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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정글’ 폐쇄로 본 위기의 유럽 난민] 목숨 걸고 왔는데 인신매매·장기밀매 수렁에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분쟁·빈곤·환경재앙이 낳은 참사... 지중해→유럽 난민 47명 중 1명 숨져

▎프랑스 정부가 10월 24일 ‘정글’로 불리는 칼레 난민 캠프 철거를 시작했다. 이곳의 난민 6500여명은 프랑스 전역 300개 난민 시설에 분산 수용된다. 이날 칼레 난민 캠프에서 새 캠프로 이동하는 난민들이 난민 등록을 준비하는 동안 펜스 밖 동료에게 짐을 건네고 있다
영국행 정기 페리가 떠나는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칼레가 새삼스럽게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프랑스 당국은 10월 24일 칼레의 불법 텐트촌인 ‘칼레 정글’에 거주하던 이주자 약 6500명을 전국 각지의 시설로 분산·이동시켰다. 당국은 버스를 동원해 이주자들을 옮겼으며 일부 이주자들은 퇴거 조치에 항의해 텐트촌의 가건물과 텐트 수십 곳에 불을 질렀다. 25일부터는 시설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칼레가 속한 파드칼레도의 파비엔 부치오 도지사는 26일 이주자 이송 작업 완료를 선언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한 구호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은 난민등록 절차를 밟지 못해 이송하지 못한 1000명 이상의 이주자들이 마땅히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과거 텐트촌이 있던 자리 주변을 배회하며 노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중에는 아이들도 3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모를 동반하지 않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난민등록 절차를 거부해 이송에서 빠졌다. 이번 사건으로 칼레는 새삼 유럽 난민 문제를 상징하는 도시로 떠올랐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난민을 그냥 두면 안전·치안·위생·주거복지 등에서 문제가 생기고 원래 거주하던 주민이 불편을 겪어야 하고, 이들을 옮기면 옮겼다고 비난을 받는 묘한 상황이다.

칼레의 불법 텐트촌 ‘칼레 정글’ 폐쇄

칼레 정글에 사는 난민들은 크게 두 부류다. 영국 BBC에 따르면 망명을 신청했지만 아직 법적인 절차를 마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이주자’로 통칭한다. 여기에는 시리아를 비롯해 전쟁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탈출해 ‘난민’ 신분을 얻을 가능성이 큰 사람과 일자리와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해 유럽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경제적 난민’이 모두 포함된다. 프랑스 정부는 이주자들을 전국 450개 이상의 임시 거처로 이주시켰다. 이주자들은 새 거주지에서 망명 신청을 하면서 3~6개월 간 머무를 수 있다.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일자리도 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청이 반려되면 추방될 수 있다. 이에 따라 BBC를 비롯한 글로벌 미디어는 이주민 텐트촌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중립적 용어인 ‘이주자’로 불러주기를 바란다. 이주자 문제로 유럽이 가치관에서 얼마나 혼란을 겪으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칼레 정글’의 기원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레 항구 주변에 작은 마을 상가트가 있다. 당시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불법 이주하려는 이주자들이 아늑한 이 마을로 몰려와 노숙을 하기 시작했다. 이주자들이 이곳에 몰려든 이유는 영국으로 불법 입국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곳에 머물며 항구를 떠나는 페리에 올라 밀항하거나 페리로 들어가는 트럭에 몰래 숨어 바다를 건너가는 시도를 반복했다. 프랑스에 비해 영국의 경제 사정이 나아 비숙련자도 취업이 쉬운 일자리가 비교적 많고 다문화 정책으로 이주자가 쉽게 정착할 수 있는데다 극우정당의 세력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주자들은 중동·아프리카의 거의 전 지역에서 이곳으로 몰렸다. 처음에는 모로코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고 스페인을 거치는 노선이 인기였다. 나중에 중동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치안 공백 상태가 된 리비아를 거쳐 이탈리아 해변으로 상륙하는 노선으로 이주자들이 몰렸다. 중동에선 터키와 그리스를 거친 후 아드리아해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거나 발칸반도를 관통해 독일로 가는 노선에 이주자들이 몰렸다. 시리아 등에서 전란을 피해 온 사람과 돈을 벌려고 유럽으로 건너가는 경제 난민이 서로 뒤섞였다. 심지어 파키스탄·이란 등에서 온 사람들도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시리아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기 일쑤였다. 난민들은 서로 신분이 알려지기를 꺼려 텐트촌에서는 서로 이름만 알려줄 뿐 성은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자 프랑스 적십자사는 이곳에 구호시설을 마련하고 이주자들을 도왔다. 문제는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이주자들이 이곳에 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하도 많이 몰려 동네 주민들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였다.

상가트는 이주자들로부터 발음이 비슷한 ‘상 게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프랑스어로 ‘~이 없는’이라는 뜻의 ‘상(sans)’과 영어로 ‘문’이라는 의미의 ‘게이트(gate)’를 합성한 조어다. ‘문이 없는’ 또는 ‘출구가 없는’이라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텐트와 가건물에 몰려 살다 보니 주변 지역은 심하게 슬럼화했다.

2001년에는 물론 2002년에도 이곳에서는 이주자들이 난동까지 벌였다. 처음에는 관용하던 시민들도 차츰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불법 입국을 시도하다 교통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는 이주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에 따라 세계 매스컴의 눈길이 이 도시로 쏠리기 시작했으며, 칼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져갔다. 시민들은 이주자를 도시에서 내보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이곳의 구호시설은 결국 2002년 11월 철거됐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당시 내무장관이던 니콜라 사르코지였다. 사르코지는 이런 단호한 조치를 펴면서 우파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까지 오르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 정치에서 이주자 대책이 차지하는 정치적인 위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치적 난민과 경제적 난민 섞여

이곳에서 밀려난 이주자들은 근처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에 거대한 이주자 텐트촌이 생겼다. 이주자들은 이곳을 정글이라고 불렀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 프랑스 비정부 기구인 ‘이주자연대’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이 사용하는 파슈툰어로 ‘숲’을 가리키는 ‘장갈’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정글로 오독된 것으로 본다. 일부에서는 시설이 열악하고 삶의 조건이 형편없어 정글로 불리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이주자 캠프촌인 정글에 대한 소탕작전을 수시로 전개했다. 2009년 4월 이곳을 습격해 190명을 체포하고 텐트를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자 이곳에 다시 새로운 텐트촌이 생겼다. 프랑스 당국은 2009년 9월 새벽에 이곳을 불시 습격해 700~800명이 거주하던 텐트촌을 폐쇄하고 276명을 억류했다.

2014년 9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추산에 따르면 칼레에는 주로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 소말리아와 중동의 시리아에서 온 1300명의 이주자가 거주했다. 하지만 이 신문은 2015년 7월 거주 이주자의 숫자가 3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도했다. 2015년 11월에는 이 숫자가 6000여 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2016년 2월 영국 BBC방송은 “이곳 텐트촌에 사는 전체 이주자의 숫자는 혼란스럽다. 칼레 시당국은 3700명이라고 하고, 구호단체인 ‘난민을 돕자’는 5497명이라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글 소탕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정글을 떠난 이주자들이 새로 옮긴 지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에선 반이민 켐페인을 벌이는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주자 몰리면 또 다른 텐트촌 생길 수도


▎스위스 바젤미술관 중앙의 정원에 있는 로뎅의 ‘칼레의 시민’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마침 칼레 정글 소탕작전이 시작된 지 이틀 후인 26일 유엔난민기구는 중요한 통계를 내놨다. 올해 1년 간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던 이주민 중 3800명이 선박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역대 최고라는 통계다. 난민 47명 중 한 명꼴로 숨진다는 분석이다. 지난해에는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유럽으로 건너갔지만 사망자 발생 비율은 269명 중 한 명꼴이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1~12월 지중해를 건너다 숨진 사람이 3771명에 이르러 올해는 이를 넘기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2016년은 이주자들에게 사상 최악의 의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형 목선이나 고무보트에 정원의 몇 배나 되는 사람을 빽빽하게 태우고 지중해를 건너다 보니 사망자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시리아·리비아·이라크 등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럽으로 옮긴 이주자만 31만7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그중 절반 정도는 리비아 등지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를 건너 이탈리아·그리스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수록 커지는 위험 속에서도 줄이어 지중해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 들어와 정착하기도 쉽지 않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특히 아프리카 이주자는 70% 이상이 인신매매·장기밀매 등 착취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10월 18일 보도했다.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가 10개월에 걸쳐 9000명 이상의 이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온 아프리카 이주자의 4분의 3 정도가 인신매매 등 범죄조직으로부터 착취를 경험했다. 이들 중 49%는 강제로 특정 장소에 억류당하거나 인질이 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치안이 불안한 리비아에선 이런 일이 특히 잦다고 한다. 일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절반에 이르는데 고용주나 중개인들로부터 무기 등으로 위협 당한 사람도 상당수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강제노동에 종사한 이유로 인질 상태에서 벗어나 난민 보트에 올라탈 자리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 강제노동이었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심지어 이주자 상대의 불법 장기매매도 벌어지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응답자의 6%가 억류된 동안 강제 헌혈이나 장기매매를 했다고 답했다. 1.5%정도의 응답자는 돈을 줄 테니 결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상황이 이러니 칼레 정글의 폐쇄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다시 이주자가 몰려 텐트를 치고 거대한 텐트촌이 생겨 사회 문제가 생기면 다시 철거에 나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영국은 그들에게 꿈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건이 벌어진 칼레는 작은 도시다. 교외를 포함하면 12만 5000명, 시내에는 7만3000명 정도가 거주하는 중소도시다. 이 도시의 중요성은 항구에 있다. 칼레는 영불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의 항구도시 도버와 직선거리로 겨우 34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대륙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바다 건너 영국의 ‘도버의 하얀 절벽’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다. 이에 따라 매년 이 도시는 1000만 명이 방문하는 교통의 요지가 됐다. 대부분 영국과 유럽대륙을 오가는 관광객·사업가·트럭 기사다. 1994년 영불해협의 해저를 지나는 해협터널이 개통돼 영국과 프랑스가 철도로 이어질 때도 프랑스 측 입구는 칼레에서 가까운 코켈로 정해졌다. 영국 측 출구도 도버에서 멀지 않은 포크스톤으로 잡혔다. 런던과 파리를 2시간30분 만에 연결하는 유로스타 철도(자동차도 실을 수 있다)의 개통에도 칼레의 경제적·전략적 가치는 변치 않고 있다.

칼레는 역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전개하면 반드시 칼레 연안으로 올 것으로 짐작해 이곳에 거대한 상륙 차단시설을 설치하고 전담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다. 이곳을 중심으로 설치된 거대한 방어시설을 ‘대서양 방벽’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군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독일의 명장 에르빈 롬멜이 이곳에서 방어사령관을 맡았을 정도다. 하지만 연합군은 1944년 6월6일 조건이 더욱 불리한 노르망디로 상륙해 히틀러의 허를 찔렀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1805년 영국 침공을 준비하면서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고 머물렀다.

칼레는 역사적으로 1347년부터 1558년까지 200년 이상 잉글랜드의 영토이기도 했다. 영국 영토가 되던 당시 중요한 일화가 하나 전해온다. 1347년 이곳을 점령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끈질긴 방어로 1년 이상 자신을 괴롭혔던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려다 항복조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바꿨다. 그는 칼레 시민들이 대표 6명을 뽑아오면 이들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6명을 어떻게 뽑을지 시민들이 고민에 빠지자 부유층인 외스타슈 드생 피에르를 포함한 칼레의 상류층과 고위 관료 등 6명이 고난을 자청했다.

칼레 시민의 남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

이들은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메고 자루옷을 입고 죽음의 길에 나섰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1889년 작품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일화와 조각상은 돈과 명예, 권력을 지닌 사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가진 자의 도덕성 의무’를 상장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통한다. 이 6명도 당시 임신 중이던 에드워드 3세의 왕비 필리파에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살려줬다. 비극이 될 뻔한 ‘칼레의 시민’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이다.

이주자 문제도 부자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하면 풀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봉사단체나 국제기구가 적지 않다. 이주자 문제는 테러와 함께 국제사회가 맞닥뜨린 거대한 글로벌 과제다.

1358호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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