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과도한 적용 서서히 완화될 듯 

다시 관심 끄는 배임죄 

법원에서 ‘경영판단의 원칙’ 인정 흐름 … 구성요건 범위 너무 넓고 애매해



대한보증보험의 전 대표 A씨는 한세산업 등 8개 업체에 약 140억원을 지급보증 했다가 업무상 배임 혐의로 2000년 7월 기소됐다. 지급보증을 한 업체들이 부도를 맞아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게 이유였다. 1심과 2심은 유죄를 인정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우선 대한보증보험은 담보력이 부족한 기업이나 개인의 신용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인 만큼 전액 회수를 전제로 대출 영업을 하는 시중은행과 다르다고 봤다.


보험사고의 위험을 감안해 영업하는 회사니 보증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죄를 물을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대법원은 또 ‘개인적인 이익을 취할 의도 없이 기업의 이익에 합치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린 결정 때문에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까지 형사책임을 묻는다면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배임죄로 기소된 사건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첫 판례였다.

한국·독일·일본만 형법에 배임죄 명문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 형법 355조 2항은 배임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얼핏 봐도 기준이 애매하다.

형법에 배임죄를 명문화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과 독일, 일본의 세 나라뿐이다. 독일은 배임죄의 주체를 ‘법률 또는 관청의 위임, 법률행위 혹은 신임관계’로 한정한 반면 우리나라는 ‘타인의 사무처리자’로 규정해 범위가 상대적으로 넓다.

일본 역시 명백히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을 때만 배임죄가 성립하기 때문에 손해 발생의 위험만 있어도 배임죄 요건에 해당하는 우리나라보다 좀 더 구체적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배임죄 구성요건이 가장 개방적”이라며 “더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배임죄의 핵심은 고의성인데 이것을 따지는 것부터 애매하다. 경영자를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하려면 자신의 행위가 배임 행위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경영자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당연히 경영자는 고의성이 없었다고 할 것이고, 검찰은 주변 상황을 통해 어떻게든 고의성을 입증하려 한다.

손해의 발생 여부를 가리는 것도 소송마다 논란거리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부실 계열사 부당지원 등으로 회사와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법리 오해 또는 심리 미진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미 지급보증된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추가로 돈을 빌리는 데 계열사가 다시 지급보증을 한 것을 두고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본 원심 판단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배임액 산정의 기초가 되는 부동산 감정평가가 관계법령에서 요구하는 요인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대한보증보험 판례에서 받아들였던 경영판단의 원칙은 인정하지 않았다. 위장 계열사를 부정 지원한 것은 법규를 위반해 악용될 여지가 큰 점, 합리적인 지원 기준이 없었던 점, 이사회 의결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점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부도를 방지하는 것이 회사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추상적 기대 아래 관계사에 자금을 지원해 손해를 입힌 것은 경영판단의 재량 범위 내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했었다. 경영판단의 범위가 아니라는 건지, 범위에는 포함되나 절차가 잘못됐다는 것인지 법원의 해석이 제각각이란 얘기다.

구성요건은 추상적이고, 법리를 따지는 건 복잡하니 배임죄 관련 소송 결과는 늘 오락가락한다. 검찰은 입증에, 법원은 판단에 애를 먹는다. 기업 전문 변호사들도 판례 정리가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이는 배임죄의 무죄 선고율이 일반 형사사건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010년 기준으로 일반 형사사건의 무죄 선고율은 2.4%에 불과하지만 형법상 배임죄는 4.9%,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범죄(횡령, 배임 등)는 12.7%에 달한다. 검찰이 기업을 수사하다 별다른 기소 거리가 없으면 활용하는 게 ‘배임죄’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형량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배임죄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업무상 배임은 10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액수가 커지면 특가법의 적용을 받는다. 과거에는 법원이 배임죄를 저지른 기업인에게 대부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정찰제 판결’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2009년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 기준을 만들었고 이후 실형 선고와 법정 구속이 잇따랐다.

이 기준에 따르면 배임액이 300억원을 넘을 경우 5~8년의 기본 형량을 받는다. 이 배임액은 실제 손해액이 아닌 손해 발생의 위험액까지 포함한다. 약 100억원의 지급보증을 했다가 10억원의 손해가 발생해도 100억원 전체를 배임액으로 본다는 뜻이다. 하루에도 수 백억원이 들고 나는 대기업에서 300억원은 상대적으로 큰 돈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사정이 이러니 경영자나 기업은 항상 불안하다. 다소 위험한 경영상의 결정이나 투자를 해야 할 때, 혹시라도 나중에 ‘업무상 배임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기업의 정상적 경영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완적 수단으로 ‘경영판단의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영자 또는 이사회가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신중하게 경영상 판단을 내린 경우 비록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형사처벌은 면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기업인이 배임죄로 기소돼 법정에 서게 되면 무죄 판결을 받아도 기업이 받는 타격이 엄청나다”며 “계열사 지원이나 담보제공, 대출 행위 등 다양한 경영활동에 대해 손해발생의 위험만 있어도 처벌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경영판단의 원칙’ 반영한 상법 개정안 발의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떠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회사에 이익이 된다고 선의로 믿고 경영상의 결정을 내렸을 경우에는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의무의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과 ‘특별배임죄의 판단에 있어 경영상 결정에 따른 사안일 경우에는 정상참작을 한다’는 내용의 단서를 달자는 것이다.

최준선 교수 역시 “형법상 배임죄가 사기죄를 대체하는 기능을 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완전 폐지가 어렵기 때문에 대신 상법에 특칙을 정하자는 것”이라며 “선의의 경영판단일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면제해주듯 형법상 배임죄도 면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법원은 배임죄 관련 소송에서 ‘경영판단의 원칙’을 일부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고 있다. 계속된 논란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재계는 판례가 쌓일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법 조항을 삽입해 경영 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해 달라는 의미다. 하지만 자칫 모든 경영활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입법적으로 어떻게 담아낼 지는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취지다.

/images/sph164x220.jpg
1225호 (2014.02.24)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