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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 (103) 리커창 중국 총리] 잇단 악재 속 건재 과시한 ‘경제 대통령’ 

증시 폭락, 위안화 평가절하 후폭풍 속 입지 탄탄... 경제 발전 위한 행정개혁 주도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리커창 중국 총리 / 사진:중앙포토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의 주인공은 단연 시진핑 국가주석이었다. 이날 천안문 성루에서는 시 주석을 중심으로 그의 오른쪽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등 외빈이 자리 잡았다. 51개국에 초청장을 보냈고 일본과 필리핀을 제외한 49개국의 대표가 성루에 섰다. 행사에는 1만2000명의 군인과 500대의 첨단 지상 무기와 장비, 200대의 전투기가 동원돼 중국의 군사 굴기를 각인시켰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덩펑 5B, 다탄두 대륙 간탄도탄인 동펑 31A, 음속 10배의 초고속으로 방공망을 무력화해 미국의 항공모함도 잡을 수 있다는 중거리 미사일 동펑 21D 등 가공할 미사일 전력이 중국의 달라진 군사력을 상징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기술력과 경제력도 보여줬다.

주목할 부분은 열병식을 역사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70년 전 항일전쟁 승리는 물론 121년 전 청일전쟁의 패전도 잊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오성홍기를 든 중국 의장대가 인민영웅열사비에서 국기게양대까지 정확하게 121보를 걸어갔기 때문이다. 1894년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처참하게 패배해 ‘동양의 병자’로 불렸던 121년 전의 중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인 걸음수다. 국제 사회에 21세기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다.

시 주석의 왼쪽은 더욱 상징적이다. 장쩌민 전 주석-후진타오 전 주석-리커창 총리 순서로 배석했다. 전·현직 국가지도부가 출동해 중국 공산당의 지배 전통을 보여주고, 중화부흥을 위한 국가 단합을 결의하는 모습이다.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리커창(60) 총리다. 그는 전직 최고지도자와 나란히 서서 천안문 아래를 내려다 봤다. 행사의 마지막도 그의 ‘종료’ 명령으로 장식됐다. 최근 중국 증시 악재 등을 겪으면서 입지가 흔들린다는 분석이 나왔던 그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 대목이다.

열병식에서 전직 지도자와 어깨 나란히


▎리커창 총리가 선전의 촹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중국에서 외교·국방·사정 등 굵직한 부분은 국가주석 겸 당서기인 시진핑이 맡지만 경제는 리 총리가 책임진다. ‘경제는 리 총리가 대통령’인 셈이다. 열병식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도 9월 2일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 이어 리 총리와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한·중 관계 발전 방안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등 양국 간 주요 관심사항에 대해 협의했다.

박-리의 네 번째 회담이다. 세계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한·중 FTA 활용 등 양국 간 호혜적인 경제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이번 방중에 역대 최대 규모인 156명의 경제사절단을 데려갔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그룹 회장)을 비롯해 대기업 대표단 23명과 중견·중소기업 대표단 105명 등 기업인 128명, 경제 단체 및 협회에서 21명, 공공기관 및 연구소에서 7명이 함께했다. 9월 4일 상하이에선 이들이 참석한 비즈니스포럼이 열렸다.

사실 리 총리는 최근 계속 시련을 겪어왔다. 상하이 증시는 지난 8월 24일 8.49% 폭락하면서 2007년 이후 최대 규모의 일일 낙폭을 기록했다. 기관투자자들이 돈을 쏟아 붇게 했지만 관치가 시장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배경이 된 경제 성장 둔화도 리 총리를 괴롭히는 요소였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비서실장이던 링지화 중앙통일전선공작 부장이 부패 혐의로 체포된 뒤 리 총리의 권력 기반이 된 공청단파가 붕괴됐다는 관측도 나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위안화 절하를 원치 않는다”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위안화를 절하했다. 지병인 당뇨가 악화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새나왔다. 이런 상황을 겪고 있던 리 총리였지만 열병식에서 자신이 건재를 과시한 것이다.

리 총리는 마카이 부총리와 함께 지난 7월 초 중국 정부가 내놓은 증시 부양책을 설계했다. 주식의 단기 매매를 금지하고 정부기관을 통해 2000억 달러(237조4400억원) 규모의 주식을 매입하는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또 다시 폭락장을 맞으면서 중국 당국은 대규모 주식 매입을 통한 증시 부양 방안을 사실상 포기했다. 대신 지난 8월 11일부터 사흘간 위안화를 3%가량 평가 절하했다. 이는 리 총리가 지난 3월 파이낸셜타임스의 라이오넬 바버 FT 편집인과 취임 후 첫 서방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발언과 상충된다. 이 자리에서 리 총리는 “비록 약한 위안화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위안화 절화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서방에서는 그가 증시는 물론 통화정책에서도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을 이길 수는 없는데 관치로 여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증시 폭락을 앞둔 지난 7월 리 총리는 경제에 자신감을 앞세우면서 증시 폭락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주가가 폭락한 ‘블랙먼데이’에도 우리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증시 부양 대신 3D프린터 산업 발전만 주문했을 뿐이다. 시장경제는 물론 생산을 제외한 금융 등 경제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까지 나왔다. 심지어 2017년 당대회에서 어떤 운명에 처할지 모른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왔다. 2017년 당대회에서 연령 제한으로 은퇴하는 장더장 전인대위원장의 뒤를 잇는 방식으로 총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권력 서열 2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다. 전례도 있다. 1997년 9월에 열린 15차 당대회에서 당시 리펑 총리가 권력 서열 2위는 유지한 채 전인대 위원장으로 자리만 바꿨다. 당시 서열 5위였던 주룽지 부총리가 3위로 올라오면서 5년 단임의 국무원 총리를 맡았다.

아프리카·남미 돌며 중국 위상 높여

리 총리는 8월 24일 중난하이에서 바크잔 사진타예프 카자흐스탄 제1부총리와 만나 “현재 세계 경제 형세는 여전히 모호하고 시장의 변동이 커 중국 경제도 일부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도 “중국 경제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증시 폭락정도는 여전히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며, 위안화 가치 하락의 영향은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중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편입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단과 처방에서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중국식으로 중국 경제의 상황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중국식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는 이야기다.

리커창 총리는 활발한 해외 순방과 국제적인 경제협력으로 중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2013년 5월에는 인도·파키스탄·스위스·독일을 순방하며 시장 개척과 기술도입의 길을 각각 열였다. 가장 주목할 점은 아프리카 시장 개척이다. 2014년 5월에는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아프리카 대륙을 중국 경제의 텃밭으로 바꿔 놨다. 올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버지의 고향인 케냐를 포함해 아프리카를 순방한 이유도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케냐 수도인 나이로비의 중심지에는 ‘공사중’임을 알리는 중국어 간판이 수두룩하다. 중국산 제품은 아프리카의 소상공인의 삶을 위협할 정도로 대륙 깊숙이 침투했다. 심지어 전통 민속 공예품까지 이를 카피한 중국 제품에 밀릴 정도라고 한다. 리 총리가 기획한 체계적인 아프리카 진출의 결과다. 인도적인 원조로 시작해 대대적인 인프라 공사 수주와 수출 신장으로 연결하는 게 리 총리의 새 시장 개척의 공식이다. 지난 5월에는 야심적인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브라질·콜롬비아·페루·칠레의 남미를 순방한 것이다. 제2 파나마 운하부터 파나마 운하를 상당수 대체할 수 있는 있는 중남미 횡단 고속도로 건설 등 굵직한 프로젝트가 제안됐다.

리 총리는 최근 들어 젊은이들의 벤처 창업에 유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신경제는 젊은이의 벤처에서 온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지난 5월 7일에는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을 깜짝 방문해 젊은 창업가들와 대화를 나눴다. 창업 카페에 들른 그는 바닐라 카푸치노를 시켜놓고 젊은 ‘촹커(創客·혁신창업자)’들과 어울렸다. 리 총리는 “창업은 모든 것의 기초”라며 촹커들을 격려했다. 리 총리는 투자설명회(IR)를 참관하고 중국 스타트업 일자리 정보 사이트인 라거우왕의 최고경영자(CEO) 마더롱과 대화를 나눴다. 라거우왕은 매년 6만여개의 스타트업 기업과 150만명의 구직자를 서로 연결해주는 일자리 정보 제공 사이트다.

벤처 키우는 ‘촹커 전도사’

실제 리 총리는 ‘촹커 전도사’를 자처하며 경제행정의 중심을 촹커 지원으로 이끌었다. 지난해부터 공개 석상마다 “대중창업·만민혁신”을 외치며 촹커문화 보급과 풀뿌리 창업이 중국 경제의 새로운 엔진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45차 세계경제포럼(WEF) 연차 총회(다보스포럼) 개막식에선 특별 연설을 하며 창업을 강조했다. 리 총리는 “대중창업·만민혁신은 내수 확대, 사회적 부의 증대, 대중 복지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의 창업 정책이 경제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 안정과 국민행복 차원에서 확대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변혁의 바람이 불어오면 어떤 이는 담을 쌓고, 어떤이는 풍차를 돌린다’는 유럽의 격언을 인용하며 경제혁신과 창업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창업 서비스 플랫폼을 제공하고, 창업을 돕기 위해 제도를 간소화하며, 창업 투자·융자 시스템을 지원하고, 창업과 혁신문화를 보급한다는 촹커 육성 4대 정책을 내놨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정책발표에선 “창업은 개혁이다. 창업은 농촌을 포함해 모든 지역 젊은이들에게 발전의 기회를 보장하자는 것”이라며 “누구든 창업할 수 있게 행정 장애를 모두 없앤다”라고 밝혔다. 그는 “올해 비행정 인허가를 모두 없애고 사전·사후 행정 책임 감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선창업 후행정 검토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뉴노멀 상태에서 경제 성장 하락 압력이 있지만 7% 성장엔 문제 없다”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이 같은 창업의 힘을 믿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중국은 1대 경제대국이 아니고 경제 규모 2위인 개도국일 뿐”이라는 그의 발언이다. 그는 “미국과의 신형대국관계는 서로 대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으며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올 9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미국 공식 방문 이후 이 관계가 어떻게 자리잡을 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은 리 총리가 요리하는 중국 경제의 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1955년 안후이성 딩위안 출신인 리 총리는 1982년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95년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받았다. 기술 관료 중심의 중국 지도부에서 드문 경제학 박사다. 대학 졸업 뒤 1983~98년 공청단에서 중앙학교부 부장, 중앙서기처 서기 등을 지내다 1998년 허난성 당부서기 겸 성장 대리로 지방행정에 뛰어들었다. 2002년 허난성 당 서기 겸 성장에 올랐으며 2004년에는 랴오닝성 당서기로 옮겼다. 그가 중앙 정부로 진출한 것은 2007년 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되면서다. 한국에는 세 차례 방문했다. 1995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시절, 2005년 랭닝성 당서기 시절, 2011년 국무원 상무 부총리 시절이다. 북한도 두 차례 찾았다. 2005년 랴오닝성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북한 평안북도 노동당위원회 초청으로 북한을 찾은 게 처음이다. 2011년 부총리 시절 한국을 찾으면서 북한도 나란히 찾았다. 남북한의 실상을 모두 잘 아는 지도자로 평가 받는 이유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1303호 (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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