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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스승(죠와 명인)의 묘수에 토를 단 15세 제자(슈와) 

정수현의 바둑경영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비판 가능해야 조직 건강 … 당 태종은 신하 반대에 취미활동도 자제



리더가 결정한 일이나 행동이 잘못 됐다고 부하가 지적한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건방지다거나 괘씸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리더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좋다. 비판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조직은 발전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판에 익숙하지 않다. 일의 잘잘못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데도 서툴다. 남이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도 불편해 한다. 비판이란 말 자체를 아예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문화는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기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 누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면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태도는 조직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국가 지도자나 기업의 CEO 앞에서 비판하면 괘씸죄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러면 아랫사람들은 입을 닫게 되고 잠재적인 좋은 아이디어가 사장되기 쉽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도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으니 좋은 수를 찾아내기 어렵다.

조직의 리더들은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비판적인 견해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자만심이나 어긋난 카리스마로 불통의 리더십을 갖는다면 그만큼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역사상 비판의 목소리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한 인물로는 아마 당나라의 태종이 첫손에 꼽힐 것이다.

태종 이세민은 중국의 400여 황제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군이다. 하지만 그는 형제까지 죽이고 집권한 냉혈 군주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다. 신하들은 자칫 입을 잘못 열었다간 목숨이 위태해질 수 있는 체제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비판적인 의견을 아무도 내지 못할 것이다.

불통의 리더십 임직원 아이디어 사장시켜

이런 점을 간파한 태종은 자신의 잘못을 따지는 신하에게 상을 주는 정책을 썼다. 아첨하는 신하를 배격하고 국가 운영에 유익한 의견을 마음껏 얘기하도록 한 것이다. 이 덕분에 태종의 정책이나 행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하가 많았다고 한다. 국가의 대사는 물론이고 황제의 일과까지 신하들이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태종이 좀 피곤해 황궁 근처의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위징이라는 신하가 만류했다. “폐하, 지금이 어느땐데 사냥을 하려고 하십니까. 사냥은 아니 되옵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화가 났다. 심신이 피곤해 기분 전환을 좀 하려고 하는데도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위징은 지금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순간 태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위징의 말을 받아들이고 사냥을 단념했다. 이처럼 태종은 자신의 취미생활까지 지적하는 신하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 간언이 옳음을 깨닫고 비판적인 의견을 수용했다. 이런 면이 당 태종의 위대한 점이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직언을 하고 잘못된 일을 자유로이 비판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통치에서 범할 수 있는 실수나 판단착오를 최대한 줄인 것이다. 그가 ‘정관(定款)의 치(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건전한 비판을 수용한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역사가들은 평한다.

비판적 의견을 적극 수용한 태종의 리더십은 사실 모든 리더들에게 해당되는 덕목이다. 비판의 목소리가 없다면 지도자가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쉽다. 그런 조직은 경직된 시스템이 되어 위험해질 수 있다. 바둑 분야에서는 대체로 자유로운 비판을 관대하게 수용하는 편이다.

고수가 둔 바둑이라도 실력이 낮은 사람이 수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를 하도록 한다. 하수가 감히 고수의 바둑을 평하느라고 핀잔을 주지 않는다. 예를 하나 보자. 17세기에 일본 바둑계에 힘바둑으로 유명한 죠와(丈和) 명인이 있었다. 싸움바둑의 달인이어서 별명이 ‘전투 13단’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죠와는 화려한 전투바둑의 대명사인 이세돌 9단처럼 펀치력이 엄청나게 강한 고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명인기소(名人碁所)’라는 바둑 관직을 놓고 4대 바둑문파가 경쟁을 벌였다. 최대 가문인 혼인보(本因坊)를 대표한 죠와(丈和) 명인은 라이벌 겐낭 인세키(幻庵因碩) 8단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명인기소를 노린 인세키는 제자 아카보시 인데쓰(赤星因徹)와 죠와가 시합을 벌이도록 했다. 만일 이 대결에서 죠와가 패하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될 수도 있는 중요한 판이었다.


이 바둑은 몇 날을 두고 진행됐다. 최고봉에 오르려는 스승을 위해 인데쓰는 꼭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인데쓰는 죠와 명인의 묘수 몇 방을 맞고 쓰러졌다. 패배의 충격으로 인세키는 피를 토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바둑팬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이 대국은 피를 토한 바둑이라고 해서 ‘토혈지국(吐血之局)’이라고 불린다. 승리한 죠와 명인은 혼인보가의 제자들에게 이 바둑을 보여주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1도>의 장면에서 백2로 희생타를 던지고 4로 둔 수가 묘수로 일컬어진다. 죠와는 이 수의 의미를 설명하며 자랑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멋진 수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15세의 한 소년 제자가 죠와 명인이 둔 수를 지적했다. “선생님이 두신 수는 좋은 수지만, 이런 희생타를 두어야 한다면 그 전에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앞으로 돌아가 <2도>의 백1로 두어놓고 백3에 두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흑4에 백5로 둘 수가 있어 실전보다 좋았습니다.”

언로 트여야 생각지 못한 묘수 나와

예상치 못한 지적에 죠와 명인은 놀라움과 함께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지 못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당돌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기쁜 생각이 들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슈와(秀和)인데 나중에 바둑사에 남을 고수가 되어 혼인보가의 뒤를 이었다. 강펀치를 휘두르며 전투로 판을 이끌어가는 죠와 명인과는 달리 슈와는 유연한 실리 위주의 바둑을 구사했다.

스승과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스승이 생각지 못한 수를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비판적인 의견을 수용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생각지 못한 묘수를 만나는 수가 적지 않다. 자신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 예상치 않은 문제점을 사전에 발견할 수도 있다. 조직의 리더라면 당 태종처럼 부하 직원들의 비판적인 의견에 상을 줄 정도의 아량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1208호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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