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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본 조선의 비선 실세] 명성황후 홀린 무당(진령군), 인사까지 좌우 

 

김준태 역사칼럼니스트
숱한 후궁·내관·종친도 호가호위 … 군주가 흔들리면 나라도 흔들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623년 3월,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반정 군은 상궁 김개시(金介屎)를 베었다(광해15.3.13). 반정을 일으킨 첫날 시급히 일개 상궁 한 사람을 죽이고 그 사실을 단일 기사로 실록에 기재해 놓은 이유는 김개시가 요즘 말로 광해군 정권의 ‘비선 실세’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개시는 선조의 사랑을 받았던 궁인으로 후계자 자리가 위태롭던 광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야사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약으로 선조를 시해하는 참변이 김개시의 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요컨대 광해군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세를 진 인물인 것이다. 실록에는 광해군 대의 실권자 이이첨과 김개시의 공통점을 설명하는 글도 실려 있는데(광해5.8.11), 두 사람 모두 계략에 뛰어났고 입으로는 항상 명분을 말하며 정적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달랐다는 대목도 있다. 인조반정 세력이 기록한 글이니 내용을 전부 믿을 것은 없겠으나 김개시가 이이첨에 필적하는 정권의 실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이첨에 필적한 상궁 김개시

그런데 실록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이첨은 부원군이라는 정1품 작호에 판서 등 고위직을 맡고 있었고 집권정파인 대북의 영수였다. 이에 비해 김개시는 궁궐 안 상궁에 불과했다. 어찌됐건 이이첨이 국정의 공식적인 루트에 자리해 있고 직위 또한 충분히 권력을 가질 만했다면 김개시는 비공식적인 위치, 더구나 자격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비선 실세’였던 것이다.

물론 이 ‘비선 실세’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는 없던 표현이다. 다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대로 공식적인 경로에 있지 않으면서(‘비선’) 자신의 위치와 자격을 넘어서는 권력을 행사한 사람(‘실세’)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이들은 배후에서 국정을 농단하고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했다. 권세와 이익을 탐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들에 의해 국가 조직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인사는 공정함을 잃었다. 더욱이 이 과정이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들은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권세가들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나라에 끼치게 된다. 권세가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언행이 쉽게 드러나고 여기에 대한 견제와 비판도 작동할 수 있지만 비선 실세가 저지르는 잘못은 심각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비선 실세 중 우선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은 정난정(鄭蘭貞)이다. 명종의 외숙부 윤원형의 첩이던 그녀는 본처를 독살하고 마침내는 정경부인의 작호까지 받았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각별한 후원을 받으며 이권 사업에 매달렸는데 정치 공작에도 능해 을사사화 등에 개입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10). 그러다가 문정왕후가 죽고 남편인 윤원형도 몰락하면서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명종20.11.3).

후궁이나 종친이 비선 실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임금을 제외한 왕실의 일원들은 정치 개입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고 임금에게 영향을 끼치기 쉬운 만큼 ‘그림자 권력’이 될 가능성도 상존했다. 인조 때 귀인 조씨, 영조 때 숙의 문씨 등이 대표적이다. 임금의 총애를 기화로 정사에 개입하고 조정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나갔던 이들은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욕심을 내다가 몰락하게 된다.

‘삼복(三福)’이라 불렸던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 삼형제는 인조의 적손(嫡孫)으로 각각 큰아버지인 효종, 사촌형인 현종, 종질인 숙종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 비선 실세로 떠올랐다. 특히 현종은 ‘복창군 형제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할’(현종대왕행장) 정도였는데 이로 인해 이들에게 청탁과 뇌물이 집중되게 된다. 하지만 삼복은 자제할 줄 모르고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정쟁에 얽혀 사사됐다.

이후 조선 말엽, 비선 실세의 정점을 찍는 인물이 나타난다. 요즘 세간에 많이 거론되고 있는 진령군(眞靈君)이다. 본명이 박창렬인 진령군은 고종 때 활동했던 무당으로 명성황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오군란 당시 진령군은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가 환궁하는 시기를 예언한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명성황후가 그녀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깊이 믿고 의지했는데 두 사람은 날로 친숙하게 되었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禍福)이 걸려 수령과 변장(邊將, 지방의 군사지휘관)의 자리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아부해 수양아들로 삼아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매천야록(梅泉野錄)]1). 고종도 점차 진령군에게 빠져들었는데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다는 죄를 받았지만 고종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종31.7.5).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명성황후와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진령군의 신통력은 자신들과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됐고 고종은 망국의 군주가 됐다. 위기와 직면해 주술과 예언에서 길을 찾으려 한 것은 해결이 아닌 도피다. 더욱이 그것으로 국정의 향방을 결정하려한 것은 국가의 공적 기능을 마비시킨 중대한 패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 총애한 궁인의 사소한 청탁 거절

이들 외에도 조선에는 시대라는 옷을 달리 입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많은 비선 실세들이 있었다. 후궁·내관·종친이 왕의 그림자가 되어 국정에 개입했고, 권세가의 아내와 아들 등이 사사로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순간 아첨꾼들이 들끓게 되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횡행하게 된다. 국가의 중요한 일이 투명하고 공개적인 절차가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되면서 나랏일의 권위와 신뢰는 상실된다. 국가시스템은 무너지고 공직자는 의욕을 잃는다. 더구나 이들이 다루는 일은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비선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권력. 바로 비선 실세의 특징이고 나라를 망치는 출발점이다. 보통 수준 이상의 군주라면 설령 임금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나 실세가 있었을지언정 ‘비선’만큼은 결코 두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닌 것이다.

무릇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궁극적인 책임은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에게 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격도 없는 힘을 남용하도록 방치한 것은 다름 아닌 호랑이이고 군주인 것이다(공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 그 정사에 손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옛날 세종대왕은 자신의 사랑을 흠뻑 받던 궁인이 사소한 일을 청탁하자 곧바로 내치며 이렇게 말했다. “감히 나랏일과 관련된 것을 간청하다니 이는 내가 사랑을 보여서 그런 것이다.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니 자라면 어떠할 것인가가 짐작된다.”(연려실기술3). 국가를 다스리고 온 백성을 보듬어야 하는 군주에게 개인의 영역이란 없다. 조금의 사사로움도 있어서는 안 된다. 군주에게는 철저할 정도로 엄격하고 투명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 그것이 흔들릴 경우에는 나라도 흔들린다는 것, 이것이 역사가 주는 가르침이자 오늘의 최순실 게이트가 주는 교훈이다.

1359호 (201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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