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혁신 실패한 ‘공룡 기업’의 만시지탄 - 끊임없이 현재를 버려야 미래를 얻는다 

노키아는 판세 못 읽고, 산요는 선택과 집중 실패 주력 사업 정리하는 과감함이 성패 좌우 


지난 4월 26일 핀란드 노키아 본사의 로고가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고 있다. ‘핀란드의 상징’이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 2013년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 사진:뉴시스
기획재정부는 2009년 5월 ‘불황기 위기 극복에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 사례와 시사점’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여러 민간 연구기관의 보고서를 참고해 정리한 보도자료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여러모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료에서 기재부는 노키아를 불황기를 뚫고 성공한 대표적 기업 중 하나로 꼽았다. 1990년대 초 경기 침체기에 제지·펄프 등 주력 사업을 매각 하고, 휴대전화 시장에 뛰어든 탁월한 안목을 칭찬했다.

맞는 얘기다. 영국 ‘테크노 폰’을 인수해 휴대전화 시장에 뛰어든 노키아는 ‘제품의 디지털화, 판매의 글로벌화’란 전략 아래 빠른 속도로 세계 시장을 점령했다. 시장 진출 10년도 안 된 2000년 점유율 40%대에 올라선 노키아는 2007년까지 독보적인 세계 1위를 유지했다. 물론 기재부의 자료는 1990년대 초 노키아의 혁신을 다룬 것이지만 몇 달 뒤 시작될 스마트폰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노키아의 끔찍한 추락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아마 그들을 성공 사례로 쓰진 못했을 터다.

원칙 없이 더 욕심 낸 노키아


*왼쪽은 연간 영업이익 / *짐 콜린스 : 세계적인 경영 구루(Guru).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의 저자.
‘핀란드의 상징’ 노키아는 결국 실패했다.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온 뒤 채 3년을 버티지 못했다. 한때 핀란드 전체 수출의 20%, 법인세의 23%를 담당했던 노키아는 ‘미국의 상징’인 마이크로소프트에 2013년 9월 회사를 넘겼다. 휴대전화 사업 부문만 넘겼는데 매각 대금은 불과 71억 7000만 달러(약 7조원)였다. 전성기였던 2007년 한 해 매출 500억 유로(당시 약 75조원)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헐값이었다. 한때 시가총액이 120조원에 달했던 글로벌 IT공룡은 그렇게 쪼개졌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저서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How the mighty fall)>에서 위대한 기업이 몰락하는 다섯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1단계,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2단계, 위험과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3단계, 구원을 찾아 헤매는 4단계,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5단계다. 노키아는 짐 콜린스가 내린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 회사다.

2007년 6월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선보였을 때 당시 노키아 CEO였던 칼라스부오는 “오직 노키아가 표준”이라고 말했다. 당시 전 세계 언론은 이를 비웃음으로 번역했으나 칼라스부오의 발언 요지는 ‘아직은 멀었다’에 가까웠다. 많은 전문가가 기업의 실패를 분석하며 주 원인으로 자만을 흔히 꼽지만 사실 ‘자만’은 굉장히 주관적인 용어다. 결과가 나쁘면 ‘자만’이요, 결과가 좋으면 ‘뚝심’이다. 엄밀히 말해 노키아가 자만했는지 아닌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판세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기대와 달리 1년 뒤 아이폰은 표준이 된다.

기업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를 판가름할 중요한 변곡점은 바로 2단계다. 노키아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 노키아는 오히려 피처폰 생산을 늘렸다. 이전까지 노키아의 주 고객은 휴대전화를 처음 사용하는 전 세계 저소득층이었다. 노키아가 20년 가까이 놀라운 수요 창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은 ‘별 기능 없지만 저렴한’ 노키아 휴대전화에 대한 이들의 높은 충성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키아의 기대와 달리 이들은 두 번째 휴대전화로 피처폰 대신 스마트폰을 택했다. 피처폰은 판매는 급감했고, 불과 1~2년 뒤 노키아는 엄청난 재고 부담을 떠안았다.

노키아도 스마트폰을 생산하긴 했다. 그리고 피처폰의 점유율을 그대로 물려받아 2009년까진 40% 전후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했다.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도 위기 의식이 약했다. 통화가 핵심인 피처폰과 달리 스마트폰은 다양한 기능에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이폰에 비해 노키아의 스마트폰은 너무 단순했다. 훗날 애플의 대항마로 성장할 안드로이드의 성장을 몰라보고 독자적인 운영체제(OS) 심비안을 고집한 것도 결정적 패착이었다. 불과 2년 뒤 노키아의 스마트폰 점유율은 반 토막 난다.

머뭇거리는 사이 스마트폰 사용자는 더 똑똑해졌다. 구원을 찾아 헤매던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MS)를 선택했다. 애플과 맞서던 삼성·LG 등이 이미 안드로이드 연합체를 만든 후였다. 적절한 짝이 없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MS는 분명 독보적인 존재였으나 스마트폰 시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드웨어 약자 노키아와 (스마트폰) 소프트웨어 약자 MS가 손을 잡은 셈이었다.

스마트폰에 밀린 ‘혁신의 상징’ 닌텐도

당시 빅 군도트라 구글 부사장은 “칠면조 2마리가 만난다고 독수리가 되지 않는다”고 비꼬았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제휴의 효과는 전혀 없었고, 이후 노키아는 엄청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사 사옥까지 매각하며 버텼지만 어느새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노키아가 없어도 무방한 곳이 돼 버렸다. 10월 2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가 생산하는 휴대전화에서 ‘노키아’ 브랜드를 없애기로 했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은 건 노키아만이 아니다. 30년 전 세계 최초로 상업용 휴대전화를 내놨던 모토로라는 색다른 디자인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으며 쑥쑥 성장했다. 모토로라가 1996년 출시한 ‘스타텍’은 전 세계적인 폴더폰 열풍의 시작점이었다. 2003년 내놓은 ‘레이저’는 무려 1억 4000만대가 팔렸고, 모토로라는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폰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모토로라는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3~4년 동안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다 2011년 구글에 매각됐다. 스마트폰 소프트웨어 시장을 양분할 만큼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던 구글도 한 번 망가진 기업을 되살리지 못했다. 구글은 125억 달러에 모토로라를 샀지만 2년 뒤 레노버에 29억 달러를 받고 팔았다. 모토로라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캐나다의 블랙베리는 더 안타까웠다. 사실 블랙베리는 애플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스마트폰 시장에 적응한 회사였다. 2008년 한때 미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 신드롬과 맞물려 ‘오바마폰’이란 마케팅 효과도 톡톡히 누렸다. 보안성이 뛰어난 스마트폰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게 발목을 잡았다. 초창기 노키아처럼 독자 운영체제를 운영했지만 애플과 안드로이드가 양분한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블랙베리는 그냥 불편한 기기에 불과했다. 판매량은 해마다 급감해 현재 시장점유율은 1%에도 못 미친다. 얼마전 존 첸 블랙베리 CEO는 “굳이 단말기 사업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매각 의사를 밝혔다.

애플은 시장을 선도했고, 삼성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애플을 추격했지만 노키아·모토로라·블랙베리는 선도도 추격도 못했다. 결국은 타이밍이다. 불과 5년 전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기업으로 손꼽히던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 역시 스마트폰의 폭발적 성장에 핵펀치를 맞았다. 닌텐도는 2006년 출시한 가정용 게임기 ‘위(Wii)’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소니·도요타 등 대부분의 기업이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에서 ‘히토리카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혼자서만 잘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닌텐도는 번 돈을 쌓아두기만 했다.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대에 비싼 게임기는 거추장스러운 기계였다.

2009년 약 20조 원에 달했던 닌텐도의 매출은 지난해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몇 년 더 갈 줄 알았는데 추락은 예상보다 빨랐다. 5년 연속 적자에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 기업의 수명은 환경 변화의 속도와 기업 자체의 변신 역량에 달려 있다. 과거와 달리 환경 변화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기업이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대기업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변신의 시작은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하는 것부터다. 산요는 선택과 집중에 실패한 대표적인 회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요는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가전 기업 중 하나였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사실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가전 회사로 성장하게 된 건 산요의 도움이 컸다. 삼성은 1960년대 말 산요로부터 TV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1975년 코닥이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코닥은 세계 최초로 이 카메라를 개발하고도 필름 카메라 사업에 연연하다 경영난에 처했고, 2012년 파산을 선언했다.
취사선택의 타이밍이 생사 갈라

잘 나가던 산요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1990년대 초중반. 일본의 장기 불황이 시작된 시기다. 소니·파나소닉 등에 비해 글로벌 경쟁력이 약했던 산요는 내수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디지털카메라와 LCD 등 차세대 사업으로 방향을 튼 건 좋은 판단이었지만 TV·오디오 등 기존 주력사업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규 투자를 늘린 건 재무 악화의 전조였다. 주력 사업의 수익성은 계속 악화됐고, 투자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연이어 대규모 출자를 단행하며 버티려 했지만 반도체 공장 지진까지 겹치며 속절없이 무너졌다. 2008년 파나소닉에 매각됐고, 도쿄 주식시장에서도 산요의 이름은 사라졌다.

코닥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필름은 코닥’이란 등식이 통했다. 탁월한 품질을 바탕으로 100년 넘게 장수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실수로 2012년 파산했다. 디지털 카메라를 가장 먼저 개발한 건 다름 아닌 코닥이었다. 하지만 코닥은 필름 카메라 사업을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필름 카메라를 개발하는데 수백억원을 쏟아 부었다. 캐논·니콘 등 경쟁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카메라가 새 패러다임될 것’이란 판단 아래 모든 역량을 디지털에 쏟아 부었다. 만약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주력으로 삼고, 필름 카메라 사업은 축소해 소량 생산, 고가 판매 전략으로 갔다면 카메라 업계의 지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지 모른다. 만시지탄이다.

1259호 (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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