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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장수 기업의 승계 현황은] 피보다 중요한 건 능력 

오너가도 예외 없는 ‘무한경쟁’ ... 명문대 출신에 장교 제대 필수인 발렌베리 그룹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을 이끄는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발렌베리 그룹은 5대째 150여년 동안 세습 경영을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피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1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가전 업체 밀레의 라인하르트 친칸 공동회장이 지난 6월 방한해 남긴 말이다. 밀레 그룹은 1899년 두 공동창업자가 설립해 밀레와 친칸 가문이 4대째 경영하고 있는 가족기업이다. 두 가문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데, 기술 부문을 맡은 밀레 가문이 51%, 경영을 맡은 친칸 가문이 49%를 갖고 있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도 경영권을 두고 다투는 판국에 전혀 다른 두 가문이 잡음 없이 회사를 경영하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공동경영의 비결에 대해 친칸 회장은 “부부가 백년해로하기 위해서 서로의 약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정신이 필요하듯 우리 두 가문은 서로 존중하고, 항상 모든 일을 함께 결정한다”며 “두 가문이 함께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지난 116년 동안 권력 다툼은 단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밀레는 공동경영만큼이나 독특한 후계자 승계 방식으로 유명하다. 양 가문에서 수십명이 경합을 펼쳐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후보자들은 또다시 다른 회사에 취업해 4년 이상 경영 실무를 익혀야 한다. 친칸 회장 역시 1991년 밀레에 입사하기 전 BMW에서 4년간 일했다. 경력을 쌓은 후에 업무능력 시험과 면접을 통과해야 비로소 후계자로 선정된다. 오너가뿐 아니라 헤드헌터 등 전문가가 선발 과정에 참여해 후보자 자질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린다. 친칸 회장은 “양 가문에서 후계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기업 후계자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다른 기업에서 훈련 받으며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입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모두 후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밀레 그룹만큼 혹독한 승계 과정을 거치는 가문이 또 있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14개 대기업을 거느린 발렌베리 그룹이 그렇다. 1856년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창립해 5대째 그룹을 이끄는 발렌베리 가문은 150여년 동안 세습 경영을 하고 있다. 후계자는 친족 간 경쟁을 통해 정하되 적합한 후계자가 없을 경우 가문 외에서 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경험을 통해 실무와 금융 흐름을 익혀야 한다. 이후 해군 장교로 복무를 마쳐야 가문의 경영진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과정에만 10년 이상이 걸린다.

한명의 후계자만 둘 경우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돼 독단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창업주의 우려에 따라 후계자는 2명을 선발한다. 최종 선발된 두 명 중 한명은 지주사 회장을, 다른 한명은 SEB은행 회장을 맡는다. 현재 그룹을 이끄는 ‘투톱’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야콥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해 가문의 소수만이 경영에 참여하며 나머지 일족은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지주사와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100여개에 이르는 산하 기업은 대부분 전문경영인이 경영한다. 분식회계나 오너 친인척들이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다.

입사 25년 만에 CEO 된 창업주 손자


현재 발렌베리 가문은 6대 승계 작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약 30명의 후계자 후보자 중 아직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은 없다. 현직 발렌베리 회장이 공개적으로 사임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최근 일부 후계자 후보를 대상으로 여러차례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후계 구도에 대한 현지 언론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아직 30세 이하인 점을 고려했을 때 일각에서는 경영권이 발렌베리 가문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자동차 기업 도요타도 가족 승계 기업이다. 오너라 하더라도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CEO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은 다른 글로벌 장수 기업과 마찬가지다. 창업자 도요타 기이치로는 1950년 경영난에 직원 1500명을 해고한 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 역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영능력에 따라 오너 일가와 전문경영인이 번갈아 참여해왔다. 1937년 창업 이후 역대 CEO 11명 중 오너가 출신이 6명, 전문경영인이 5명이었다. 오너 일가가 입사 후 CEO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31년으로, 전문경영인(35.8년)과 큰 차이가 없다.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운영한 지 14년 만인 2009년 CEO에 오른 도요타 아키오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다. 그의 첫 일터는 도요타가 아닌 한 투자은행이었다. 그는 1984년 도요타에 입사한 후에도 본사가 아닌 공장 생산부에서 먼저 실무를 익혔고, 입사 25년 만에 사장이 됐다. 그가 사장 자리에 오를 당시 도요타는 극심한 엔고 현상과 북미에서의 대량 리콜 사태 등 큰 고비를 맞았다. 그는 취임한 해 흑자 전환에 성공한 것은 물론 3년 후인 2012년 세계 자동차 시장 1위 자리를 탈환하며 오너 승계의 모범 사례가 됐다.

독일 자동차 회사 BMW와 미국 최대 가전 업체 제너럴일렉트릭(GE)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기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BMW를 이끄는 하랄트 크루거 사장은 인턴으로 BMW에 입사했다. 크루거는 49세의 젊은 나이에도 BMW 그룹 주식 가운데 47%를 보유한 최대주주 크반트 가문의 결정에 따라 CEO 자리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산 위기에 처한 BMW 지분을 사들여 기업을 키운 크반트 가문은 회사 경영을 감독하는 감독이사회 멤버로만 권한을 행사할 뿐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GE는 체계적인 승계 관리 프로그램으로 잘 알려져있다. ‘경영의 귀재’로 통한 잭 웰치 전 회장의 뒤를 이어 2000년 9대 CEO에 오른 제프리 이멜트 회장 역시 혹독한 승계 과정을 거쳤다. 처음 그와 함께 후보군에 오른 이들은 100명에 달했다. 1년 6개월 뒤 12명으로 좁혀졌고, 그 후 수년간 꾸준히 관찰 평가와 면접을 실시해 최종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은 물론 결단력과 일관성, 자기관리 능력, 비전 등 최고경영자에게 필요한 모든 항목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다. 잭 웰치 전 회장은 자신의 은퇴를 7년 앞둔 시점에서 이사회 승인을 거쳐 승계 프로그램을 시작, 후보자를 물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 허정연 기자 hur.jungyeon@joins.com

1301호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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