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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연 기자의 '스칸디나비안 파워' ① 테트라팩(Tetra Park)] 경제 위기에도 끄떡없는 근육질 기업 

세계 최대의 진공팩 생산 업체 … 밀봉·무균 기술로 170개국 장악 

‘헤이(Hej)’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에서 모두 통하는 인사말이다. 철자는 차이가 있지만 뜻은 하나다. 북유럽 4개국은 비슷한 언어만큼이나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재빨리 침체를 벗어난 점도 닮았다. 위기 극복의 저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서 나왔다. 각국 인구가 10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은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이 세계시장에 눈을 돌렸다. 덕분에 세계 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북유럽 출신 ‘히든챔피언’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세계 시장을 휘젓는 북유럽의 숨은 강자들을 소개한다.

▎테트라팩이 생산하는 포장용기 종류. 맨 왼쪽 용기가 테트라팩이 1952년 최초로 출시한 제품이다.
동화 『플랜더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는 늙은 개 파트라슈와 함께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한다. 어린 네로에게 병 우유가 가득 실린 무거운 수레를 끄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병이 깨지거나 우유가 상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 동화는 1872년 영국 작가가 쓴 이야기이지만 시간이 제법 흐른 1940년대 유럽 사람들도 매일 아침 유리병에 든 우유를 마셨다. 이맘때 스웨덴에서 우유를 구입하려면 전용 소매점에 가야만 했다. 유리병이 깨지기 쉬운 탓에 유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원자재가 부족해지면서 유리병 생산비도 치솟았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스웨덴 출신의 루벤 라우싱 박사는 빠르게 발전하는 미국과 그에 따른 도시화 과정을 눈여겨봤다. 식료품 유통산업이 커질 것으로 내다본 라우싱은 본국으로 돌아와 포장 용기 사업에 뛰어든다. 미국에서 밀랍으로 코팅된 종이 용기에 우유를 담아 판매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러나 밀랍 코팅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라우싱은 저렴하고 위생적인 일회용 종이 용기 고안에 나선다. 자본이 부족했던 그는 스웨덴 재벌그룹인 발렌베리 가문의 에릭 발렌베리와 손을 잡고 1944년 ‘오켈룬드 라우싱’을 세웠다. 대기업의 자본과 라우싱의 기술이 만나 유럽 최대의 포장제조 업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공생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우싱이 만든 시제품은 실패를 거듭했고, 발렌베리가는 회사를 팔기로 결정했다. 결국 라우싱은 독자적인 기술을 앞세워 1951년 ‘테트라팩(Tetra Pak)’을 설립한다.

10여년의 연구 끝에 나온 첫 제품이 바로 사면체 팩인 ‘테트라 클래식’이다. 라우싱이 발명한 기계안에 종이를 넣으면 삼각뿔 형태로 모양이 접히는 동시에 우유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우유를 멸균 처리하는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로써 우유를 종이 팩에 밀봉하는 동시에 장시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기술이 완성된 것이다. 이 생산설비는 회사 설립 1년 만인 1952년 스웨덴 룬드 지역의 한 우유 가공 업체에 설치됐다. 이후 이곳에서는 1959년까지 연간 10억개의 팩을 생산했다. 종이 우유팩은 1950년대 후반 스웨덴의 ‘히트상품’이었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었다. 라우싱은 플라스틱 코팅 종이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는 액상 제품의 흡수를 막으면서도 인쇄가 가능한 종이를 개발하기 위해 미국 화학회사 듀폰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개발된 코팅시트를 자동화생산 시스템을 통해 고정쇠로 밀봉했다. 우유에 거품이 이는 현상도 막아줘 유통기한은 더 길어졌다.

세계 무균팩 시장의 80% 장악핵심 기술은 무균 기술이다. 초고온 처리 방식(UHT)으로 수초내 높은 열을 가한 후 급속히 냉각시킨다. 이렇게 형성된 멸균공간에서 무균 용기로 포장한다. 제품 내용물을 채우는 동안에는 활성화된 미생물이 용기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러한 상태를 ‘상업적 무균 상태’라고 한다. 제품을 상온에서 보관해도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해한 균을 처리하는 것이다. 테트라팩은 6겹으로 이뤄진 특수 용기에 알루미늄 호일층을 넣어 내용물에 산소와 빛이 통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이 기술로 테트라팩은 현재 전 세계 무균팩 시장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다.

테트라팩이 포장 용기 판매로 지난해 벌어들인 수익은 111억유로(약 14조8000억원)에 달한다. 2008년 이후 경기 불황의 여파에도 흔들림 없이 연 평균 5%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있다. 비결은 끊임없는 혁신이다. 테트라팩은 종이 포장재라는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변화를 거듭하며 제품을 발전시켜나갔다. 연간 매출의 4%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하며 끊임없이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이같이 높은 &D 투자 비율은 북유럽 기업들이 위기에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웨덴 혁신청(VNNOVA)에 따르면 스웨덴은 국내총생산(GDP)의 3.7%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스웨덴 혁신청은 기업의 연구개발과 연계한 혁신을 촉진해 경제 성장을 돕는 정부기관이다.

경쟁력 있는 기업과 산업 부문에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필요한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게 이곳의 주요 업무다.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스웨덴 기업은 경쟁력을 높일 수있고, 이를 동력으로 국가 경제도 발전하는 것이다. 노르웨이정부 역시 기업의 R&D 투자와 비례해 큰 폭의 세금 감면 혜택을 줘 R&D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도 오직 패키지 제조 한 길만 걸어온 뚝심도 테트라팩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만들었다. 테트라팩의 사업 영역은 크게 포장재(패키징), 전처리(프로세싱), 기술 지원 및 서비스로 나뉜다. 창업 초기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종이 패키지를 전 세계 각종 식음료 제조회사에 공급하는 것이 핵심 사업이다. 전처리 사업 부문에서는 포장재 생산 공장 설계와 가공 처리 등 식음료 제품 제조의 과정을 다루는 통합 시스템을 제공한다. 고객사에 필요한 장비와 공정, 인력 지원은 서비스 사업 부문에서 담당한다. 이처럼 다른 사업군에 욕심 부리지 않고, 가장 잘하는 것만 파고든 집중력이 테트라팩의 또 다른 성공 요인이다.

위기에 강한 북유럽 기업의 DNA는 끊임없는 R&D

테트라팩 제품은 상온 보관이 가능한 무균팩과 냉장 보관이 필요한 냉장용팩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1969년 출시된 직육면체형 패키지(브릭 아셉틱)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많이 판매된 제품이다. 벽돌 모양 제품으로 벽돌을 쌓듯 적재가 가능해 한번에 많은 양을 운반할 수 있다. 프리즘에서 모티브를 얻은 팔각형 패키지(프리즈마 아셉틱)는 모서리를 없애 그립감을 높였다. 국내에서 인기가 많은 제품은 용기 상단에 뚜껑이 달린 형태(테트라 탑)이다.

전 세계 170여개국에 제품을 유통하는 테트라팩에게 한국은 중요한 시장이다. 1983년 한국법인 테트라팩 코리아를 세운 지도 벌써 30여년이 흘렀다. 테트라팩 코리아 크리스 케니얼리 사장은 “한국 소비자는 까다롭고, 유행에 민감해 글로벌트렌드를 분석하기에 적합한 시장”이라며 “최근에는 식품안전이 화두로 떠오르며 패키징 기술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창업자 루벤 라우싱 박사(왼쪽)가 1946년 우유팩 생산 기계를 발명한 후 작동해보고 있다.
테트라팩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중국 시장 공략에도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테트라팩 코리아 측의 설명이다. 한류 열풍으로 중국내 한국 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국식음료 제품이 인기를 얻을수록 테트라팩도 바빠지는 셈이다.

테트라팩 제품을 사용하는 국내 업체는 매일유업·롯데칠성·남양유업·한국야쿠르트·빙그레 등 다양하다. 그럼에도 국내 소비자들에게 이 회사의 이름이 낯선 이유는 B2B(기업 간거래)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양한 브랜드를 달고 나가는 화이트 라벨 제품의 특성상 소비자가 매일 제품을 접하면서도 회사명을 인지하긴 어렵다.

최근 테트라팩은 중국·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만 연간 1억5000만 달러(약 1527억7500만원)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와달리 기존 최대 시장인 서유럽에서는 성장세가 주춤하다. 본국인 스웨덴 룬드 공장은 지난 8월 공장 철수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룬드 공장은 테트라팩이 스웨덴의 높은 법인세를 피해 1981년 스위스 로잔으로 본사를 옮긴 후에도 줄곧 생산의 근간이 된 곳이다. 공장 측은 현지 언론을 통해 “대다수 고객이 스웨덴이 아닌 서유럽 등 국외에 집중돼 있어 더 나은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공장 이전을 결정했다”며 “룬드 공장 임직원 250여명의 거취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라고 밝혔다. 현지 언론은 테트라팩 공장이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이전할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바라보는 스웨덴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이미 오래 전 본사를 국외로 이전한데다 3대에 걸쳐 가업을 승계하고 있는 라우싱 일가 역시 대부분 영국에 적을 두고 있어서다. 그나마 본국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룬드 공장마저 문을 닫게 되면 스웨덴에서 테트라팩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게 된다.

위기의 돌파구는 다시 ‘클래식’이 될듯하다. ‘소중한 것을 지킵니다(Protect’s what’s good)’. 창업자 라우싱이 60여년 전 내세운 기업 철학이다. 이는 소비자의 식품 안전과 영양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모든 고객에게 안전한 식품과 환경을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케니얼리 테트라팩 코리아 사장은 “일시적인 유행이나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 있는 경영을 펼친다는 뜻 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기업 철학 덕분에 테트라팩은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미미하던 1970년대부터 재활용과 기후 변화 등 환경문제 해결에 앞장서 왔다.

한국 발판으로 중국도 공략

현재 아시아를 비롯한 신흥국에서 테트라팩 제품이 급성장한 이유 중 하나도 기업이 추구해온 안전성과 친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테트라팩은 2020년까지 재활용 비율을 2배로 높이고, 재활용 종이팩을 3배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테트라팩 코리아 역시 2015년까지 서울을 세계 최고 수준의 자원 재활용 도시로 조성한다는 목표 아래 폐자원 원천분리, 재활용 활성화 등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객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신제품 출시도 줄을 잇는다. 바쁜 직장인들이 들고 다니며 마시기 편하게 고안된 패키지나 증가하는 노인 인구를 반영해 뚜껑이 쉽게열리도록 만든 패키지가 그예다. ‘변치 않는 제품’을추구하는 테트라팩의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테트라팩 포장용기를 사용한 국내 출시 제품들. 남양유업·롯데칠성· 매일유업·빙그레 등 국내 식음료 업체가 테트라팩 기술을 활용한다.


1253호 (201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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