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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개혁 성공의 조건] 제도·틀 다 바꿔도 생각이 그대로면… 

대기업 중심 산업구조 바꾸지 않으면 한계 ... 왜곡된 교육제도도 손봐야 


▎힘들게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지만 세부 조율까지 이뤄지려면 갈 길이 멀다. 여전히 재계와 노동계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사진은 시급한 노동개혁을 주장하는 경제5단체 부회장단 기자회견(왼쪽)과 ‘쉬운 해고’ 등 노동개혁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민주노총 기자회견. / 사진:중앙포토
임금피크제가 노동개혁의 상징처럼 부각된 게 사실이지만 따져보면 과제 중 하나이거나, 출발점 정도다. 일자리의 수급 불균형을 해결하고, 장기적으로 건전한 노동시장을 설계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임금피크제 말고도 할 일이 넘쳐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정권마다 우리나라 왜곡된 노동시장 구조를 바꾸겠다며 각종 정책을 총동원했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성공 사례를 이식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 임금피크제만 해도 일본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그러나 별 효과를 못 봤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이 대타협에 이른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 추상적인 합의를 구속력 있는 조항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여력 있는 중소기업, 고용의 질 개선에 앞장서야


전 세계 각국이 노동 문제로 몸살을 앓지만 한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하다. 주로 고착화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임금(소득) 격차 확대와 고용 불안과 직결된다. 대기업 중심으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해왔지만 중소기업의 고용 여력은 여전히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고,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도 인적자원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동시에 초고속으로 고령화가 진행돼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만성질환을 내버려둔 채 노동시장 내부의 문제, 즉 정년이나 임금·해고 등의 키워드에만 집중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저에 깔린 구조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제대로 된 개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경제학부)는 “특정 이슈에 집착하지 말고 중소기업과 서비스업 고용의 질을 개선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며 “노동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법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인센티브, 세제·재정 지원 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가지 정책과 법을 강제할 게 아니라 여러 선택지를 주고, 노사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유연하게 길을 터주자는 의미다.

규제개혁의 고삐를 당겨 의료·관광·한류산업 등 서비스산업 성장 속도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중소기업 고용의 질을 높이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 고용의 영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최근 대기업과 공무원에만 몰리는 대졸자의 구직 행태를 탓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임금과 복지 수준도 문제다. 그러니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대기업은 지원자가 넘쳐서 걱정이다. 취업준비생 김석훈(29)씨는 “괜찮은 중소기업이 많다는데 지원할 만한 회사를 찾기가 어렵다”며 “대기업과의 연봉 격차가 너무 크고, 어린이집과 같은 복지 여건도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이제껏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중소기업 지원제도는 넘쳐 난다. 오동윤 동아대 교수(경제학과)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태생적으로 더 이상 크지 못하도록(또는 그럴 필요가 없도록) 묶여 있기 때문에 여전히 대기업 협력업체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중소기업을 성장형과 생계형으로 이분화해 맞춤형 정책을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력이 있는 강소기업들이 고용의 질을 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로 모든 중소기업이 어려운 게 아니다. 중소기업 중엔 정부의 따뜻한 보호를 받으며 이득만 챙기는 곳이 적지 않다. 가만히 앉아서 ‘인재가 안 온다’고 할 게 아니라, 올 만한 회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유망 중소기업의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해 종업원 주주제도나 졸업 전에 장학생으로 인재를 확보하는 학습근로제 등이 활성화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업·노동계 고용의 사회적 의미 함께 고민해야

노동시장 저변에 깔린 왜곡된 교육제도 역시 손볼 때가 됐다. 우리나라는 중학생의 80%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들의 90%는 대학에 진학한다. 전체 대학진학률은 많이 낮아졌다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70%대다. 지난 정부에서 ‘고졸 취업’ ‘마이스터’ 등 기술 인력 배출을 중점 과제로 선정해 추진했지만 성과는 미진했다. 여전히 대학 입시는 과열돼 있고, 대졸자의 대부분은 대기업 공채와 공무원 시험에 몰린다.

뿌리 깊은 사농공상 의식 속에 부모는 사교육에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고, 학생은 목적 없는 입시 경쟁에 내몰린다. 취업 전쟁 속에 대학은 채용보조기관으로 전락했고, 기업은 여전히 직업 교육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도 대학을 졸업한 지원자들에게 ‘직무 적합성’을 요구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교육은 크게 잘못돼 있다. 그러나 그 어렵다는 연금도, 노동도 건드리는 정부가 교육만은 손 대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 틀을 흔들지 못하고 노동시장의 비대칭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수요가 한쪽에 몰리면 답을 찾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의식의 변화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경영진과 근로자는 여전히 유리돼 있고, 서로를 동료가 아닌 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서로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타협은 요원하다. 우선 기업이 피해를 줄일 생각만 하지 말고 고용의 사회적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기업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한 대학교수는 “이사회에서 고용을 숫자로 논의할 때마다 회의감이 든다”며 “1만명을 채용하겠다고 해도 대부분은 채용이 보장되지 않는 인턴이나 계약직인데 숫자 마케팅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진짜 사람에 투자하는 모습을 좀 보여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어느 정도의 자본(노동)을 투자해 어느 정도의 이윤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기업의 본질이긴 하지만 노동은 단순히 투입하는 자본의 개념만이 아니다. 기업들이 지금처럼 임금 상승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실적 악화 등을 이유로 외면만 한다면 결코 사내유보금 논란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노동계도 인구 등 사회구조적 변화와 최근 기업이 봉착한 저성장이란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현재 노동계를 주도하는 건 일부 대형 노조 중심의 정규직이다. 자연히 비정규직은 소외됐고,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가 이토록 심각해진 데는 노동계 주류의 책임도 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실무를 담당한 한 직원은 “노동계는 무슨 말만 하면 ‘뭘 더 희생하라는 얘기냐’고 반발한다”며 “그런 주장만 내세워선 협상에서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ins.com

1304호 (201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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