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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키우는 소셜 벤처] ‘따로 또 같이’ 쑥쑥 큰다 

삼성·현대차·SK, 단발성 이벤트 벗어나 ... 상생 차원의 중장기적 지원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현대차그룹이 만든 소셜 벤처인 이지무브 공장에서 연구원들이 장애인과 노약자의 상하차를 돕는 보조기를 조립하고 있다.
지난 2010년 설립된 이지무브는 현대자동차가 대주주인 국내 소셜 벤처다. 상·하차 보조기와 이동·보행을 위한 보조기 등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각종 보조·재활기구를 제조하는 사회적 벤처기업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주요 계열사들이 사단법인 행복한동행 등과 함께 이 회사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소셜 벤처 육성에 나섰다. 설립 후 지금까지 이지무브에만 50억원가량을 투자했다.

이지무브는 대기업의 지원사격 속에 신제품 연구·개발(R&D)에 몰두하면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오도영 이지무브 대표는 “그동안 한국에선 이동 보조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비싸게 들여와 써왔지만, 이지무브의 선전으로 이런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지무브가 이동 보조기를 국산화해 기존 수입산 제품 대비 30%가량 저렴한 가격에 출시하면서 시장의 호평이 잇따르자, 해외 브랜드들도 가격을 속속 낮췄다. 설립 후 2014년까지 매년 적자를 봤던 이지무브는 지난해 처음 흑자 전환에 성공하면서 현대차그룹과 함께 웃었다. 몇 년 간의 적자에 개의치 않고 계속 지원할 수 있는 대기업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업 이미지 높이면서 실리도 챙겨


수년을 기다린 현대차그룹의 사례에서 보듯, 최근 소셜 벤처와 대기업의 상생은 이전보다 긴 호흡으로 이뤄지고 있다. 과거 국내에서 대기업의 소셜 벤처 지원이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다하고 있다’는 생색내기 식의 단발성 이벤트에 그쳤다면, 이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소셜 벤처를 키워내는 데 열중하는 분위기다. 물론 이미지 제고 효과를 기대해서이기도 하지만, 소셜 벤처를 육성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이 얻는 실리(實利)도 만만찮다.

예컨대 이지무브는 2014년 기아차를 통해 장애인 복지 차량인 ‘올 뉴 카니발 이지무브’를 선보였다. 기존 올 뉴 카니발을 장애인과 노약자가 타기 쉽게 개조한 것으로, 차량 하부에 후방 경사로 등을 설치해 휠체어에 탑승한 채 차에 탈 수 있다. 비슷한 콘셉트로 2015년 선보인 ‘레이 이지무브’ 역시 경차를 개조해 사회적 취약계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소셜 벤처와의 상생 속에 현대차그룹은 더 많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큰(大) 기업으로 또 한 번 거듭나고 있다.

이를 잘 아는 재계 맏형 삼성전자도 중장기적으로 소셜 벤처를 키워내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은 2012년 ‘C랩’이란 이름의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확산하고, 임직원들의 우수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취지에서였다. C랩을 통해 삼성 임직원들은 지난해까지 100개 이상의 과제를 진행, 이 가운데 70여 개를 완료했다. C랩에 채택되면 1년 간 현업 부서에서 벗어나 팀 구성부터 예산 활용, 일정 관리 등을 자율적으로 정해 과제를 진행한다. 근무 시간이나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사업화할지만 집중하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창업에 성공해서 삼성을 퇴사하란 게 삼성의 방침이다.

이렇게 활성화된 C랩은 올 4월까지 총 61억원의 매출, 110억 원의 투자 유치라는 성과를 냈다. 삼성 출신들이 만든 스타트업들이 일궈낸 성적표다. 이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뜻있는 일을 하는 소셜 벤처도 있다. 지난해 9월 C랩을 통해 삼성에서 분사한 스왈라비(Swallaby)라는 스타트업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사용자의 걸음걸이를 분석해 관련 기록을 제공하는 모바일 헬스 트래킹 애플리케이션(앱)을 선보였다. 사용자는 스마트폰이나 웨어러블 기기에 이 앱을 설치하고, 걷기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걸은 만큼 기부단체에 포인트 형태로 기부를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C랩으로 삼성은 인재를 잃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삼성에도 득이 되는 얘기다. 삼성 관계자는 “기존에는 수동적으로 회사의 지시만 따르던 사내 우수한 인재들이 다양한 R&D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등 더 능동적·적극적으로 일하는 계기가 됐다”며 “회사 입장에서도 자연스럽게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아울러 C랩을 거친 스타트업들이 삼성에서 분사한다고 해서 삼성과 인연을 끊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삼성과는 돈독한 관계 속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협업으로 새 시장 창출을 노리는 ‘따로 또 같이’의 관계가 된다. 이 때문에 삼성은 C랩을 매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재일 삼성전자 DMC연구소 창의개발센터 상무는 “국제 전자제품박람회(CES)와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같은 글로벌 전시회를 통해서도 우수 C랩 과제를 공개하면서 실제 비즈니스와의 연계 가능성을 키우려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도 소셜 벤처 육성에 적극적이다. SK는 2010년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사회적기업단(현 행복나눔재단 사회적 기업본부)’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소셜 벤처 모델 개발과 확산, 해외 진출 지원을 위해서다. 이후 SK는 3년 간 좋은 사업화 아이디어를 발표한 기업가나 팀에 상금을 주는 콘테스트 형태의 일회성 이벤트로 소극적인 지원을 하다가, 2013년부터는 콘테스트 입상자들에게 실제 투자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마찬가지로 중장기적 투자만이 최선의 선택이란 판단에서다. 최근 3년 간 SK로부터 이런 임팩트 투자(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지금까지 총 17곳, 투자금은 37억원가량이다. 기업당 5000만~5억원의 투자를 받은 셈이다.

SK가 설립한 재단법인 행복전통마을이 2014년 경북 안동에 문을 연 전통 고택(古宅) 리조트 ‘구름에’는 소셜 벤처 육성이 지역사회와의 상생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70년대 안동댐 건설 후 수몰로 인한 유실 위기에 처한 고택을 SK가 리조트 사업으로 부활시켰다는 평가다. 지역 장인들이 공급한 식음료와 침구류를 사용하고, 지역 주민들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지역경제에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총수 구속으로 곤욕을 치렀던 SK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된 건 당연했다.

SK, 3년간 소셜 벤처 17곳에 37억 투자

신체적·정서적으로 일반 학습이 어려운 아동을 위해 맞춤형 학습 앱을 개발하는 소셜 벤처 에누마도 2014년 SK의 투자를 받은 곳이다. 에누마가 만든 교실 버전의 수학교육 콘텐트는 지난해 미국의 1200여 개 학교에서 시범 도입될 만큼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김용갑 SK행복나눔재단 사회적기업본부장은 “소셜 벤처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되, 일회성 기부가 아닌 일반 기업과 같은 영업 방식으로 지속적인 임팩트를 만들어낸다”며 “그런 소셜 벤처를 키우려면 대기업도 길게 보면서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코오롱그룹 또한 서울 건대 입구 인근에서 ‘커먼그라운드’ 설립 프로젝트를 가동해 지난해 유통업 진출과 지역사회와의 상생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거뒀다. 컨테이너 200여 개를 쌓은 건축물에 지역 소상공인과 청년 창업자들이 입점해 1년 간 22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이들 대기업은 ‘투자한 만큼 거둔다’는 격언을 사회적 활동에서도 여실히 체득하고 있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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