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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치킨게임] 中 ‘조 단위 투자’ 봇물 한국 아성 위협 

기술력 이미 턱밑까지 추격... 첨단 공장 신·증설로 ‘물량경쟁’ 불가피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중국의 물량 공세에 한국의 수출 효자 상품인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산업이 위협받고 있다.
한국의 IT산업이 막연하게 안고 있던 ‘공중증(恐中症)’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중국이 철강·조선·자동차 등 ‘중후장대(重厚長大)’에 이어 전기·전자·소재 등 ‘경박단소(軽薄短小)’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기술 발전과 양적 팽창을 이루고 있어서다. 중국 기업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을 무기로 생산설비 증설 등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어 앞으로 1~2년 후 피 튀기는 치킨게임을 예고하고 있다. 한재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중국의 기술 수준이 낮을 땐 투자 성과가 3~5년이 지나야 나왔지만 이제는 1~2년으로 짧아졌다”며 “한국·일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중간재도 이젠 내수(중국) 시장에서 조달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등 ‘경박단소’ 분야 괄목상대

‘한국 넘기’를 목표로 뛰고 있는 중국의 반도체 회사들이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반도체 투자 펀드인 ‘푸젠 그랜드 칩 투자펀드(FGC)’는 지난 6월 6억7000만 유로(약 8500억 원)를 들여 독일의 반도체 장비 공급 업체인 ‘아익스트론(Aixtron)’을 매입했다. 칭화홀딩스와 칭화유니그룹은 각각 미국의 반도체 회사 ‘마블 테크놀로지’와 ‘래티스’ 반도체의 지분을 사들였다. 칭화유니그룹은 지난 3월 300억 달러(약 35조 원)를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고, 2020년까지 총 55조원을 들여 세계 3위의 반도체 업체가 되겠단 청사진도 발표했다. 투자액 대부분은 자체 생산라인을 강화하는 데 쓴다는 계획이다. 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와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 간 중국 기업이 밝힌 반도체 공장 투자금액만 약 660억 달러(약 76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세계 최대 규모인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투자액(15조 6000억원)의 5배 수준이다. 세계 1위 반도체 생산국인 한국과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얘기다. 중국의 과감한 투자로 중국 내 장비 업체들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중국의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생산량 증가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 물량전을 치르다 보면 출혈 경쟁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 경쟁에서 탈락한 업체는 몰락하고 살아남는 업체는 시장의 일정 점유율을 차지할 수 있다. 반도체산업의 구조적인 특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2004년과 2008년 벌어진 두 차례 증산 경쟁에서 승리해 살아남았다. 이 과정에서 히타치·엘피다 등 일본 업체는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이번엔 국내 기업이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 셈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이후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릴 만한 새로운 디지털 기기가 나오지 않아 반도체 생산량 증가는 곧 가격 하락으로 이어진다”며 “기술력에선 국내 업체가 크게 앞서지만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와 원가경쟁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만약 앞으로 극단적인 증산 경쟁이 벌어진다면 승부는 출혈을 버틸 수 있는 자금력과 시장의 수요를 꾸준히 이어줄 물량 공급 능력, 품질 경쟁력으로 쌓은 시장의 신뢰가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세계 1, 2위 메모리반도체 회사지만, 중국 경쟁사들의 막대한 물량 공세에 피해는 불가피해 보인다. 여기에 중국 기업은 중앙·지방정부의 반도체 기금으로부터 나오는 약 1조 위안(약 171조원)에 달하는 투자금도 사용할 수 있어 자칫 시장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비해 한국은 반도체 연구·개발(R&D) 정부 예산이 2013년 728억원에서 2014년 599억원, 2015년 561억원, 올해 356억원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XMC 등 중국 반도체 업체의 생산량은 많진 않지만 기술력에서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2018년 중화권에 역전


디스플레이 업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BOE(징둥팡)와 차이나스타(CSOT) 등 업체의 물량 공세가 시장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BOE는 지난해 안후이성 허페이에 도쿄돔 17배 규모의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고, 올해부터 공사에 착공했다. 이 공장은 10.5세대로 한국·일본이 주력하는 7세대 공장보다 앞선 시스템이다. 여기에 투입되는 돈만 20조원에 달한다. BOE는 또 최근 6세대 플렉시블 OLED 투자 계획도 세웠다. CSOT도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시장점유율 확대를 서두르고 있다. CSOT는 새로운 LCD 패널 라인을 만드는 한편, 플렉시블 OLED 생산라인도 추가할 예정이다. 기술면에서 급성장한 중국의 디스플레이 기업의 물량 공세에 한국의 아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한국의 디스플레이 시장점유율은 2018년 37%로 떨어지는 데 비해 중국·대만은 42%로 오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중국의 물량 공세에 따른 단가 하락으로 LG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 등 국내 기업의 영업이익도 대폭 하락할 전망이다. KDB대우증권 관계자는 “삼성·LG 등 국내 업체의 중국 공장이 추가 증설되는 등 양적 성장을 벌이고 있으나,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의 공격적인 증설이 실적 하락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SDI와 LG화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배터리 분야도 중국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중국의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 배터리 업체가 속속 증산 계획을 밝히고 있어서다. 설상가상 중국 전기차 회사들도 한국 기업과의 거래선을 끊고 자국 기업과의 거래를 확대하는 모습이다. 중국 배터리 3위 기업 CATL은 총 300억 위안(약 5조4000억원)을 들여 생산 라인을 추가 확보, 오는 2020년까지 생산능력을 매년 2배씩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CATL의 계획대로라면 2020년 생산량은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생산량(24.8GWh)의 2배인 50GWh에 달하게 된다. CATL 외에 BYD·리셴 등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이 올 상반기 밝힌 투자 계획은 30조~40조 정도로 추산된다. 삼성SDI·LG화학의 올해 투자액 1조~2조원의 최대 20배 규모다. 생산량만 보면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배터리 생산국이다. SNE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배터리 출하량은 61.6GWh로 글로벌 생산량의 74.2%를 차지했다. 중국 정부는 최근 베이징에 ‘국가동력배터리혁신센터’를 설립, 전기차 배터리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배터리 기술력과 규모는 이미 한국·일본을 거의 따라잡았다”며 “전기차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 업체 간 출혈경쟁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344호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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