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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연근무제 확산 지지부진한 이유는] 보수적 기업문화에서 권고사항 안 통해 

전체 임금근로자 중 16.3%만 유연근무 ... 제도 악용 사례도 적지 않아 


▎유연근무제를 활성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은 유연근무제가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린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최근 한 대기업 입사를 위해 최종면접을 보고 온 김은주(28, 가명)씨는 면접장을 나오고서 집에 가는 길에 펑펑 울었다. 면접을 보던 도중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물음에 “있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씨는 이후 “입사 후 결혼을 할 계획이냐” “언제 할 거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냐”라는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질문이 압권이었다.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닐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김씨는 “마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생각이면 입사는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로 들렸다”며 “입사해도 적응해서 잘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질문에 머뭇거렸던 김씨 앞으로 날아든 것은 결국 불합격 통보였다.

“아이 낳고 회사 다닐 수 있겠느냐?”


남직원은 물론이고 여직원도 가사보다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유연근무제를 활성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한국이지만 정부나 공공기관, 지자체, 그리고 일부 기업 외에는 막상 유연근무제의 도입이 지지부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 장경아(35, 가명)씨도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인사팀에 육아휴직 신청을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휴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숫제 인사담당자는 장씨에게 “노동청에 신고할 테면 신고하고 회사를 그만두라”고까지 으름장을 놨다. 장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출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씨만의 이야기일까. 법적으로 보장된 육아휴직이지만 실제로 보장받는 경우는 드물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여성 육아휴직자는 7만3412명에 불과했다. 남직원의 경우는 더하다. 단 3421명만이 육아휴직을 했다. 정부가 일·가정 양립 지표로 보는 국내 육아휴직 현황은 이처럼 참혹하다. 이러다 보니 근로자를 위한 유연근무제도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통계청은 유연근무제 활용 근로자 수가 지난해 10월 기준 310만 명(시간제근로제 포함)으로 전체 임금근로자 대비 16.3%인 것으로 집계했다. 100명 중 16명 정도만 유연근무제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양미선 육아정책연구소 박사는 “육아 지원 정책의 하나인 유연근무제는 의무사항이 아닌 권고사항에 그쳐 한국의 직장문화상 (유연근무를)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 또한 보수적인 기업문화와 연결되는 이야기이지만, 사업자가 유연근무제를 악용할 소지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 A씨에 따르면 서울의 한 유학원에서는 ‘이상한 유연근무제’가 시행되고 있다. 매년 유학박람회를 주최할 만큼 관련 업계에서 이름난 이 회사는 최근 대표이사가 “출근시간을 30분 앞당기라”고 지시해 직원들이 30분씩 일찍 출근하지만 퇴근시간은 그대로다. 퇴근시간에 대해서는 따로 지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A씨는 “근로계약서는 오전 9시~오후 6시를 근무시간으로 명시했지만 윗선 지시로 오전 8시 30분까지 출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연근무제는 유연근무제인데 오직 사업자 입맛에만 맞춘 이상한 유연근무제다. 이에 대해 업체 측은 “업무가 많다 보면 퇴근이 늦어질 수 있다”며 구체적인 말을 아꼈다. 직원마저 유학을 가고 싶게 하는 유학원이다. 일각에선 이처럼 유연근무제가 되레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리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유연근무제가 비정규직 일자리 양산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유연근무제는 무늬만 정규직인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전반적인 고용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수년째 지적하고 있다. 유연근무제 유형 가운데 근로자가 주 40시간 이하만 근무하는 시간제근로제가 대표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경우다. 단시간 근무하는 직원들은 임금이나 승진 등의 근로조건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며, 추후 전일제 근무로 재전환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유급 전일제의 육아휴직처럼 근로자가 급여를 받는 식의 자발적인 유연근무제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육아휴직과 같은 현실적인 제도부터 활성화해야 한다는 게 노동계의 입장이다. 유연근무제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고용 차별이 거의 없는 선진국에는 적합한 제도일지 몰라도, 고용 불안 가능성이 큰 한국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013년 10월 기준 고용이 불안정한 임시·일용노동자(31.8%)가 상용노동자(7.3%)보다 유연근무제를 더 많이 활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불안 요인들을 극복할 때 유연근무제가 한국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기업들로서는 유연근무제 자체의 단점도 극복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갖고 있다. 국내 한 취업포털이 과거 실시했던 설문조사 결과 직장인들은 ▶개인주의 만연으로 인한 팀 워크 와해 ▶근무 기강 해이로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오히려 떨어질 가능성 ▶회사에 대한 소속감 저하 등을 유연근무제의 단점으로 꼽았다. 유연근무제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선진국의 기업문화와 한국의 기업문화를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호성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는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이 획일화되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갖고 있었다 보니 이를 단기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으로서도 재택·원격근무 같은 유연근무제를 활용했을 때 일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오히려 결과적으로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가능성이 없잖다.

‘무늬만 정규직’ 양산 가능성

한편 정부와 공공기관, 지자체 쪽은 일반 기업보다 상황이 낫다지만 갈 길도 멀다. 아직 ‘우리도 유연근무제를 하고 있다’는 식의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명희 서울시의회 의원(새누리당, 비례대표)은 “서울시가 유연근무제 실적 부풀리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서울시는 최근 행정사무감사에서 지난해 1426명이었던 유연근무제 활용 직원 수가 올해는 9월 기준 5963명으로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의원에 따르면 서울시는 올해부터 ‘가정의 날’ 체험 참여 근무자를 유연근무제 활용 현황에 합산, 실제 유연근무자는 이보다 훨씬 적다는 이야기다.

서울시가 지난 2007년 도입한 가정의 날은 매주 수요일로 이날 오후 6시 30분이 되면 청사 불이 일제히 꺼진다. 일찍 퇴근해 가정을 돌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일회성 체험 참여일 뿐 유연근무의 일종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의원은 “실적 부풀리기를 위해 정상 근무가 최선인 공무원들에게 유연근무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며 “서울시는 유연근무제 본연의 취지를 살려 직원들이 유연근무제를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이창균 기자 lee.changkyun@joins.com

1316호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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