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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빈촌 안씨현 부촌으로 만든 ‘티에콴인’ 

푸젠성 남쪽 대표하는 청차... 중국 10대 명차 반열에 

서영수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운무에 젖은 안씨현 난옌촌.
지난해 9월 7일 티에콴인(鐵觀音) 발원지인 푸젠성 난옌촌에서 타이산로우 문물보호관리위원회와 난옌촌민위원회 주최로 티에콴인 차왕(茶王)대회가 열렸다. 티에콴인을 만드는 장인 100여 명이 예선을 거쳐 결선을 치르는 대회에는 중국 CCTV도 산골까지 찾아와 현장취재를 하고 있었다. 차왕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타이산로우는 지역문화재로서 티에콴인을 창제한 왕스랑이 살던 집이다. 티에콴인의 시조는 웨이인이라는 설화도 있지만 ‘티에콴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는 왕스랑에 대한 기록과 역사적 자료가 좀 더 구체적이다.

1687년 난옌촌에서 태어난 왕스랑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해 지방에서 치르는 1차 과거시험인 향시에 합격했지만 하급관리에 오르지 않고 청나라 최고의 교육학부인 타이쉐의 후빵꽁성이 되어 학문에 전념했다. 후빵꽁성은 약칭 ‘후꽁’이라 하며 민간인이지만 예비 관리의 성격을 갖고 있다. 후꽁은 국가가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부역이 면제되었으며, 국법을 어겼을 때는 후꽁의 자격을 박탈한 다음에 민간인 신분으로 죄를 물었다.

1736년 봄 해질 무렵 왕스랑이 산책을 하다가 관음보살이 앉아있는것 같은 독특한 차나무를 발견했다. 어린 찻잎 가운데가 붉은 차나무를 집으로 가져와 정원에 심어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성장 속도가 빠른 차나무를 무성생식으로 매년 증식시켜 5년 만에 청차를 만들어 시음했더니 맛과 향이 천하일품이었다. 왕스랑이 만든 청차는 가볍게 발효시켜 요즘에 유행하는 청향이 아닌 탄배 과정을 길게 거쳐 발효도를 높인 농향 청차였다.

중국 CCTV도 산골까지 찾아와 취재


▎잎이 붉은 정통 티에콴인 차나무(왼쪽)와 티에꽌인 차와 우린 후 엽저.
1741년 황명에 따라 베이징에 있는 국가경전연구기관인 싼리 연구원으로 부임하게 된 왕스랑은 자신이 만든 차를 가지고 갔다. 고급 관리인 종2품 예부시랑 팡빠오에게 가져온 차를 선물했다. 차를 받아본 팡빠오는 한 눈에 귀한 차임을 알아보고 차를 좋아하는 치엔롱 황제에게 공물로 바쳤다. 차를 마셔본 치엔롱 황제는 왕스랑을 불러 치하하며 차에 대한 상세한 내력을 듣고 ‘티에콴인’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난옌촌의 티에콴인은 이 때부터 황실 공차로 지정됐다. 이후 출세 길이 열린 왕스랑은 1746년 정6품 통판까지 지냈다.

티에콴인은 푸젠성 남쪽을 대표하는 청차로서 푸젠성 북쪽의 따홍파오와 더불어 중국 10대 명차에 속한다. 차향이 날아가지 않게 단단하게 말아 밝은 청록색의 광택이 나는 외형이 상등품이다. 티에콴인의 제조기법은 숙달될 때까지 긴 세월과 땀을 요구한다. 상호경쟁과 신기술 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차왕대회는 마을 축제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록 자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지만 이곳에서의 1등이 곧 14억 인민이 사는 중국의 1등이기도 하다.


▎결승에 오른 차를 품평하는 심사위원들.
차를 품평하는 첫 번째 기준은 완성된 마른 찻잎의 외형과 색상을 본다. 그 다음 우려낸 차의 탕색을 살피고 코로 향기를 맡아 평가한다. 세번째 순서는 차를 맛보며 차 맛과 입속에 감도는 음운(音韻)을 체감한다. 마지막으로 차를 마신 후의 엽저 상태로 찻잎의 우열과 제조 공정의 정밀함을 가늠한다. 최종 결선에 오른 10명이 만든 차를 품평한 결과 왕만롱(王曼龍)이 차왕으로 등극했다. 2015 티에콴인 차왕에 오른 왕만롱(1971년 3월 7일생)은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티에콴인의 시조 왕스랑의 13대 후손이다. 처음부터 차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에는 275년 동안 차업(茶業)을 가업으로 삼아온 조상의 DNA가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형들을 제치고 티에콴인 13대 적통 장문인이 된 그를 차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그의 셋째 형 왕만위안(王曼源)이다.

1957년에 태어난 왕만위안은 가난이 싫었다. 부친인 왕롄단(王聯丹)이 1945년 싱가포르 국제차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지만 집안에 명예만 있고 돈은 없었다. 24세의 왕만위안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홍콩에 와서 일용직으로 연명했다. 고향에서는 100g당 100원에 팔리는 티에꽌인이 홍콩에서는 2만원에 거래되는 것을 본 그는 1인 좌판 형태의 차 상점인 ‘영원차행(榮源茶行)’을 창업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최상의 차로 신용을 쌓고 사람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마인드로 사업을 번창시켰다.

1990년 초부터 푸얼차(普洱茶) 열풍이 홍콩과 대만을 넘어 중국 본토에서도 불어 닥쳤다. 왕만위안은 보이차로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1993년 무렵 사업은 최고조에 올랐지만 믿을 만한 일손이 부족했다. 중국에서 법률가의 꿈을 키우던 막내 동생 왕만롱을 설득해 홍콩에 와서 자본주의를 맛보게 했다. 홍콩은 신세계였지만 왕만롱은 법률가의 꿈을 쉽게 접을 수 없었다.

차왕대회 열어 맛·품질 검증


▎차왕에 오른 왕만롱.
중국에서는 헐값인 차가 홍콩에서 고가에 팔리는 것을 보고 깊은 괴리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왕만롱은 가족과 고향사람이 함께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의 가업이면서 고향의 전통문화인 티에 인을 전수받기로 결심한 그는 형에게 사업수완을 배우고 아버지로부터 집안에 내려오는 비장의 차 기술을 하나씩 연마하기 시작했다. ‘산을 만나면 길을 뚫고, 강이 가로막으면 다리를 놓겠다’는 푸젠성 사람의 투지로 홍콩에 온 지 5년 만에 상하이로 건너가 ‘난샹밍차항(南香茗茶行)’을 설립해 1997년 독립했다.

차왕에 오른 왕만롱을 가마에 태운 마을 사람들은 차밭과 마을을 한바퀴 도는 축하의식을 하고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가난했던 산골촌락이 ‘차’ 하나로 부유한 마을이 되어 자축하며 단합하는 자리였다. 최고 중의 최고를 뽑는 차왕대회를 통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공유와 시장에서 요구하는 품질과 맛에 대한 공론의 장으로 활용하는 안씨현의 지혜로운 선택 덕분에 티에콴인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31호 (20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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