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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 을이 빛나야 갑도 빛난다 

자렛 크로자스카의 ‘런치레이디’ 코믹 북 … 이해와 감사가 갑을관계 개선의 출발점 

박용삼 KAIST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자렛 크로자스카의 강연 모습.
‘갑을 공화국’. 작금의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갑(甲)과 을(乙)은 계약서에나 나오는 비(非) 일상 용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모든 관계망을 재단하고 해석하는 무소불위의 잣대가 되어 버렸다. 갑과 을 사이에는 사시사철 찬바람이 분다. 갑은 을을 저만치 내려다보지만 언제 덤빌지 몰라 경계하고, 을은 숨죽여 지내면서도 언제 한번 제대로 손 볼 기회를 벼른다.

이제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가해자-피해자, 여자-남자, 어른-아이 여부를 따지기보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부터 판명하려 든다. 이 좁은 땅에서 그저 오가며 어깨 부딪히고 눈 한번 흘기면 그만인 문제가 태반인데도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분노를 주체 못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와 ‘네가 누군데?’의 말싸움은 소모적이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만화 한 컷이 을의 삶을 바꾸다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만화 시리즈 ‘런치레이디’(http:// www.studiojjk.com/ graphicnovels.html).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 갑과 을은 사회가 굴러가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해야만)할 것이다. 따라서 갑을관계 없는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은 공허할 뿐이다. 관건은 갑을 보는 삐딱한 시선과 을을 대하는 차가운 눈빛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로 귀착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유명 만화 작가인 자렛 크로자스카(Jarrett Krosoczka)가 소개하는 미국 사회의 갑을관계 해빙 사례는 갑을의 프레임에서 좀처럼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힌트를 던진다.

2001년 어느 날,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만화작가의 삶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크로자스카는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초등학생 시절의 급식 아줌마가 여전히 식당에서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 아줌마가 자신의 이름을 (비록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던 삼촌 이름과 약간 혼동하기는 했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깐 동안이나마 아줌마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면서 크로자스카는 급식 아줌마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고, 나름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까지 크로자스카에게 급식 아줌마라는 존재는 그저 ‘식당에서 숟가락이랑 사는’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우연한 만남에서 영감을 얻어 크로자스카는 자신의 빅 히트작인 ‘런치레이디(Lunch lady, 급식 아줌마)’ 만화 시리즈를 만든다. 만화 속 급식 아줌마는 생선 튀김으로 만든 쌍절곤을 휘두르며 사악한 사이보그나 스쿨버스 괴물, 돌연변이 수학경시대회 참가자를 물리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머리에 쓰고 있던 헤어네트로 악당을 붙잡은 뒤 이렇게 선언한다. ‘정의의 맛이 어떠냐(Justice is served)!’

크로자스카는 런치레이디 출판 기념회에 자신의 급식 아줌마를 초대했고, 아줌마에게 런치 레이디 그림과 만화책을 선물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줌마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장례식에 참석한 크로자스카는 또 한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아줌마의 관 옆에 자신이 선물한 런치레이디 그림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줌마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그림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당신의 평생에 걸친 일과 삶이 그 그림 덕분에 비로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급식 아줌마에 대한 학생들과 사회의 시선에 잔잔한 변화가 일어났다. 크로자스카는 미국 학교영양협회(School Nutrition Association)와 함께 ‘급식 영웅의 날(School Lunch Hero Day)’을 만들어 미국 전역에 전파했다. 아이들이 식당 직원들을 위해 감사 행사를 여는 날이다. 기대했던 대로 아이들은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냈다. 색종이로 햄버거 카드나 종이 꽃을 만들어 아줌마들에게 선물했고, 자기 학교에 있는 실제 급식 아줌마 얼굴을 오려 붙인 만화를 그려 전시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각자 색종이에 사인을 해서 토핑을 올린 ‘생큐 피자’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평생 숨죽이며 을의 삶을 살았던 급식 아줌마들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자부심을 갖게 된 한 급식 아줌마는 말한다.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나는 마치 지구 끝자락에 있는 것 같았어요. 누구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급식 아줌마는 배식받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지켜본 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고 생각되면 즉시 생활 교사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켄터키의 급식 아줌마들은 여름 방학 동안에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을 위해 스쿨 버스를 개조한 이동식 급식차를 만들어 매일 500명의 아이들에게 밥을 먹였다고 한다(이쯤 되면 이 아줌마들이 진정한 갑 아니겠는가?).

우리는 때와 장소, 처한 입장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 갑이 되기도, 을이 되기도 한다. 김과장은 사장 앞에서는 을은커녕 저 밑에 병(丙), 정(丁) 혹은 계(癸)에 불과하지만, 외주업체를 방문할 때면 ‘울트라 수퍼 갑’이 된다. 승진이 빠른 최 과장은 회사에서는 갑이지만, 동창회만 나가면 돈 많은 녀석들 앞에서 기도 못 펴는 을이다. 모처럼 사무실 군기를 잡으려던 정 과장은 또박또박 말대꾸하며 다면평가 운운하는 신참 앞에서 갑자기 을로 추락한다. 상황이 이럴진대 누가 갑이니 을이니 따져 봐야 한도 끝도 없다.

오늘 당신 앞에 군림했던 몇몇 갑들에 대한 분노는 잠시 누르고, 혹시라도 지금 당신에게 분노하고 있을 (당신은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 분명한) 더 많은 을 들을 떠올려 보자. 아파트 경비 아저씨, 사무실 청소 아줌마, 인기척만 남겼던 신문배달 청년, 그리고 생수 아저씨.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은 밤새 경비를 서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배급소까지 가서 신문을 받아온 후, 생수를 날라야 했다.

언제든 갑이 되기도 을이 되기도

물론 명백히 개선돼야 하는 갑을관계도 있다. 갑의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 을을 물리적·경제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나 을의 위치를 역이용해 갑을 공갈협박하는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외 상당수의 갑을 갈등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이나 여론 재판에 기대기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감사, 혹은 최소한 배려와 아량으로 대응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해 보인다. 불필요한 스트레스도 피할 수 있고, 품위 있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따로 없다.

‘런치레이디’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에 꽃 핀 갑을 공진화(共進化)의 모범 사례다.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급식 아줌마들이 실상은 미국 어린이들을 키워온 숨은 영웅이었다는 작은 깨달음이 갑을 간 냉랭한 관계를 녹이고 큰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갑과 을의 엇갈린 틈을 메워줄 윤활유, 혹은 자꾸 엇나가려는 갑을의 톱니를 맞춰줄 접착제인 것이다. 크로자스크의 말처럼 “감사의 말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꾼다. 듣는 사람은 물론이고 하는 사람의 인생도.”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281호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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