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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명예 모두 잃은 막장 드라마 

임영록 직무정지-이건호 자진 사퇴 임영록은 ‘소송 불사’ 버티기 

김유경 이코노미스트 기자 neo3@joongang.co.kr

금융당국은 KB금융 사태의 책임을 물어 임영록 회장에게 직무정지란 중징계 를 내렸다. 왼쪽부터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감원장, 임영록 KB지주회장.



애초에 가는 길이 달랐던 걸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성장한 임영록 KB금융 지주 회장. 현량자고(懸梁刺股,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 고학으로 명문대에 진학해 고시에 합격해 ‘관직의 꽃’이라는 기획재정부 차관까지 올랐다. 이와 달리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이건호 국민은행장.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를 마친 뒤 국내로 돌아와 리스크 관리 전문가로서 국책 연구기관의 교수를 지낸 엘리트 뱅커다. 임 회장은 말수가 적고 주변 환경 변화에 민감했다. 이 행장은 화려함을 즐기고 항상 자신만만했다. 너무나도 달랐던 두 사람, 이들의 불편한 동거가 1년여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금융당국이 지난 4 개월 간 진흙탕 싸움을 벌인 KB금융 경영진 모두에게 중징계를 내리며 종지부를 찍은 것. 석연치 않은 징계 번복과 관치금융 논란을 남긴 금융당국, 실리와 명예를 모두 잃은 임 회장과 이 행장. ‘막장 드라마’ 같았던 최종회는 두 주인공의 자진 사퇴와 직무정지로 일단락 됐다. 그러나 임 회장은 중징계에 불복해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버티고 있어 사태는 자칫 장기화 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사태가 이처럼 번질 줄 누가 예상했을까. KB국민은행 이사회는 지난 4월 24일 은행 주전산기를 IBM이 독점 운영하는 ‘메인프레임’에서 여러 전산 업체가 참여할 수 있는 유닉스로 변경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문제는 선정 업체를 둘러싸고 경영진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 이사회가 유닉스를 선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정 감사는 입찰 과정에서 리스크의 의도적 배제, 시스템 전환 과정상의 불공정 등을 거론 하면서 이사회 추산 비용이 예상치를 1000억원가량 넘자 리베이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갈등 촉발한 주전산기 교체 논란

이 행장과 정 감사의 반대 의견이 거세지자 KB금융지주는 김재열 최고정보관리책임자(CIO·전무) 명의로 해명자료를 내고 “(정감사 측이) 감사권을 남용해 이사회를 무력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사회는 유닉스를 선정한 이유로 IBM보다 원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점을 꼽았다. 실제로 기업용 대형 서버의 경우가격 경쟁력 면에서 유리한 유닉스의 비중이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커졌다. 국내 주요 은행 대다수가 유닉스를 쓰고 있으며,IBM을 사용하는 곳은 국민은행과 우리은행뿐이다. 국민은행 이사회는 결국 감사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론 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정 감사는 경영상 중요사항이라며 금융감독원에보고했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임 회장과 이 행장 간 세력다툼이 시작됐다는 해석이 분분했다. 실제로 이 상황에서 임 회장과 이 행장은 반목을 거듭했고, 언론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상대에 대한 흠집 내기에 나섰다.

금감원은 곧바로 검사에 돌입해 내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중징계 하겠다는 입장을 사전 통보했다. 경영상 판단이나 갈등만으로 중징계를 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민주택채권 횡령, 도쿄지점 불법 대출 등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물었다. 그러나 결정권자인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는 중징계 사안이 아니라며 경징계로 수위 조절에 나섰다. 경영판단으로 회사에 별다른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고, 이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유착 등 비위 행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재심의 위원회가 두 사람에게 사실상 화해의 장을 깔아준 셈이다.




이 과정에서 임 회장과 이 행장 사이에 잠시 화해무드가 조성되기도 했다. 템플스테이에 함께 가고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금감원 조사가 계속되자 압박감을 느낀 두 사람은 날 선 비방전에 나섰다.

이 행장은 급기야 주전산기 문제와 관련해 중징계를 받은 임직원 3명을 검찰에 고발하며 문제를 키웠다. 이를 지켜보던 최수현 금감원장은 제재심의위원회의 경징계 결정을 갑자기 중징계로 틀었다. 최 원장은 KB금융 최고경영자들의 신뢰성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상급 기관인 금융위원회도 두 사람 모두에게 사퇴를 종용했다. 이 행장은 순순히 자진 사퇴를 받아들였지만 임 회장은 적극 소명에 나섰다. 하지만 임회장도 결국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KB금융에서 벌어진 회장-행장 간 갈등을 두고,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관치·정치 금융의 적폐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관치금융 문화 속에서 주인 없는 금융회사 CEO 자리는 사실상 ‘관료 및 정치권’의 몫이었다. 관료 중 누구의 후원세력이 더 강한고, 누가 정치권·당국과의 끈이 더 공고한 지가 CEO 인선의 기준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번 KB금융 경영진 간 다툼의 본질 역시 ‘IBM이냐, 유닉스냐’가 아니라, ‘임 회장과 이 행장, 누구 힘이 더 강한가’였다.

불씨는 진즉 있었다. 지난해 7월 함께 취임한 두 사람은 첫 인사 때부터 맞섰다. 두 사람이 취임 후 첫 인사를 앞두고 임 회장이 국민은행 인사에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것이 이 행장 측 주장이다. 이 행장은 임 회장이 강압적으로 본부장 선임까지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임 회장은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인사 문제를 두고 두 사람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이 내부 전언이다.

선전포고는 이 행장이 했다. 이 행장은 주전산기 문제를 두고 임 회장의 독주에 반발, 정 감사를 대리인으로 싸움을 걸었다. 진흙탕 싸움을 각오하면 힘이 약한 쪽이 먼저 싸움을 거는법이다. 행정관료 출신으로 한때 금융위원장 후보로도 거론되던 임 회장은 2011년에 KB지주 사장으로 왔을 때부터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어윤대 전 회장과 이사회의 극심한 갈등을 두고 임 회장 배경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 전 회장이 퇴임을 앞두고 재임추진위원회를 꾸렸는데, 임 회장이 이사회 등을 장악해 이를 무력화했다는 소리도 나왔다. 이 행장도 청와대 등과 끈이 깊다는 이야기는 파다했지만, 파워게임에서 밀리며 조직 내부를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또 드러난 관치금융의 적폐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독당국도 오락가락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회사 실적과 무관하게 다퉜다는 이유만으로 중징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징계 과정에서 KB금융이 금융당국의 감정을 건드린 측면이 크며 감독당국이 제도적 해석보다는 감정적 해석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관피아 출신 회장과 정치권의 힘을 동원한 행장이 내려와, 15개월 동안 서로 다툼을 벌이다 낙마한 꼴이 됐다. 피해는 고스란히 KB금융이 떠안게 됐다. 황영기 전 회장·강정원 전 행장 낙마 때와 마찬가지로 당분간 조타수 없이 항해해야 하는 상황이다. 관치가 KB금융에 분탕질만 친 셈이다. 한편 임 행장은 금융당국으로부터 직무정지 결정을 받았음에도 본인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현직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직무정지는 징계 수위 중 두번째로 높은 단계로 앞으로 3년 간 금융권 임원이나 준법감시인이 될수 없다. 사실상 금융인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다. 이에 임 회장은 소송도 고려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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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3호 (201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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