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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호칭 파괴’의 허와 실] “홍길동님, 까라면 까세요” 

 

함승민 기자 sham@joonang.co.kr
‘~님’ 또는 영어명·닉네임 부르는 기업 늘어... 호칭 하나로 서열 문화 안 바뀌어 회의론도

▎지난해 3월 경기도 수원시 디지털시티에서 열린 ‘스타트업 삼성 컬처 혁신 선포식’에 참석한 삼성전자 임원들이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을 약속하는 ‘핸드 프린팅’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부장님’ ‘과장님’ ‘대리님’ 등 전통적인 호칭이 사라진다. 지난 2월 10일 삼성그룹은 기존의 직급체계를 단순화하고, 직원 간 호칭을 ‘OOO(이름)님’이라고 하는 내용의 인사제도 개편안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면 포스코는 없앴던 직급 호칭을 6년 만에 부활시켰다. 2011년 7월 이후 ‘매니저’ ‘시니어매니저’ 등의 호칭을 사용해왔지만, 올 초 조직개편과 함께 직원 간 호칭을 ‘사원-대리-과장-차장’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기업들 사이에서 ‘호칭 파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기존 호칭을 없애는 것은 경직된 구조를 탈피하고 수평적 기업문화를 이식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과 함께, 형식적인 방법으로는 기업문화의 뿌리가 바뀌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확산


올해 호칭 파괴의 운을 뗀 건 삼성그룹이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고 부서 내에서는 업무 성격에 따라 ‘님’ ‘프로’ ‘선후배님’이나 영어 이름 같은 수평적인 호칭을 자율적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다만 팀장·그룹장·파트장·임원은 직책으로 호칭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정확한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미뤄지고 있는 인사가 마무리 되는대로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삼성그룹의 전 계열사가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회사마다 상황에 맞게 자율적으로 시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재 삼성 계열사 가운데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제일기획 직원들이 서로를 ‘프로’로 부르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담당’으로 호칭을 바꾼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국내 기업들에게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호칭 파괴가 빠르게 다른 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호칭 파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대기업 가운데 CJ가 가장 먼저 도입했다. 지난 2000년부터 직급 호칭을 없애고 상급자나 하급자 구분없이 ‘님’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은 2002년부터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고, SK텔레콤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매니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몇몇 기업은 직급체계를 ‘선임(사원·대리급)-책임(과장·차장급)-수석(부장)’ 등으로 단순화하면서 덩달아 호칭을 변경하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IT기업 중심으로 직급 호칭 탈피가 늘었다. 스타트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미국 실리콘밸리 문화를 접목해 직급과 무관한 호칭을 사용하면서다. 네이버는 임원은 ‘이사’, 나머지는 이름에 ‘님’ 또는 ‘매니저’로 부른다. 쿠팡은 각자 지은 닉네임에 ‘님’을 붙인다. 카카오는 아예 영어 이름만 사용한다. 김범석 쿠팡 대표를 ‘범님’, 임지훈 카카오 대표를 ‘지미(jimmy)’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들 중에서도 대외 업무가 많은 부서에서는 상대방의 편의를 위해 예외적으로 ‘과장’ ‘부장’ 등 기존 호칭을 혼용하기도 한다.

기업들이 호칭에 변화를 주는 것은 구조적 저성장을 벗어날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혁신이나 성장엔진을 찾으려면 창의성이 중요한데, 수직적인 문화 때문에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전통적인 경영 방식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평적 조직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2000년대 이후 이와 관련된 사례가 경영계에 이슈가 되면서 관심이 커졌다.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이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한 1997년 대한항공 비행기 사고가 대표적이다. 사고 과정에서 기장이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도 부기장이 이를 지적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해보니 연공 서열과 존칭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 훈련 시간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와 패거리 문화를 깨기 위해 존칭과 경어를 금지한 사례도 있다.

옛 호칭 체계로 되돌린 기업도 많아

달라진 채용 방식도 배경이다. 기존의 직급 호칭은 공채에 맞는 방식이다. 공채 문화에서는 입사 순서와 그에 따른 직급이 그 사람의 지위와 역할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업의 공채는 축소되고 있다. 대신 경력직, 직무 위주 채용 비중이 커졌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업무 간 경계도 낮아져 공채만을 기준으로 새로 영입한 직원의 상하 관계를 규정하고 평가하기 까다로워졌다”고 말했다. 한국경영교육학회의 ‘직급체계 개편의 문제점과 대응방안에 대한 연구’ 보고서는 “기업 조직이 바뀌면서 단순 역할만 구분하는 수평적 구조와 수직적 다단계 직급 체계가 서로 부딪치는 현상이 발생하고, 직무의 난이도에 따른 가치와 연공서열 중심의 직급체계가 충돌하면서 개편 논의가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호칭 파괴에 대해 회의적으로 본다. 오랜 기간에 걸쳐 굳어진 수직적 구조가 호칭 하나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지적이다. 호칭을 변경한 모 대기업 직원 강병수(45·가명 씨는 “예컨대 홍길동 부장님 눈치를 보느냐, ‘홍길동님’ 눈치를 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며 “상명하복의 의사결정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호칭은 바뀌어도 임금·승진과 직결되는 직급체계는 그대로 운영되는 점도 걸림돌이다.

도입 과정에서의 문화적 저항감도 크다. 홍민표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과 한국의 직장 호칭의 근원은 비슷하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중존칭(직급 뒤에 추가로 ‘님’을 붙이는 것)이 있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서로의 직급을 부른다”며 “직무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신분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확장된 측면이 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평적 조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조직 특성에 따라, 특히 효율성이 중요한 제조업의 경우 수직적 구조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다.

실제 여러 이유로 호칭 파괴를 시행했다가 다시 되돌린 기업들도 있다. 한화그룹은 사원에 ‘씨’, 대리에서 차장까지는 ‘매니저’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기존의 직위체계를 부활시켰다. KT 역시 2012년 ‘매니저’로 호칭을 통일했지만 시행 4년 6개월 만에 직위체계에 따른 호칭으로 되돌렸다. 가장 최근에는 포스코가 기존 호칭 체계로 돌아왔다. KT 관계자는 “업무의 권한 명확화와 직원 동기부여 차원에서 직급 체계를 변경했다”고 말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내·외부에서 기존의 호칭이 통용되고 있어 편의를 위해 호칭을 다시 변경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수평적 구조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는 “호칭 변화는 상징은 될 수 있지만 낮은 수준의 혁신에 불과하다”며 “실제 조직 수평화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창조적인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고 평가·보상하는가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374호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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