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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 말은 칼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이버 불링의 최초 피해자 모니카 르윈스키 ‘온정적 인터넷’ 호소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오프라인’ 세상을 창조한 신(神)은 인간이 영 미덥지 못했다.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했고, 훔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거기에 더해 모든 분란(紛亂)의 원인이 입에 있다고 하면서 각자 ‘입 단속’할 것을 주문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혀는 우리 지체(肢體)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 부처님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입안에 도끼가 함께 생긴다. 그것을 잘 간수하지 않으면 도리어 제 몸을 찍는다”라고 하셨다(구가리경). 얼마 전 한국에 오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는 책까지 내셨다.

인간은 입 단속에 대한 신과 성현의 경고를 비교적 잘 지켜왔고, 그 덕분에 신이 만든 오프라인 세상은 나름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과 20여년 전에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상이 덜컥 만들어졌다. 그것도 순전히 인간의 힘에 의해서(1994년 6월 국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 KORNET 시작). 사람들은 온라인에서는 더 이상 입 단속 따위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껏 손을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세상에는 독버섯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익명성(匿名性)이라는 방패를 두른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온갖 비난·욕설·험담·허위사실 등을 거침없이 유포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이버 불링은 타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기업과 정부의 공신력에 타격을 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신뢰 상실로 이어져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도 넘은 사이버 불링의 폐해


더 큰 문제는 유명 연예인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공격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지털의 특성상 매우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점점 살을 붙여가며 퍼지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괴로움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다. 얼마 전 세월호라는 국가적 대참사 때도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섬뜩한 악플이 등장해 공분(公憤)을 산 적도 있다(악플은 악(惡)과 리플라이(reply)의 합성어). 최근에는 스마트폰 보급이 확대되면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온라인 그물망에 더욱 촘촘히 고통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아마도 사이버 불링의 최초 희생자는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일 것이다. 1998년, 50대 초반의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미국 정가를 태풍 속으로 몰고 갔던 20대 초반의 백악관 인턴 말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초강대국의 메가톤급 스캔들에 관음증적 촉각을 곤두세웠고, 영어 공부 한답시고 그 두꺼운 스타보고서(Starr Report)를 다운받느라 정신 없었다.

한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하다시피 지냈던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2015년 3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진실 혹은 대담(truth or dare)’이라는 주제로 열린 TED 컨퍼런스에 연사로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소위 백악관 스캔들, 혹은 지퍼게이트(Zippergate) 이후 자신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고, 지금까지 후회와 반성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고 담담히 얘기한다. 하지만 평생을 방종한 여자, 매춘부, 백치 그리고 ‘그 여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단지 22살의 철없는 나이에 미국 대통령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르윈스키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이버 마녀사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녀는 “망신 주기(shaming)가 하나의 산업이 됐으며, 클릭 수는 곧 돈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지난 20여년간 인간의 문화적 토양 위에 모욕의 씨가 뿌려졌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이용해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 33% 사이버 불링 경험


▎‘사이버 불링’ 강연 동영상
그녀는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던 자신을 살린 것은 가족·친구·동료, 때로는 낯선 사람들로부터의 온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온정적 인터넷(compassionate internet)’을 향한 문화혁명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남을 더 배려해야 하고, 미디어 종사자들도 막무가내식으로 기사를 올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녀는 인류가 과거 인종차별 시대를 종식시켰던 것처럼 이제 인터넷상의 ‘온정 결핍(compassion deficit)’과 ‘공감 위기(empathy crisis)’를 이겨 내자고 호소했다.

강연을 마치며 그녀는 대중 곁으로 돌아온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이제는 남들로부터 제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 부끄러웠던 과거를 말할 시간이기 때문이죠. 저처럼 사이버 폭력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요.” 르윈스키의 18분 강연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고, 르윈스키 스캔들 여파로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석패했던 앨 고어도 그중 하나였다(앨 고어는 TED 컨퍼런스의 단골 손님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우선 배가 아프다. 약간 화도 나고 자괴감과 허탈감도 든다. 당연하다. 인간은 원래 다 그렇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래도 좋고, 억지 축하를 건네며 의연한 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더 친해야지 하는 다짐은 건설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만일 악담을 적은 메모를 뒤에서 쓱 내민다든지, 인신공격으로 도배된 대자보를 사촌네 아파트에 붙인다든지, 급기야 시뻘건 색으로 사촌의 파렴치함을 성토하는 편지를 적어 전국민에게 뿌린다면 어떻겠는가? 형법에 규정된 정확한 죄명은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구속감이다.

이런 일이 온라인에서는 매 순간 벌어진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2013년 일반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이버 언어폭력이나 명예훼손, 스토킹, 신상정보 유출 등 사이버 불링을 경험한 성인은 33%, 초·중·고등학생도 30%에 이른다고 한다. 같은 해 교과부의 학교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사이버 불링이 전체 폭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3%로 순위상 6번째에 해당되지만,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폭력 유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 불링의 가해자들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대목에 이르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냥 ‘재미 삼아’ 다른 사람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을 더욱 따뜻하고 인간적인 공간으로 가꾸는 일에 정부·민간 모두가 나서야 한다. 점잖은 조언이나 ‘앞으로 잘하자’ 식의 계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실효성 있는 법적 제재를 고려해야 할 때다. 르윈스키의 말처럼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우리는 보다 더 온정적인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283호 (20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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