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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노미네이션 논란 다시 불붙나?] 화폐 위상 강화 vs 경제 불안 초래 

한은·기재부 미묘한 온도차 … “해외 사례와 직접적 비교 불가” 지적도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리디노미네이션을 놓고 미묘한 온도차를 보였다. / 사진:중앙포토
summary | 1000원을 1원이나 10원으로 바꾸자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논쟁이 재점화되고 있다. 지난 9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부터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 정부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현재 각계에서 찬반양론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화폐의 통용가치는 유지하되 액면단위를 하향 조정하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9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한 말이 도화선이 됐다. 이 총재는 9월 17일 국정감사에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이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화폐의 단위가 높다는 논의가 있다”고 하자 “최근 (리디노미네이션의)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 것으로 알며,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비록 ‘리디노미네이션의 장·단점이 뚜렷하므로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제시하긴 했지만, 한은 수장으로서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과 실행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 정치권과 재계에 파장을 몰고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줄곧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 부총리는 이 총재의 ‘논란이 된 발언’이 나온 직후인 9월 18일 기자들과 만나 “현 정부는 리디노미네이션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오래 전부터 화폐 단위가 커지다 보니 나온 이야기”라며 “화폐 단위를 줄이면 장점도 있지만 굉장히 많은 영향이 있을 수 있어 매우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은은 해명자료를 내고 ‘이 총재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일 뿐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뜻을 밝힌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최 부총리는 10월 5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종합 국정감사에서도 “지금은 우리 경제가 미국의 금리 인상, 중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 등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경계해야 때”라며 “사회·경제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 등의) 부분을 지금 시기에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당사자들이 직접 진화에 나서긴 했지만, 이처럼 리디노미네이션을 두고 한은과 기재부의 수장 사이에 미묘한 온도차가 생기면서 관심이 모아졌다.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한은 총재의 발언은 막강한 파급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애초 리디노미네이션은 우리나라 화폐 단위가 경쟁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데서 그 필요성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우리나라 돈 1만원은 10월 현재 일본에서 1000엔대, 미국에서 8달러대, 유럽연합(EU)에서 7유로대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쉽게 말해 리디노미네이션은 이처럼 화폐에 많이 붙은 숫자 ‘0’을 떼어내는 것이다. 지금의 1000분의 1 수준으로 화폐 단위를 절하하면 1만원은 10원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10원이어도 1000엔대, 8달러대, 7유로대와 같아진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장·단점이 워낙 뚜렷해서다. 장점부터 보자.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지난해 기준 세계 11위이지만, 화폐 교환 비율은 올 10월 현재 기준 1달러당 1100원이 넘는다.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같은 아시아권 경쟁국들의 달러 대비 환율이 한 자릿수인 점을 감안하면 리디노미네이션 이후 화폐의 위상이 지금보다 대외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거래나 장부 기재가 편리해지면서 경제 규모에 걸맞도록 국민들의 경제활동 수준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생긴다. 또한 고액권 발행 여부를 고민하면서 생기는 국가적 낭비를 줄일 수 있고, 리디노미네이션 과정에서 첨단 위·변조 방지 장치를 도입해 화폐의 보안성을 자연스레 강화할 수도 있다. 부수적으로는 현 정부가 그토록 사활을 걸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수 증대 등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단점도 만만찮다. 우선 새 화폐를 만들고 각 금융회사들이 이와 관련된 기기를 교체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나라의 경제 주체인 기업들로서도 수출할 때 제품의 가격 표시를 모두 바꿔야 하는 등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표면상 화폐 단위만 변경될 뿐, 화폐 가치에는 변함이 없다지만 이런 갖가지 불안 요인이 겹치면 물가나 환율 등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일부 경제 주체들이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심적 압박감 속에 부동산 등 실물 자산에 과도하게 투자하면서 물가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내수시장에서 모든 상품의 가격대가 일시에 바뀌면서 혼돈 상태에 빠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터키는 성공, 짐바브웨와 북한은 실패

이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리디노미네이션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국가들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최근 사례를 보면 2005년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터키가 대표적으로 성공한 나라다. 당시 터키는 화폐(터키리라) 단위를 100만분의 1수준으로 절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터키는 1970년 이후 매년 물가상승률이 연평균 50%가량에 달할 만큼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1981년 이후로 평균 2년에 한 번 꼴로 새 고액권을 발행하는 궁여지책을 써서 물가상승률을 낮추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던 터키에게 리디노미네이션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꽤 효과적인 수단이 됐다.

이와 달리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는 대표적으로 실패한 나라다. 경기 악화에 화폐(짐바브웨달러)의 가치가 나날이 떨어지자 짐바브웨는 2006년 화폐 단위를 1000분의 1 수준으로 절하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좀체 그칠 줄 몰랐다. 2008년 짐바브웨의 물가상승률은 5000억%나 됐다. 그해 다시 100억분의 1수준으로 화폐 단위를 낮췄지만 소용이 없었다. 2009년 재차 1조분의 1 수준으로 화폐 단위를 떨어뜨렸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돈이 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 나라’라는 오명만 뒤집어썼다. 가깝게는 북한도 리디노미네이션에서 쓴맛을 본 나라다. 2009년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면서 화폐 단위를 100분의 1 수준으로 절하했지만, 구권 교환 한도를 10만원으로 제한하고 교환 기간도 2주로 한정하면서 혼선이 빚어졌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결국 북한의 리디노미네이션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은 2010년 총살됐다.

이에 대해 경제 전문가들은 “이들 나라의 사례는 참고가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터키와 짐바브웨 등은 심각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경우로, 한국처럼 화폐 단위가 국가 경제 규모에 안 맞아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염두에 둔 경우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마지막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한 것은 지난 1962년. 당시에 비해 전체 GDP는 지난해 기준 597.9배, 1인당 GDP는 314.8배가 증가한 상태다. 그만큼 화폐 단위가 한국의 경제 위상에 걸맞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금이 적기냐 시기상조냐’는 논쟁까지 더해지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둘러싼 공방은 당분간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한편 최 부총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적 불확실성을 초래하는 부분이 있고, 물가나 서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남북의 통일 등 커다란 계기가 생겼을 때나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방향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 이창균 기자 lee.changkyun@joins.com

1308호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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