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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 (101) 찰스·데이비드 코흐 형제] 사업·기부 다각화 이룬 21세기 메디치 가문 

매출 1150억 달러의 미국 2위 민간기업 공동 소유 …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영향력 행사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찰스 코흐.
창업주인 아버지가 4형제를 뒀는데 하나같이 똑똑하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재주도 많았을 뿐 아니라 야심만만하기까지 했다. 첫째는 하버드와 예일을 마쳤고, 2~4째는 MIT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부친이 세운 회사에 입사했다. 형제는 경영권을 놓고 10년 넘게 송사를 벌였다. 미국의 코흐(코흐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발음이며 미국에서는 코크로 부르기도 한다) 집안 얘기다. 올해로 창업 75년을 맞은 미국 2위의 민간기업인 코흐 인더스트리스(Koch Industries)의 경영주 집안이다.

창업주 프레드 코흐(1900~1967)는 화학공업 엔지니어로 정유회사를 세워 재산을 모았다. 네덜란드에서 1888년 미국 텍사스주 케나로 이민와 지역신문을 발행하고 당시로는 하나의 벤처산업이던 철도사업을 벌였던 해리 코흐(1867~1942)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레드는 MIT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캔자스주로 옮겨 원유사업을 벌였다.

그곳에서 기존 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인 원유 분해, 정제 방법을 개발했다. 이러한 정유 관련 기술 개발로 경쟁사를 따돌리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40년 캔자스주 위치타에 코흐 인더스트리스(Koch Industries)를 창업했다.

코흐 가문은 정유사업을 기반으로 천연가스, 광물 채취에까지 나서고 있다. 에너지 사업에도 폭넓게 개입하고 있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 비료, 아스팔트, 각종 화학제품 등을 생산한다. 비석유사업에도 진출해 잡화 교역, 섬유, 펄프와 제지, 목장사업,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심지어 벤처와 투자사업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사업의 복합체다. 직원은 10만명이나 된다. 반은 미국에서 고용하고 나머지는 59개국에 진출한 지점이나 자회사에 있다. 이 거대 기업의 주식을 코흐 집안이 84% 보유하고 있다. 그야말로 코흐 제국이다. 이 회사가 만일 상장기업이었다면 미국의 200대 기업 순위인 ‘포천 200’ 순위에서 17위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장 질문에 “내 시신을 밟고 하라”


▎데이비드 코흐.
2013년 기준으로 11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미국에서 카길에 이어 민간기업 중 2위의 규모를 자랑한다. 곡물로 유명한 카길은 에너지 교역, 가축 교역, 식료품, 건강 및 의약품, 금융, 전력과 가스 등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2014년 기준 134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미국 내 최대 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4만3000명의 직원을 거느려 채용 효자이기도 하다. 미국 내 최대 민간기업인 카길은 카길과 맥밀란 가족이 보유한 가족기업이다. 코흐 인더스트리스도 가족 기업이다. 독특한 것은 가족 간 지분이 상당히 정리된 상태라는 점이다. 둘째와 셋째가 각각 지분의 42%씩 보유하고 있다. 둘째인 찰스 코흐(80)가 경영권을 쥐고 있다. 코흐 인더스트리스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사회 의장을 겸한다. 1980~1990년대에 네 형제 간에 벌어졌던 지루한 상속 관련 소송의 결과다. 1983년 첫째인 프레더릭과 넷째인 윌리엄 코흐에게 11억 달러를 주고 회사 지분을 사들이고 소송을 끝냈다. 현재 코흐 인더스트리는 둘째인 찰스와 셋째인 데이비드가 지분을 42%씩 나눠 가지고 있다. 찰스는 이 회사의 상장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내 시신을 밟고 하라”라고 말했다.

찰스는 아버지가 세운 원유채굴과 정유회사를 다양한 분야로 확장했다. 화학은 물론 오염 솔루션 업체, 심지어 위기관리업체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무작정 문어발식 확장은 아니었다. 기존의 기술과 노하우,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관 분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기존에 있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창조라고 할 때 찰스는 그야말로 ‘창조경영’을 한 셈이다. 지금의 거대하고 복잡한 코흐 인더스트리스의 제품을 상당수가 찰스가 투자하고 키운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타인마스터 브랜드의 카펫, 수영복 등에 많이 쓰이는 라이크라 상표의 스탄덱스 섬유, 미국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퀄리티드 상표의 조지아퍼시픽 제지회사, 재활용 종이에 비닐을 입혀 만든 딕시 일회용 컵으로 유명한 딕시 컵스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2007년 펴낸 [성공의 과학(The Science of Success)]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시장에 바탕을 둔 경영’이라고 정의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먼저 파악해 뛰어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성을 넘어 회사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비결은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는 2014년 포브스 세계 부호 명단에 9위에 올랐다. 포브스가 추산한 2015년 8월 현재 재산은 412억 달러에 이른다. 동생인 데이비드와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으니 두 사람의 재산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된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관 분야로 사업 확장


▎부시를 비롯한 2016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들이 8월 3일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열린 첫 토론회에 모였다. 이들 중 젭 부시, 칼리 피오리나, 스콧 워커 등은 8월 1~2일 코흐 형제가 주최한 기부자 모임에 참석했다.
자선 사업에도 열심인데 주로 시장경제 중심의 교육을 하는 교육기관에 치중하고 있다. 조지 매이슨 대학의 인문학 연구 및 머케이터스 센터 등이 포함된다. 공화당 정치인과 러버럴한 그룹에도 지원을 늘리고 있다. 자유주의 성향의 싱크탱크인 카토 연구소를 개인의 자유, 최소한의 정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싱크탱크다. 찰스의 정치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기관이다. 2014년 ‘글로벌 고투 싱크탱크’가 선정한 세계 싱크탱크 순위 16위, 미국 순위 8위에 올랐다. 2014년에는 국제개발 싱크탱크 중 예산 대비 효율성이 가장 높은 기관으로도 뽑혔다. 이 밖에 수많은 예술가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셋째인 데이비드 코흐(75)는 MIT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아버지가 창업한 코흐 인더스트리스에 1970년 입사해 ‘패밀리 비즈니스’의 일원이 됐다. 1979년 자회사인 코흐 엔지니어링의 대표를 맡았으며 1983년 둘째 형인 찰스와 함께 코흐 인더스트리스의 공동 소유주가 됐다. 현재는 코흐 인더스트리스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경영만큼 정치적인 참여로도 유명하다. 자유주의자로서 정부의 민간 개입이나 간섭에 반대해왔다. 원래 공화, 민주 양측을 고루 지원하며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해왔다. 하지만 1984년 이후 공화당 쪽으로 기울었다. 1980년 군소정당인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건전 경제를 위한 시민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조용한 자선사업가’로도 불린다. 기부활동을 하면서도 티 내지 않게 조용히 하기 때문이다. 슬론 케터링 기념 암센터, 뉴욕장로회병원 불임클리닉 등 의료기관과 링컨센터 등에 기부해왔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데이비드 코흐의 공룡 코너’는 그의 기부로 마련된 것이다.

뉴욕의 시립발레단이 상주하고 있는 복합문화센터 링컨센터의 뉴욕 주립 극장에도 거액을 기부했다. 극장 리노베이션을 위해 1억 달러를 쾌척했으며 극장 측은 그를 기리기 위해 2008년 극장의 이름을 ‘데이비드 코흐 극장’으로 바꾸었다. 형인 찰스와 함께 2014년 포브스 세계 부호 명단에 9위에 올랐다. 포브스가 추산한 2015년 8월 현재 재산은 두 사람 공히 412억 달러에 이른다. 2012년에는 미국의 4위 부자로, 2013년에는 뉴욕 최고의 부자에 오르기도 했다. 자가용 비행기가 아닌 민항기를 이용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1991년 로스앤젤레스 공항 활주로에서 있었던 여객기 충돌 사고를 겪기도 했다. 당시 31명이 숨지고 66명이 살아남았다.

경영에서 손을 뗀 형제들은 자선사업과 나름의 문화·스포츠 활동으로 이름 높다. 장남 프레더릭 코흐(82)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MIT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그는 하버드에 들어가 인문학을 전공했다. 1955년 졸업 뒤 해군에 들어가 항공모함에서 근무했다. 제대 뒤엔 예일대 드라마스쿨에 들어가 극작을 전공했으며 196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 초의 희귀 서적이나 문학작품 원고, 악보, 미술품, 장식예술, 사진 등의 전문 수집가로 활동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프레더릭 코흐 재단을 세워 도서관 등을 지원했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을 하버드 극장 컬렉션과 예일대의 희귀 서적 및 원고 도서관, 카네기 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리처드 레빈 예일대 총장은 프레더릭의 수집품에 대해 “예일대 개교 이후 기증 받은 수집품 중 최고”라고 칭찬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미국 내 해외의 역사적인 건물을 복구하는 문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1879년 이후 폐허가 된 셰익스피어 극단의 스완 극장을 완전히 복구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합스부르크 왕가 사냥 쉼터인 블륀바흐성 등을 수리했다. 뉴욕 맨해튼의 오래된 맨션과 펜실베이니아 주의 튜더 고딕 양식의 고색창연한 저택 등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1990년에는 영국 튜더 왕실의 유명한 국왕인 헨리 8세(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창설한 인물)와 앤 볼레인(왕비가 됐지만 나중에 처형되는 비운의 인물)이 만난 장소로 유명한 역사적인 서튼 플레이스를 구입해 자신의 고색창연한 수집품을 벽에 걸었다. 그는 이곳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다 2005년 팔았다.

넷째인 윌리엄(75·통상 빌로 불림)은 셋째인 데이비드와 쌍둥이다. MIT에서 화학공학으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형제들과의 오랜 경영권 분쟁 끝에 1983년 자신의 지분을 둘째와 쌍둥이 형에게 8억 달러를 받고 넘기고 코르 인더스트리스를 떠나 자신만의 투자회사를 차렸다. 에너지 관련 업체를 창업해 직접 경영하고 있다. 그 결과 재산을 40억 달러 정도로 불렸다. 자선사업과 수집가 및 요트 항해도 열심이다. 왔다. 1992년 아메리칸컵 요트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요트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해양 관련 물품 수집가로도 이름이 높다.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로도 유명하다.

재미난 것은 코흐 인더스트리스의 지분을 보유하고 경영을 맡고 있는 찰스와 데이비드가 지난 8월 1~2일 캘리포니아주 다나포인트의 최고급 리조트 ‘세인트 레지스 리조트’에 보수성향의 ‘큰 손’ 450명을 모아놓고 공화당 대선 예비주자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세인트 레지스 서밋’으로 불리는 이 행사에는 공화당 주자 17명 중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 최고경영자(CEO)가 모였다. 이들은 내년 대선에서 모두 8억89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코흐 형제 앞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질의문답에 응했다.

정치적으론 공화당, 자유주의 성향으론 민주당

코흐 형제는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으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한다. 그래서 최저임금 인상 등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늘리는 민주당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동성결혼이나 임신중절 등 사회적 의제에선 민주당과 더 가깝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면서도 이들의 사회정책 부분에선 압력을 행사해 보다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에서 가장 조용한 자선사업가라는 코흐 형제는 실제로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큰 손이다. 문화적인 패트런이기도 하다. 21세기 메디치 가문을 보는 듯하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1300호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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