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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족의 조카 육아] “뭐든 해주마” 그들은 조카 바보 

자식 대신 사랑·돈 쏟아 부어 … 유아·아동용품 매장의 ‘큰 손’ 

박상주 기자 sangjoo@joongang.co.kr

#1. 경기도 판교에 사는 영어과 여교수 A씨는 조카 사랑이 지극하다. 근처에 사는 동생의 3살 터울 두 자녀를 거의 키우다시피 한다. 이번 여름방학엔 12살짜리 큰 조카를 데리고 한 달 여 동안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1000만원에 달하는 여행비는 모두 A씨 부담이다.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간다는 건 사실 핑계다. 사랑하는 조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A씨는 마흔을 넘기면서 결혼 생각을 버렸다. 학위를 따기 위해 유학을 다녀오고 연구실적을 쌓느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지내면서 남자 만날 시간이 없었다. 결혼보다 일이 좋다는 생각은 완전히 굳었다. 영원히 결혼을 하지 않을 결심을 하자 조카가 눈에 들어왔다. 특히 동생이 둘째를 낳으면서부터는 첫째 조카 육아를 자진해서 도맡았다.

올해 어린이날 키워드는 ‘조카 선물’

A씨는 신형 스마트폰이 나오면 2개를 사서 하나는 자신이, 다른 하나는 조카에게 선물한다. 물론 통신비도 A씨가 낸다. 큰 조카는 학교를 마치면 늘 A씨가 일하는 연구실로 간다. 연구실 한 쪽 공간엔 조카의 장난감과 학용품이 널려있다. A씨는 마치 일터에 자녀를 데리고 온 엄마처럼 지낸다. 처음엔 ‘결혼 안 한 교수에게 아이가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그러나 그의 조카 사랑이 알려지면서 수근 거리는 사람은 사라졌다. 조카는 A씨가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면 함께 귀가한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 뒤 조카를 집에 들여보낸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침대 머리에서 스마트폰 채팅이 시작된다. ‘오늘 어디 갔다 온 걸 엄마에게 말했더니 부러워해’ ‘이모는 초등학교 때 남자친구 있었어?’ 등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A씨는 먼저 대화를 끊는 법이 없다.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으면 큰 조카가 잠든 거다. 그제서야 A씨의 조카 육아가 끝난다.

#2. 서울 강동구에 사는 직장인 B씨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하다.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활을 간섭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아내가 없어도 아이는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공공연히 나타낸다. 자녀 욕심은 생기지만 자유로운 생활은 유지하고 싶단 얘기다. 어느 날 경기도에 사는 조카가 편지를 보냈다. 삐뚤거리는 글씨로 ‘삼촌 사랑해요~’라고 적혀있다. B씨는 손편지를 거실 중간에 걸어놓고 그날부터 눈을 부라리며 아동용품을 찾아다닌다. 옷은 기본이다. 장난감·자전거·운동화 등 조카가 좋아 할 만한 품목은 모조리 살펴본다. 그런데 어떤 걸 사야 할지 막막하다.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가장 비싼 상품만 사서 ‘헌납’한다. 3만원 정도의 식대 계산에도 벌벌 떨지만 30만원을 호가하는 장난감 로봇은 선뜻 계산한다. 한국에서 판매하지 않는 레고 블록이 있단 ‘주문’을 받으면 외국 출장에서 어떻게든 일정을 빼 사온다. 연중 가장 돈을 많이 쓴 날이 어린이날이다. 보너스라도 받는 날이면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조카의 옷부터 산다. 갖은 아이템을 사줄 때마다 조카는 ‘사랑해요~쪽’이라고 전화 목소리를 들려준다. 사실 엄마가 시킨 것 같고 형식적인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B씨는 상관하지 않는다. 사랑은 원래 일방적인 거니까. 더 이상 새로운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을 땐 영·유아 교육서적 전집을 사서 보내기도 한다. 조카가 좋아할진 모르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거라 보기 때문이다. B씨는 몇 년 전부터 남몰래 적금을 붓고 있다. 조카 대학 등록금을 준비 중이다. 그럼에도 B씨는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인기 높다는 특정 장난감을 구해주지 못해서다. 근무 중에 나와 장난감을 구하러 다닐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부모가 세운 교육철학·원칙에 악영향 우려도

비혼족은 자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도 혈육에 대한 정은 깊다. 사랑을 조카에게 쏟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비혼족이 늘면 조카에게 물적으로 심적으로 정성을 다하는 ‘조카바보’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들 조카바보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사줘야 하는지,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교육 철학이나 육아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주력한다. 포퓰리즘 정책처럼 조카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해주려 한다. 엄마나 아빠라면 비싸다며 절대 사지 않을 고가 장난감을 늘 구매한다. 교육 차원에서 볼 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엄마가 금지한 테블릿이나 스마트폰도 삼촌이나 이모는 늘 사준다.

안정적인 수입을 가진 비혼족은 기혼자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구매력이 높다. 맞벌이로 수입이 늘어난 부모가 아이에게 신경을 덜 썼다는 죄책감과 보상심리로 값비싼 선물을 사는 것처럼, 비혼족도 조카에게 가능하면 비싸고 좋다는 명품을 골라 안겨주려는 성향을 보인다. 특히 자매 간 경쟁심리를 가진 이모는 최고급 선물로 엄마보다 더 조카에게 인정받으려는 심리까지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구매력이 강한 삼촌과 이모가 유아·아동산업 매출액을 키우는 ‘큰 손’이 되곤 한다.

SK텔레콤이 어린이날을 앞둔 지난 4월 소셜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어린이날 키워드는 ‘조카’로 나타났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서 삼촌과 이모·고모 대상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96%가 ‘조카에게 선물을 사줄 계획’이라고 답했다. 부모보다 조카바보들이 어린이 선물에 관심이 더 크단 의미다. 유아·아동산업 시장은 매년 10%씩 꾸준히 성장해 국내 유아용품 시장 규모는 지난 2009년 1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1조5000억원으로 커졌다. 비슷한 기간 30대 미혼 고객들의 유아동복 매장 방문 횟수는 2010년 평균 4.2회에서 2016년 5.4회로 1.2회 늘어났다. 이에 대해 현대백화점 이혁 마케팅팀장은 “저출산 현상이 이어지면서 고모·삼촌들까지 아이에게 지출을 아끼지 않는 ‘에잇포켓 키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삼촌과 이모·고모의 조카사랑에도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친척에 비해 부모는 아이를 자제시키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가 부모에 대해 철없는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에 대한 상담자로 삼촌이나 이모를 선택하는 의존적인 성향도 키울 수 있다. 또 부모가 오랫동안 꾸준히 만들어놓은 교육기조 등을 친척이 한순간에 허물어뜨리는 악영향도 우려된다. 최양숙 연세대 상담 코칭지원센터 수퍼바이저는 “(조카바보 현상은) 책임감 없이 애정을 쏟을 대상을 찾는 행위라서 대부분 물질공세에 집중하는 편”이라며 “비싼 선물은 삼촌이나 이모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일방적인 애정공세에 불과하니, 그것보다 조카의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호작용에 주력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1342호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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