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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 커지는 세계 경제 - 1987년 ‘블랙 먼데이’ 데자뷰? 

돈 푸는 정책만으론 한계 각국의 공조체제에 균열 조짐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드라기 총재는 “유연한 재정정책이 지원된다면 ECB 통화부양책의 효과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미국 등에 정책 공조를 제안했다.
1997년 봄 개봉한 영화 <첨밀밀(甛蜜蜜)>은 청운의 꿈을 안고 홍콩으로 넘어 온 중국 대륙 출신 두 남녀의 질긴 사랑 이야기다. 영화 속 1986년의 어느 날 여자 주인공 이요가 현금지급기 앞에서 잔고를 확인한다. “1만 2639.91 홍콩달러.” 이 요는 활짝 웃으며 남자 주인공 소군에게 쏘아 붙인다. “뭘 봐? 부자 처음 보니?” 다음해인 1987년의 또 어느 날, 이요의 잔고는 3만 2639.91 홍콩달러로 불어나 있다. “대박 터졌다. 마르크 가 올랐대!”

당시 홍콩의 시장통 아줌마들도 주식이나 외환투자에 밝았다. 순진한 중국 본토 청년 소군 역시도 “지금 주가가 3600인데 연말까지 4000으로 오를 거니까 미리 사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1987년 10월, 이요가 다시 현금지급기 앞에 섰다. 표정이 어둡다. 곁에 선 소군은 “경기가 너무나 빠져서 식당 손님도 뜸해졌다”고 말한다. 이요의 통장 잔액은 89.91 홍콩달러. 3만이 넘던 그 많은 돈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영화는 당시 홍콩에서 시작돼 유럽을 거쳐 뉴욕으로 번진 ‘블랙 먼데이’의 일화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몇 달 전 이요에게 대박을 안겨줬던 서독 마르크화의 상승은 돌이켜 보면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이요가 주식과 마르크화 투자에 한창이던 1987년 2월, 미국·영국·서독·일본·프랑스 등 G5 재무 장관들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모였다. 2년 전의 ‘플라자합의’ 이후로 미국 달러화 가 너무 떨어졌고, 그 탓에 일본과 유럽의 수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각국의 경제정책을 조정해 환율 흐름을 바꾸기로 했다. 미국은 긴축에 나서 달러화를 끌어 올리고, 일본과 유럽은 확장정책을 펼쳐서 통화가치를 낮추기로 했다. 이른바 ‘루브르합의’가 이뤄졌다.



1987년 마르크화 대박의 불길한 징조

하지만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이 확장정책을 이 행했으나 서독은 미온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1900년대 초 경험했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정책 유전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화는 계속해서 올라 홍콩의 이요에게 ‘대박’을 안겨줬다. 마르크화의 강세는 루브르합의가 먹히지 않고 있음을 상징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당초 계획보다 더 강하게 긴축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렇게 해야만 목표 한 대로 달러가 다시 강해지고 마르크화는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국들의 공조가 균열을 일으키고 정책 불확실성이 고조되자 주식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섰다. 이것이 1987년 10월 19일 ‘블랙 먼데이’를 설명하는 주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4년 10월 2일. 기자회견을 하는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말 속에는 울화(鬱火) 가 가득했다. 금리를 마이너스로까지 인하하고, 앞으로 1조 유로의 돈을 더 풀기로 했지만 경제가 계속 더 위축되고 디플레이션 압력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기자는 “ECB가 지금껏 내놓은 대책들이란 게 주로 신용의 공급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인데, 이탈리아처럼 경제 성장도 수요 증가 전망도 없는 곳에서 과연 대출을 받겠다는 기업들이 있겠느냐” 고 물었다. 드라기 총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ECB가 돈을 푼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할 리는 없겠죠. 그래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가 힘을 주어 강조한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통화 부양, 재정지출 확대, 구조개혁 등 ‘세 갈래의 회복정책’ 중에서도 당장 시급한 것은 수요 창출이었다. “ECB의 통화부양책은 오로지 다른 정책들이 함께 나올 때에만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누차 얘기했지만 수요 측면의 정책입니다. 재정에 여력이 있는 나라들은 그걸 사용해야 합니다. 재정 여력이 없는 나라들도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대신 세금을 인하하고 투자를 늘리는 성장 친화적인 방식으로 지출 구조를 조정해 수요를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재정지출을 확대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납세자들의 재산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다른 유럽 국가들은 개혁을 미룰 게 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로존에서는 ‘세 가지 화살’ 중 오로지 하나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유일한 화살인 화폐발행은 수요 대책과 조합되지 않은 것이어서 효과가 별로 없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 8월 말 미국에서 열린 잭슨홀 컨퍼런스 연설에서도 “유연한 재정정책이 지원된다면 ECB 통화부양책의 효과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점잖게 제안했다. 그러나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에게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확대 재정을 주장 한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오직 한 가지 화살, 화폐증발 정책에만 의존한 정책 구도는 일본의 이른바 아베노믹스에서도 분명히 목격되고 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재정을 늘릴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 부채는 연간 국내총생산의 2.5배에 달한다. 그래서 일본은 지출을 늘리기는커녕 세금을 인상하고 있다. 올 들어 일본 경제가 다시 휘청거리고 있는 이유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의 흐름을 조망하는 큰 구도 는 ‘신흥국 경제가 둔화되는 가운데 선진국들의 가시적인 회복에 힘입어 세계 경제 성장속도가 빨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 하 반기 들어서면서 이 구도는 쪼그라들었다. 선진국 내에서도 우열 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미국의 가시적인 회복 속에 나머 지 거의 모든 국가는 부진한 구도’로 새로운 모양새가 잡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예상치를 3.4%에서 3.3%로 내려 잡았다. 내년 전망치는 4%에서 3.8%로 하향했다. 불과 석 달 만에 눈높이를 더 낮춘 것은 유로존과 일본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선진국 내에서도 우열 극명하게 나타나

따라서 세계 경제가 다시 낙관적이기 위해서는 미국이 전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초고도 통화부양정책을 계속해 나가거나, 유로존과 일본, 중국의 중앙은행이 돈을 더욱더 획기적으로 풀어 제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 경제구도가 통화정책만으로는 별 효과가 없음을 깨달아가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정정책의 전환을 통한 실질적인 총수요 창출만이 긴요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최근 모습에서 확인하듯이 누구도 스스로 빚을 져서 세계 경제를 구원하려 나서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2014년 10월의 세계 경제는 1987년 10월과 닮아 있다. 금융위기 직후 세계 경제의 신속한 회복에 크게 기여했던 중국 의 최근 태도가 이를 상징한다. “어떤 한 가지 경기지표 때문에 중국이 극적으로 경제정책을 변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러 우지웨이 중국 재무 장관, 9월 G20 회의 당시 발언)

따라서 이런 지극히 국제 정치적인 문제는 지난 1980년대처럼 지극히 국제 정치적으로 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와 명분이 충분히 조성돼야만 국제 정치가 가동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세계 경제는 IMF가 지적했듯이 울퉁불퉁하고 취약한 회복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1257호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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