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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의 파격 인사 - 놀라운 경영 쇄신 신호탄 

하이닉스 제외한 주력 계열사 CEO 교체 불황 속 재도약 과제 떠안아 

김현예 중앙일보 기자

네 마리의 ‘보마(寶馬)’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출발선에 나란히 섰지만, 앞이 보이질 않는다. 이 길을 이를 꽉 다물고 달리다 보면 결승선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하리라고만 예상할 수 있을 뿐 시계제로의 상황이다. 곁눈질로 나란히 선 이웃을 쳐다보긴 하지만, 그들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앞으로 길게 뻗은 길을 열심히 달려가는 수밖에는 답이 없다.

필시 이들의 마음은 천근만근일 것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축하한다’는 이야기도 마냥 기분 좋은 덕담으로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SK이노베이션·SK에너지의 정철길(60) 사장, SK텔레콤 장동현(51) 사장, SK네트웍스 문종훈(55) 사장, SK C&C 박정호(51) 사장 얘기다. 부담백배의 마음으로 도전에 나선 이들은 위기에 놓인 SK가 최근 새롭게 발탁한 그룹의 주력 4개 계열사의 대표이사들이다. 이들을 앞세워 ‘만사(萬事)’라는 ‘인사’로 본 SK의 과제와 미래를 그려봤다.

정철길 사장이 SK이노베이션을 맡게 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하마평이 쏟아졌다. SK 내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꼼꼼하다’였다. SK 지배구조의 상단에 있는 SK C&C의 사장이기 이전 그가 걸었던 길 때문이었다. 바로 ‘구조조정본부’다. 줄여 ‘구조본’으로 불리는 이 조직은 샐러리맨이라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위엄을 갖고 있다. 대체로 대량해고나 감사, 조정을 추진하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부터 구조본 출신은 아니었다. 경남고를 졸업하고 부산대에 진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포항 출신의 신헌철(69) 전 SK에너지 부회장의 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정 사장은 1979년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의 종합기획부로 입사해 정유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에게 인생을 바꿔놓을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유전 개발이었다. 1990년 고(故) 최종현 당시 SK 회장은 자원개발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미얀마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고, 과장이던 그는 2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미얀마로 향했다. 이국의 낯선 땅, 정글 한복판을 헤매며 동분서주했지만 미얀마는 그에게 고배를 안겨줬다. 기대했던 ‘상업성 있는’ 유전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어깨가 늘어져 귀국한 그를 최종현 회장은 문책하지 않았다. 외려 특진을 시켰다. 정 사장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회장님은 평소 일의 실패 자체를 탓하거나 책임소재를 묻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연구하도록 했다.” 미얀마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원들에게 김치와 된장을 직접 싸 들고 찾아와 격려를 마다치 않았던 최종현 회장을 그는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정유·금융·IT 두루 거친 정철길 사장

절치부심한 그는 원유 트레이딩 기획팀에서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바탕으로 그룹 구조본까지 올라갔다. SK C&C에서 금융사업과 정보기술(IT) 총괄을 거치면서 시야를 넓혔다. 대표이사 자리까지 오른 그에게 SK는 ‘이노베이션’이라는 거대한 회사를 맡기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은 주유소·정유사업을 하는 SK에너지와 윤활기유업을 하는 SK루브리컨츠, 석유화학 제품업을 하는 SK종합화학과 같은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중간지주회사다. 덩치가 크다 보니 ‘시야’를 갖춘 사람이 적임자인데, 그가 만장일치로 꼽혔다. 누구보다 석유업을 잘 알고 있는데다, 그룹과 계열사를 두루 거치며 안목을 넓힌 인물이기 때문이다.

국제유가의 폭락,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 일부 석유제품의 공급 과잉 상황, 엎친 데 덮친 중국의 급부상…. 이런 악조건 속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전략을 짜고, 사업구조를 재정비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 떨어진 숙제다. 영국의 석유회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마저 구조조정에 나설 정도로 업황이 악화된 시기에 출구를 마련해야 하는 셈이다. 정 사장은 인사와 동시에 사업 재편을 위해 포트폴리오 이노베이션(PI)실을 만들었다. 본격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겠다는 묵직한 신호다.

장동현 사장은 ‘SK 모범인재상’으로 꼽힌다. 39세에 상무를 달며 초고속 승진을 했고, 51세란 젊은 나이에 SK그룹의 기둥인 텔레콤을 맡은 저력 있는 실력파이기 때문이다. 1991년 유공으로 입사해 1997년 외환위기 시절 그룹의 구조본에 근무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는 2010년부터는 4년 간 SK텔레콤의 전략기획과 마케팅 부문장을 맡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는 시기에 ‘데이터 무제한 상품’이란 아이디어로 시장의 판을 넓혀놓았다. LTE로 통신시장이 한 단계 진화하자, 그는 이번에도 한발 앞서나갔다. ‘음성과 문자 망내 무제한’을 내걸며 시장을 이끌었다.

올 초엔 SK텔레콤 자회사인 SK플래닛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자리를 옮겨 플랫폼 사업에도 눈을 떴다. 11번가를 중심으로 시장 공략에 나서고, 통합 커머스 브랜드인 ‘시럽’을 내놓으면서 다양한 통로의 수익모델을 발굴했다. SK 관계자는 “다양한 플랫폼 사업을 기반으로 텔레콤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 발굴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플랫폼 총괄을 신설하고, SK플래닛과의 협업에 나서기로 했다. 조직도 젊은 인재들로 채워갈 전망이다. 그는 전무급에 해당하는 주요 사업의 부문장 절반을 교체했다.

SK네트웍스의 구원투수로 나선 문종훈 사장은 단일 회사 대표지만 가장 많은 사업을 거느리게 됐다. 다시 말해 그만큼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사업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SK네트웍스는 흡수합병한 워커힐을 비롯해 토미힐피거, DKNY와 같은 패션브랜드 사업도 한다. 렌터카 사업도 있어, 최근에 KT가 매물로 내놓은 KT렌탈 인수전에도 뛰어들기도 했다. 문 사장은 워커힐 호텔 사장을 지내고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통합 사무국장 겸 전략팀장을 맡아 그룹의 주요 살림을 챙겨온 경험이 있다. 문 사장은 브랜드 가치가 높고 이익이 되는 패션 브랜드는 독립시켜 운영하는 방안을 포함해 다각도로 사업안정화 전략을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룹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도 쇄신

정철길 사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SK C&C를 경영하게 된 박정호 사장은 기업 인수·합병(M&A) 분야의 전문가다. 최태원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최 회장과 함께 하이닉스 인수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네이트온’을 보유하고 있는 SK커뮤니케이션즈엔 박윤택(49) 전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선임됐다. 박 대표는 재무통 인사로 12분기 연속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회사에 탄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게 됐다. 지난 7월 글로벌 시장에서 1억 다운로드를 기록한 ‘싸이메라’를 기반으로 수익모델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안착의 1차 관문이 될 전망이다.

SK는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있는 SK하이닉스를 제외한 주요 계열사의 경영진을 전면 교체한 데 이어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도 쇄신했다. 최태원 회장의 장기부재에 따른 위기감을 수펙스협의회를 중심으로 상쇄해나가기 위해서다. 지난 6월 열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도 ‘쇄신’을 주문한 바 있는 김창근(64) 의장은 7개 위원회의 절반에 육박하는 3개 위원회를 교체했다. SK텔레콤을 경영했던 하성민(57) 사장에게 상근 윤리경영위원장을 맡기고, 유정준(52) 현 SK E&S 사장에게 글로벌 성장위원회를 맡겼다. 또 동반성장위원회는 이문석(60) 상임위원에게 일임했다.

1266호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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