫거리인 셈인데 그렇다고 큰 사건까지는 일으킨 적이 없어 그동안 벌금이나 집행유예만 받았었다. 이번 재판부는 엄벌의지를 밝히며 실형 1년 6월을 선고했다.하지만 위 기사에 달린 댓글의 반응은 의외였다. “1년 6월이 엄벌이냐”, “저런 암적 존재는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 “미국이었으면 징역 20년은 했을 거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깡패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비행기로 태평양에 갖다 버렸다더라”, “우리나라는 법원이 너무 온정주의여서 범죄가 끊이지 않는 거다” 등등.이러한 ‘엄벌주의’는 사실 인간의 본성에는 가장 부합하는 입장일지 모른다. 고대 함무라비법전이나 구약성서, 고조선의 팔조금법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문명의 형벌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동해(同害)보복과 엄벌이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팔을 자르며, 간음한 자는 거세하고, 빚을 안 갚는자는 노비로 삼는 등이다.세계에서 가장 형벌 엄한 미국은 안전한 나라?문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점이다. 만약, ‘엄벌주의’만으로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형사정책적으로 입증됐다면, 지금도 대다수의 문명국가에서 빵 한 개를 훔쳐도 평생 감옥에 가두고 중범죄는 공개 처형하는 식의 형벌체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엄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드는 예가 미국이다. 미국은 확실히 선진국 중 가장 형벌이 엄하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수감자 수는 200만 명을 넘고 있으며, 1999년을 기준으로 프랑스의 수형자가 평균 8개월 형을 선고 받는데 비해 미국의 수형자는 평균 34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프랑스보다 4배 더 형벌이 엄하므로 4배 더 안전한 국가일까? 거꾸로, 4배 더 무거운 형벌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요소가 많은 사회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더구나 ‘엄벌’이란 공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평균적 형벌 수준이 높고 많은 수감자 수를 유지한다면 교정시설을 엄청나게 증설해야 하고, 세금으로 그 많은 수감자를 먹여 살려야한다. 수감자들의 가족이 경제적 곤궁에 처하게 되어 복지비용과 범죄의 가능성이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회적 비용을 투입해야 할 만큼 범죄로 인한 사회적 손실과 위험이 심각한 상태라면 이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성범죄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한 전반적인 우리나라의 치안 수준은 세계적이다.그에 비해, 범죄율을 낮추는 데 보다 효과적인 것은 오히려 ‘필벌주의’다. 범죄를 범했을 경우 적발되어 처벌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면, 충동적 범죄를 제외한 일반 범죄의 범죄율은 상당히 떨어진다. 쉽게 들 수 있는 예가 바로 ‘카파라치’다. 교통단속당국이 카파라치에 의한 교통위반사범 신고를 포상하게 하자 위반사례는 극적으로 급감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도, 측천무후 시대의 밀고조직, 북한의 5호담당제 등 전 사회적인 상호감시와 밀고 체제가 있다.문제는 ‘필벌주의’는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언제나 완벽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 하에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경쟁 내지 투쟁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사람이 규칙을 완벽하게 준수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 사례들에서 보듯, 완벽히 범죄를 적발해 내어 벌하는 사회는 엄격한 통제사회가 되는데, 개인들이 사회의 완벽한 통제에 대해 느끼는 고통이 범죄피해를 입을 가능성으로 인한 고통보다 클 수도 있다. 오죽하면 엄격한 청교도 통치자 크롬웰이 사망하자 숨죽이며 살던 백성들이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는 속설이 남아 있을까.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는 개인의 본능적인 폭력범죄와, 범죄충동을 약물로 거세해 순종적인 바보로 만드는 체제의 구조적 폭력을 대비해 보여주며 무엇이 더 무서운 것인지 질문했었다. <데쓰노트>라는 일본 만화도 있다. 일기장에 범죄자의 이름을 적어 넣기만 하면 범죄자를 죽게 할 수 있는 노트로 범죄 없는 세계를 만들려는 비뚤어진 이상주의자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 이야기의 기발한 만화적 상상력은 ‘필벌주의’, ‘엄벌주의’로 손쉽게 범죄 없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들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인간의 나약함은 관대한 양형을 제시하기도하지만 만화의 결말도 그렇듯이 인간사는 그렇게 단순 명쾌하지는 못한 것 같다. 결국 가치상대주의에 기반한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엄벌주의’와 ‘필벌주의’는 모두 형사정책적 수단에 불과하지 목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복잡 다양한 현대사회에서 다른 모든 위험과 마찬가지로 범죄 역시 절멸의 대상이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인 듯하다.위험을 절멸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위험을 낳기에, 적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형벌은 사회의 안전함을 보장하기에 적절한 수준이면 족하지, 형벌 수준이 절대적으로 어느 정도여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재미있는 것은, 흔히 기사 댓글에서 보는 반응과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의 양형 의견은 무척 다르다는 점이다. 여러 건의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해 보았지만, 배심원들이 법관의 의견과 전혀 다른 중형을 주장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관대한 처벌을 주문해 놀란 적이 많았다. 대체로 연령이 높고 사회경험이 많을수록 관대한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실수할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재판을 마친 후 배심원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언론보도를 통해 몇 줄로 사건을 접할 때와 직접 하루종일 재판에 참여하면서 피고인을 직접보고 범행 동기 및 전후 사정을 들었을 때와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는 것이다.한번은 우발적인 살인사건이었는데, 배심원 7명 중 4명은 징역 6년, 1명은 징역 5년, 나머지 두 명은 8년, 10년 의견을 제시했다. 통상적인 법원의 양형례보다 너무 낮은 의견들이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국민의 사법참여라는 국민참여재판의 취지상 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일반적인 예보다 낮은 형을 선고했다. 아마도 비난 댓글이 폭주했으리라.무작위로 선발된 배심원들이 오히려 판사들보다도 낮은 양형의견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일 듯싶다. 피고인은 여인숙을 전전하며 며칠간 도피하다가, 죽음으로 친구에게 속죄할 마음으로 칼로 팔목을 깊게 자해했다. 병원에 후송돼 목숨은 건졌지만, 신경이 손상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어 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법정에 섰다.재판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잇지 못하는 피고인에게서 배심원들은 진정한 반성의 빛을 본 것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이 일화에 대해서도 배심원들의 값싼 동정이라거나, 피고인의 쇼가 아닌가 하는 등의 냉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직접 배심원이 되어 보면 어떤 의견을 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범죄가 피해자에 미치는 고통에 대해 함부로 가벼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자에 대한 징역 1년이 엄한 벌인지 아닌지 역시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판사로서는 ‘징역 1년의 무게’를 함부로 가벼이 여길 수는 없기에 늘 고민할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