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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전문성·인성 > 학력·스펙 

채용시장에 변화의 바람 

김태윤·조용탁·박미소·김성희 이코노미스트기자
기존 채용방식으론 인재 선별에 한계 …차별화된 이색 채용 확대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단순한 스펙 쌓기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 속 서적은 본 기사와 직접 관련 없음.



30대 1. 지난해 국내 대기업의 평균 입사 경쟁률이다. 좁은 취업의 문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취업 준비생은 직무와 하등 상관없는 이른바 ‘스펙 경쟁’에 청춘을 바친다.

기업은 몰려드는 응시자에 골머리를 앓고, 인재 선별에 애를 먹는다. 이 와중에 청년 고용률은 뚝뚝 떨어진다. 다행히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바뀔 조짐이 보인다.

삼성·현대차를 비롯한 주요 기업이 채용방식을 바꾸고, 스펙보다는 인성과 직무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채용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인재상과 취업 준비생의 반응, 해외 채용 사례도 알아봤다.


약 20년 전인 1995년 삼성그룹은 파격적으로 채용 방식을 바꿨다. 오랜 관행이던 학력 제한과 필기시험을 폐지하고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도입했다. 단편적 암기 지식이 아니라, 취업 응시자의 능력과 자질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취지였다.

기본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는 ‘열린 채용’으로 첫 관문을 넓힌 후, 기업에 적합한 인재를 선별하는 방식은 이후 국내 채용 문화에 새로운 흐름이 됐다. 현대자동차(HKAT, 2013년 HMAT로 변경)·SK(SKCT)·LG(LG웨이 피트테스트)·롯데(L-TAB)·두산(DCAT)·CK(CJ CAT) 등 대부분 주요 그룹이 이 방식을 도입했다.

많은 구직자에게 기회의 평등을 안겼지만,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 대졸 예정자와 취업 준비생은 적성검사에 매달렸다. 삼성그룹이 원하는 인재를 가리기 위한 SSAT 시험에 지난해 하반기 공채에만 10만명이 몰렸다. 상반기까지 포함하면 20만명. 대졸자(32만명) 셋 중 둘이다. 이들이 모두 삼성의 인재상일 리 없다. 이들은 삼성뿐 아니라 기업별 적성검사 서적을 몇 권씩 사서 공부해야 했다.

전문 학원과 고액 과외까지 등장했다. 적성검사는 또 다른 필기시험이 됐다. 하지만 각 기업에 맞게 개발한 직무적성검사를 보고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적성이 맞지 않아 회사를 일찍 떠났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기업 인사담당자 378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신입사원 10명 중 3명은 1년 내에 조기 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사 이유는 ‘직무가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40.5%)’, ‘생각과 다른 업무(28.5%, 중복응답)’가 가장 많았다.

적성검사의 변별력이 낮아지면서 수 십, 수 백대 일의 취업 경쟁률 속에 ‘스펙 경쟁’은 과열됐다. 원래 기계 사양·설명서를 뜻하는 스페시피케이션(Specfication)은 구직자의 취업 능력이라는 뜻으로 변용됐다. 20년 사이 2배로 늘어난 대학생들은 스펙을 쌓느라 졸업을 미뤘다.

휴학·어학연수는 필수가 됐고, 대학 재학기간은 평균 6년으로 늘었다. 상아탑은 거대한 취업 준비센터로 변했다. 중·고교 내내 사교육에 의존한 대학생과 취업 준비생들은 여전히 학원가를 맴돈다. 그러는 사이, 지난해 우리나라 청년 고용률은 사상 처음으로 40% 밑으로 떨어졌다.

직무와 무관한 스펙은 무용지물

기업들은 고민에 빠졌다. 소모적인 스펙 경쟁을 야기한 주범으로 몰렸다. 기업이 채용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취업 준비에 따르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막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박용기 삼성전자 인사팀장(전무)은 “표준화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 과다하게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비정상적으로 응시자가 몰리면서 기업들도 채용 스트레스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화그룹은 10대 그룹에서는 처음으로 인·적성검사를 폐지했다.

최근 발표된 삼성그룹 채용방식 변경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홍경선 삼성 미래전략실 부장은 “자신이 일할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쌓는 것보다 입시에 치중하는 현상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자격조건 없이 연 2회 모든 구직자에게 SSAT 응시 기회를 줬던 삼성은 20년 만에 서류 전형을 부활했다. 대학 총장 추천(약 5000여명)을 받거나 삼성의 현장 인터뷰를 통과한 응시자는 서류전형이 면제된다. SSAT에 과도하게 응시하게 몰리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서류전형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박용기 전무는 “서류전형은 스펙의 나열이 아니라, 직무 영역에 얼마나 집중돼 있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무는 “자격증·해외연수 등 직무와 무관한 스펙 쌓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평소 회사와 직무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갖고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발굴될 수 있도록 서류전형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인력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준비된 인재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스펙 쌓기보다는 실제 직무 수행에 관련된 경험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자격증만 많은 것은 오히려 감점 요인”이라고도 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인재가 있는 현장으로 찾아가 수시로 대상자를 발굴하는 ‘찾아가는 열린 채용’도 강화하기로 했다.

삼성그룹의 채용방식 변경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대학 총장이 과연 학생 선별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부터, 정량 평가에 정성 평가까지 더해지면서 취업 준비생의 부담만 늘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채용방식 변경이 아니라, 채용규모 확대가 더 시급한 문제라는 목소리도 높다. 그럼에도 삼성그룹 채용혁신은 방향을 잘 잡았다는 게 중론이다. 단순한 나열식 스펙보다는 직무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찾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31일 서울 소재 한 고교에서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마친 수험생들이 교문을 나오고 있다. 지원자가 10만명을 넘어 20대1의 사상 최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길거리 캐스팅, 프레젠테이션, 직무별 채용

이미 재계·금융권에선 크고 작은 채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1년에 한 두 차례 공채로 뽑는 전통적 채용방식은 그대로지만, ‘탈 스펙’을 강조한 다양한 이색 채용이 확산 중이다.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첫 시행한 ‘더 에이치(THE H)’가 좋은 예다. 현대차의 기존 채용방식이 ‘원서접수→서류전형→인·적성검사→1·2차 면접→최종선발’이었다면, 길거리 캐스팅으로 불리는 ‘더 에이치(THE H)’는 ‘캐스팅→모임 프로그램(4개월)→면접→최종선발’로 진행된다.

그룹 인사 담당자가 새벽이나 저녁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일자리에 적합한 인물을 찾는 암행 프로그램 방식이다. 현대차는 지난해에 이어 전국 대학을 직접 찾아가는 ‘전국구 채용설명회’, 열린 프리미엄 채용 상담회를 지향하는 ‘잡페어’를 확대할 예정이다.

또한 이 회사는 입사지원서에 외국어 구사 능력, 부전공, 경력 사항, 수상 내역 등 14개 항목을 삭제해 불필요한 스펙 부담을 줄였다. 지난해에는 새로운 인적성검사(HMAT)도 개발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내부 임직원의 역량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원자의 잠재적 역량을 여러모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은 ‘바이킹 챌린지’라는 새로운 채용 전형을 선보였다. 학벌·영어성적·자격증 등은 전혀 참고하지 않는다. 대신 5분 내외의 프레젠테이션(PT)을 통해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고 능력을 가진 인재인지 자유롭게 설명하도록 한다. 일종의 오디션 형식이다. 선발된 지원자는 합숙프로그램에서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평가를 받고, 한 달 간 인턴십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가린다. SK그룹 측은 “도전을 즐기고 위험을 감수하는 창조적인 인재, 즉 바이킹형 인재를 뽑기 위해 이 전형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바이킹 챌린지 전형으로 입사한 SK텔레콤 이현동 매니저는 “대기업이 열정과 패기를 갖춘 인재를 찾는다는 말은 결국 어느 한 가지 목표에 미친 듯 몰두해 장애를 이겨내고 성과를 올려본 경험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올해도 새로운 채용 전형을 선보일 방침이다. SK그룹 인재육성위원회 진동철 PL(프로젝트 리더)은 “스펙 대신 진짜 능력을 보기 위해 열린 채용으로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는 기업의 고민이 깔려 있다. 서류전형이나 적성검사는 1차 필터링을 하는 현실적 수단이지만, 스펙 외의 장점을 가진 다양한 인재를 놓치는 단점이 있다. HR(휴먼 리소스) 전문가인 조미진 하이드릭앤스트러글스코리아 부사장은 최근 대기업이 벌이는 ‘이색 채용’에 대해 “개개인의 역량을 개별적으로 측정해 다양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해석한다. 그는 “삼성그룹에서 교수 추천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생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교수들에게 인재 감별을 맡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직무별 채용’도 눈에 띄는 변화다. 지난해 하반기 채용 때부터 SKCT(SK종합역량검사)를 선보인 SK그룹은 다른 대기업의 인·적성검사와 달리 직군별 역량을 측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직군별로 검사 유형을 달리한 것이다. LG생활건강도 비슷하다. 이 회사는 ‘마케팅 세미나’ ‘세일즈 아카데미’ 등 직무별로 채용 행사를 따로 진행한다.

LG생활건강에서 ‘오휘’ 브랜드 마케팅을 맡고 있는 박종현 ABM(어시스턴트 브랜드 매니저)은 서류전형과 인·적성검사는 물론 실무진·임원 면접을 보고 인턴십 전형을 거쳐 최종 관문인 마케팅 세미나에 합격한 경우다. 중국 상하이에서 3박 4일 간 진행된 ‘마케팅 세미나’는 실제 중국 시장을 체험한 후 마케팅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박 ABM은 “마케팅 직무는 유관 부서와 협동하며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이라며 “대학 때 친구들과 음반을 내고 책을 펴낸 과정에서 쌓은 기획력과 추진력이 업무 현장에서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직무별 채용 전형은 기업이 원하는 실무형 인재를 뽑는 장점이 있다. 본인이 원하는 업무와 다른 일이 주어진 신입사원이 불만을 품고 조기 퇴사 하는 것도 최소화할 수 있다. 김흥식 LG생활건강 상무(CHO)는 “직무별로 따로 뽑다 보니 사원 한 명당 약 800만원 정도의 고비용이 들지만 그만큼 실력 있는 인재들”이라고 말했다.

해외 사업을 키워나가는 대기업들은 글로벌 역량을 갖춘 인재를 따로 뽑기도 한다. CJ그룹은 2012년 하반기부터 전체 신입사원의 10%는 해외에서 업무 수행이 가능한 인력으로 채운다. CJ의 이성열 인재채용담당 부장은 “단순히 어학성적만 보는 건 아니다. 문화를 수출하는 업무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있는지, 낯선 환경에서 사업가 마인드로 끈질기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 검증하려 한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도 다양한 채용 실험이 진행 중이다. 국민은행 입사지원서에는 전공·학점·자격증·어학점수를 쓰는 항목이 없다. 대신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 분야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통찰력·상상력·창의력을 향상시킨 경험에 대해 서술하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또 지원자가 읽은 인문 분야 도서 10권의 책 목록을 입사지원서에 쓰도록 한다. 이른바 ‘통섭형 인재 채용 제도’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고객과의 소통과 공감”이라며 “자격증과 토익 점수가 지원자의 역량을 평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채용제도를 바꿨다”고 말했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하반기 신입직원 채용 프로그램 중 하나로 ‘당신을 보여주세요!’라는, 일명 자기 PR 대회를 신설했다. 4분간 자신의 강점과 잠재력을 자유롭게 홍보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선발된 100명은 서류전형를 면제한다. 임동영 기업은행 팀장은 “좋은 학교나 학점, 자격증을 따지지 않고 개인의 자질이나 역량 등만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 PR 대회’ 통과하면 서류전형 면제

수출입은행은 은행권에서는 유일하게 지난해 하반기부터 ‘무(無)스펙 전형’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한다. 이전까지 1차 서류전형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지난해부터는 은행 업무와 관련된 주제로 에세이를 받는 방식으로 바꿨다. 에세이가 통과 되면 시험과 면접을 거쳐 합격을 가르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나중에 받는다.

박성윤 수출입은행 팀장은 “좋은 학교나 학점, 자격증만 따지는 건 불합리하다”며 “합격자들의 업무 성과를 분석해 앞으로 계속 시행할 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헤드헌팅 회사인 커리어 맨투피아 김홍식 사장은 “금융권은 전문 직종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열정이나 잠재 능력만으로 뽑기엔 부담이 있지만 은행을 중심으로 열린 채용 제도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1223호 (201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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