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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플라자합의 그 후 日 경제는] 엔고 나비효과 ‘잃어버린 30년’ 가능성 

‘반짝’ 엔고 호황에 취해 미래 대비 소홀... 4345조원 들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1985년 플라자합의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G5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자크 드 라로지에르 IMF 총재,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 사진:중앙포토
“채무 등 일본의 모든 경제 문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자합의가 있다.” 일본 역대 총리 중 경제에 가장 밝다는 미야자와 기이치. 1962년 경제기획청부터 2001년 재무부까지 장관만 16번 역임한 그는 일본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진 원인을 1985년 9월 22일 맺은 ‘플라자합의’에서 찾는다. 당시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인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 등 G5 재무장관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자는 취지로 엔화 절상에 합의했다. 냉전 체제 이후 20여년 간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을 돕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1983년부터 채무국 신세로 전락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가 함께 오는 스태그플레이션 징후도 나타나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특히 1336억 달러(85년 기준)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497억 달러(37.2%)의 무역적자를 일으키는 일본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엔화 절상이 시급했다. 물론 일본은 반대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G5 회담을 주도했던 제임스 베이커 미 재무부 장관은 일본 측 대표인 다케시타 노보루 대장성 장관을 상대로 압력과 회유를 거듭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섬유·철강·자동차 등 주요 수출품에서 무역분쟁을 겪고 있었다. 미 의회는 일본을 겨냥해 관세법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베이커 장관은 일본이 엔화 절상 카드를 받으면 미 행정부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약속했다. ‘도널드 레이건은 허수아비, 베이커가 실세’라는 이야기가 미 정가에 퍼질 정도로 그의 힘은 막강했다. 마침 미 상원의 의석 수도 공화당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환율 개입을 문제 삼았다. 당시 일본은 수출 호조에 힘입어 매년 10%대 고도성장을 했다.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는 엔저로 이어지지만 일본은 시장 개입을 통해 하락 압력을 방어했다.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교수는 “일본은 46년 설정된 달러당 360엔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했다”며 “세계에서 일본만큼 외환시장 개입에 적극적인 나라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달러화의 신용 하락과 엔화의 부상으로 한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가 엔화를 국제결제 통화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강한 달러’를 지향하는 레이건 행정부를 자극했다.

무역분쟁·외교관계 악화 우려해 美 제안 수용


다케시타 장관은 주판알을 튀겼다. 일본은 스즈키 젠코 총리가 취임한 이후 미국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방위비 증액과 소련의 원자력 잠수함 정찰에 일본 자위대를 활용하는 문제, 수출 제한 조치…. 더 이상 미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됐다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총리를 노리고 있던 다케시타 장관으로선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기도 했다. 또 미 의회가 준비 중인 법안은 관세를 25% 부과하는 안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엔화 절상 폭이 기껏해야 10~20%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후술한다. 관세안만 철회된다면 그 정도 엔고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이 엔화 절상을 받아들이자 G5는 발 빠르게 환율에 공조 개입했다. 플라자합의가 있기 1주일 전 런던에서 진행한 회담에서 진행안을 만들었다. 당시 회담 내용은 비공개로, 현재 알려진 것은 3쪽짜리 비공식 보고서가 전부다. 당시 G5는 6주동안 180억 달러를 풀어 엔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10~12% 내리기로 했다. 재원 부담은 미국과 일본이 각각 30%, 독일이 25%, 프랑스가 10%, 영국이 5%였다.

회담 직후 240엔이던 엔·달러 환율은 9월 말 218엔이 됐다. 1년 후인 1986년 9월에는 153엔으로 치솟았다. 시장의 누적 수요까지 겹쳐 엔화 가치는 1년 만에 36%나 상승했다. 87년 말엔 120엔 대로 올랐다. 애초 엔화 절상 폭이 15~25%에 그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관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당초 걱정과는 달리 엔고는 일본에 풍요를 선물했다. 엔화 가치가 2배 가까이 오르며 구매력이 배가됐다. 미쓰비시는 1989년 미국의 록펠러 센터를 인수했고, 야스다화재해상보험은 87년 3990만 달러를 주고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사들였다. 일본인들은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났다. 일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여기에 일본중앙은행(BOJ)이 엔고에 따른 경기 둔화를 우려해 정책금리를 2.5%로 내리자 구매력은 더욱 강해졌다. 부동산과 증시가 폭등했다. 니케이는 3년 동안 3배, 부동산값은 한해 70%씩 뛰었다.

그러나 엔고의 축복은 짧았다. 부동산 버블을 우려한 일본 정부가 대출총량규제를 실시하고, 일본중앙은행(BOJ)은 정책 금리를 1989~90년에 걸쳐 3.5%포인트나 올리자 불황이 찾아 왔다. 부동산값은 폭락했고, 금융시장은 얼어붙었다. 80년대 말 3만8000선을 달리던 주가는 10년 후 6000대로 쪼그라들고, 91년 도쿄의 5000만엔짜리 주택은 97년 1500만엔으로 고꾸라졌다. 부동산 담보가치가 줄어들자 은행 대출은 부실채권이 돼 돌아왔다. 금융회사는 연쇄 도산했다. 굴지의 대기업이 자금난에 허덕이다 쓰러졌다. 엔고를 견디지 못한 기업들은 동남아로 떠났다. 대도시와 산업단지가 텅텅 비었다. 수요를 뒷받침해줄 기업이 없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이렇게 시작했다.

플라자합의 이후 31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엔고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 부양과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다. BOJ는 매년 80조엔 규모의 국채와 6조엔 규모의 주가연계증권(ETF)을 매입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 중이다. BOJ가 여태까지 사들인 국채·증권만 한국 1년 예산의 11배 규모인 386조7000억엔(약 4345조원)에 달한다. 마이너스 금리도 도입했다.

‘엔고 망령’ 돈 살포해도 인플레·성장률 둔화

그럼에도 인플레이션율 2% 달성은 2년 연속 실패할 것으로 보이며, 올해 경제성장률도 0.6%(국제통화기금)에 그칠 전망이다. 아베노믹스가 한창 양적완화의 시동을 걸던 2013년 12월 엔·달러 환율은 105.4엔. 지난 2년여 동안 BOJ가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음에도 엔·달러 환율은 100엔대 초로 제자리걸음이다. 외국인 투자금이 과도하게 유입되는 것이 문제다. 버블 붕괴 당시 갈 길 잃은 시중자금은 안전한 일본 국채에 몰렸다. 일본 정부 부채가 대부분 자국에서 소화된 것이다. 이런 면이 외국인 자금을 유인하고 있다.

플라자합의는 인위적 환율 조정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는지 잘 보여준다. 단지 돈을 푸는 것만으로 플라자합의의 저주를 떨쳐낼 수 있다면 일본은 진작에 해결했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환율 개입을 통해 형성된 외환시장의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8개월 후 일본은행이 사들일 국채가 바닥날 것’이라는 우울한 평가도 내린다. 지금은 한국·중국·일본 등 수출 경쟁력을 지키려는 나라들 간에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세계 곳곳에서 근린궁핍화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일본이 세계와 벌이고 있는 환율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1353호 (201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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