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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96)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국민과 소통하는 젊은 보수주의자 

총선 승리로 집권 2기 열어 ... 브렉시트 주장해 국제 경제·정치에 소용돌이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 사진:중앙포토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49) 총리는 정치적인 행운아로 통한다. 우선 불과 35살이던 2001년 6월7일 하원의원에 첫 당선해 지금까지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의원으로 등원한 지불과 4개월도 안 된 2005년 5월 그림자 내각의 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집권당인 노동당의 교육부 장관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 자리다. 그는 이 자리를 7개월 정도 지키다가 내려와야 했다. 의원이 된 지 불과 4년 6개월 만인 2005년 12월 그는 위기의 보수당을 구할 구원투수인 당수가 됐기 때문이다. 그의 야당 당수 생활은 4년 6개월 정도 만에 끝났다. 2010년 5월 총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캐머런 총리는 시작부터 불안했다. 2010년 선거는 ‘헝(hung) 의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헝 의회는 의원내각제 정치 체제에서 어떤 정당도 단독으로 입법부의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을 가리킨다. 지루한 정치협상 끝에 제3 정당인 자유민주당과 가까스로 연정을 이뤄 정부를 구성했다. 만 43세로 총리가 된 캐머런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보유하고 있던 20세기 영국 최연소 총리 기록을 5달 차이로 깼다. 1812년 32세로 총리에 올랐던 리버풀 백작 로버트 젠킨슨에 이어 둘째로 젊은 총리가 됐다.

영국 정치사에서 둘째로 젊은 총리


▎2014년 7월 포르투갈 휴가지에서 부인과 장을 보는 캐머런 영국 총리. / 사진:중앙포토
캐머런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쏟아지는 난관에 봉착했다. 2000년대 후반 글로벌 재정위기 속에서 그는 갖가지 입법으로 국방, 복지, 이민 정책, 교육, 건강 등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예산 축소의 파장은 컸다. 2011년에는 중동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한 리비아 공습에 나선 영국 공군의 일부 파일럿들이 목숨을 건 맹렬한 폭격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명예퇴직 통보를 받았을 정도다. 그해 유럽연합(EU)과의 조약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EU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보수 정치인인데도 국민이 원하는 대로 가는 스타일을 보였다. 2014년 9월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를 허용했지만 다행히 부결돼 영국 분열은 피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유엔이 목표로 정한 GNI의 0.7%를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는 등 온정적인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2013년에는 EU와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 재협상에서 몇몇 회원국 의무를 풀지 않으면 2017년 EU에서 탈퇴하겠다는 강경 제안까지 내놨다. 올해 총선에서 이기면 이를 실천에 옮기겠다는 것이다. 캐머런의 리더십은 재정 긴축과 보수주의, 그리고 EU에 대한 강경책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런데 바로 그 총선이 열린 5월 7일 이변이 일어났다. 총선일인 7일 밤 10시 투표를 마칠 때만 해도 영국인들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초박빙 승부를 예상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노동당의 에드 밀리밴드 당수도 집권 가능한, 모호한 순간이었다. 여론조사기관 11곳이 모두 같은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이날 밤 10시 영국 BBC 등 주요 방송사 출구조사는 전망과 달랐다. 보수당 316석, 노동당 239석으로 캐머런의 완승이었다. BBC 정치부장으로 인기 앵커인 앤드류 마는 “여론조사 기관이 잘못 짚었거나, 지난 24시간 동안 보수당 쪽으로 엄청난 표 이동이 있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최종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보수당이 과반(326석)을 넘긴 331석을 차지했다. 언론들은 여론조사에선 미처 드러나지 않던 ‘샤이 토리(Shy Tory)’의 힘으로 풀이했다. 이는 여론조사나 주변 사람 등에게는 보수당 지지자라고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 숨은 지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노동당은 232석만 차지했다. 총선 압승으로 캐머런은 새롭게 임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첫 번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지지와 추진력을 구비했다. 유럽 정계를 좌지우지할 강한 정치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독립은 거부했지만 민족주의 바람이 거셌던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지역 내 59석 중 56석을 휩쓸면서 노동당에 이어 전국 3위 정당이 됐다. 북부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주요 지지기반으로 하던 노동당은 스코틀랜드에서 몰락했다. 2010년 이 지역에서 41석을 차지했지만 이번에는 1석만 건지는 데 그쳤다. 노동당은 1987년 이후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캐머런은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의 EU 탈퇴 가능성을 외쳐왔다. 이는 선거 뒤 영국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고 있다. 영국 의회는 지난 6월 9일(현지시간) 국민투표 시행 법안을 표결해 찬성 544표, 반대 53표로 승인했다. 유권자들에게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라는 문구가 국민투표 문구로 정해졌다. 국민투표는 2017년 예정된 프랑스 대선과 독일 총선에 앞서 내년 6월에 미리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캐머런 총리의 의도는 EU와 협상해 자국의 정책 주권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EU협약을 개정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EU 잔류 입장을 정한 뒤 국민투표에서 EU에 남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EU 탈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것은 EU를 상대로 원하는 협상 결과를 얻어내려는 압박일 수 있는 것이다.

내년 6월쯤 운명의 ‘EU 탈퇴’ 국민투표

사실 캐머런 총리는 아직 어떤 협약을 바꾸자는 제안도 내놓은 적이 없다. 다만 EU가 지나치게 회원국을 강하게 통합하고 있으므로 이를 느슨하게 풀어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늘리겠다는 원칙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명확한 것은 EU 회원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역내 이민자에 대한 복지 혜택을 제한하겠다는 것뿐이다. 이에 따라 이번 총선에서 승리한 캐머런 총리가 EU와의 협상에서 자율권을 얻을 경우 EU체제에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EU 회원국 상당수가 캐머런 총리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캐머런 총리는 총선에서 압승한 뒤 EU 회원국들을 상대로 순방외교를 벌이며 협약 개정을 압박하고 있다. EU의 대모 격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캐머런에게 “정말로 필요하다면 협약 개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아냈다. 메르켈 총리는 EU의 기본인 역내 자유무역과 이동의 자유라는 대원칙만 지킨다면 다른 부문을 양보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쳤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나오고 있다. 최악의 경우 ‘치킨 게임’ 양상이 전개될 수도 있다. 캐머런 총리와 EU가 서로 한발도 양보하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메르켈 총리는 “넘어선 안 되는 기본 원칙들과 ‘레드라인(한계선)’이 있다”며 “이는 유럽 내 무역과 이동의 자유”라고 말한 바 있다.

국제사회는 브렉시트에 부정적이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6월 12일 영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AAA(트리플A)’에서 강등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신용등급을 낮춘 가장 큰 이유가 브렉시트 가능성이다. S&P는 “영국이 국민투표를 하기로한 것은 금융 서비스와 수출, 경제 전반의 성장 전망에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고 강등 이유를 설명했다. 무디스와 피치는 이미 영국의 트리플A 등급을 낮췄다.

영국의 국민투표는 영국은 물론 EU와 세계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국제경제는 국제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영국과 EU 회원국 간의 힘겨루기가 이미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도 언제까지만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자기나라 경제에 불을 지피기도 바쁜 처지에 미국이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가운데 영국 내에서는 찬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이 EU회원국이 아니라면 스코틀랜드는 다시 한 번 국민투표로 영국에서 분리해 EU 품안으로 가겠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캐머런 총리가 관리해야 할, 거대한 국내·국제 정치의 소용돌이다.

캐머런의 경력은 얄미울 정도로 엘리트 코스다. 우선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식중개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귀족인 준남작(남작과 기사 사이의 작위)의 딸로 치안판사로 일하다 은퇴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아버지 이안은 자식들에게 불굴의 의지를 물려줬다. 다리가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끝없는 운동과 교정, 그리고 수술로 끝내 이를 고쳤다.

캐머런은 어려서는 과거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가 다녔던 버크셔주 헤더다운 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무려 2년을 월반한 그는 이튼 칼리지로 진학해 졸업했다. 재학 중 대마초를 피운 게 들켰으나 팔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지 않고 라틴어 문장을 500줄씩 베끼는 처벌만 받았다. 옥스퍼드대 브레이슨노즈 칼리지의 입학허가서를 받은 대부분의 영국 청년들이 하는 갭이어(gap year)를 했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 남짓 해외 여행이나 인턴 활동 등을 하며 세상을 익히는 일이다. 그는 당시 하원의원이던 대부 팀 로스본의 사무실에서 조사원 생활을 하며 갭 이어 중 9개월을 보냈다. 당시 그는 하원에 들어가 의원들이 토론하는 장면을 직접 보며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남은 3개월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얻은 홍콩에 있는 영국계 복합기업그룹인 자딘 마세손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에 들른 그는 영어를 잘하는 KGB 요원에게 포섭될 뻔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월리엄 4세의 5대손

옥스퍼드에 입학한 그는 통상 PPE라는 약자로 나타내는 복합 학문을 전공했다. PPE는 철학(Philosoph y)·정치학(Politics)과 경제학(Economics)으로 이뤄져 흔히 제왕학이라고 불렸다. 영국에선 복수 전공이 아니고 하나의 융합학문으로 친다. 대학을 졸업한 이 젊은 보수당원은 보수당(영국에선 ‘토리’라고도 부른다)의 조사부에 들어가 일했으며 노먼 라몬트와 마이클 하워드라는 두 의원의 보좌관을 차례로 지냈다. 그러다 칼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미디어사에 들어가 7년을 일했다. 1997년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아슬아슬하게 고배를 마셨다. 그는 첫 출마 때부터 EU탈퇴를 주장했다. 그 뒤 2001년 첫 당선한 그는 정책 설계와 추진 능력으로 단박에 보수당의 차기 주자로 떠올랐다.

재미난 것은 캐머런이 영국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남성 군주인 윌리엄 4세(1765~1837)의 5대손이라는 것이다. 동양식의 직계는 아니고, 유럽식으로 모계와 부계를 모두 따져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캐머런은 작위를 물려받거나 받은 적이 없어 귀족이 아니다. 캐머런 집안은 대를 이어 자식 교육에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특히 사람들과 소탈하게 어울려 지내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한 사람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낳는 데는 왕실 핏줄이나 작위보다 그런 인간적인 노력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1292호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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