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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반퇴의 정석(43)] 노후 행복의 보증수표 악기를 배워라 

 

김동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dongho@joongang.co.kr
정신 건강은 물론 치매 예방에도 좋아... 인적 관계 넓어지고 신체 활력 유지에도 도움

▎지난해 말, 평균 71세의 노원구립 실버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서울에서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46)씨는 토요일마다 플루트 레슨을 받는다. 플루트 전공 대학생이 자택을 방문한다.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느라 거의 연습을 못하지만 레슨만 받아도 연주 솜씨가 달라진다. 레슨 시간은 한 번에 50분이다. 처음에는 10분만 불어도 기진맥진했는데 이제는 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 될 만큼 익숙해졌다.

그가 플루트를 배우게 된 건 노후 대비 차원이다. 딸 아이가 중학생 때 불던 플루트가 집 안에 굴러다니는 걸 보고 저걸 배워두면 노후에 심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딸이 연주할 때 어깨 넘어 곁눈질로 운지법을 배우고 딸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플루트는 다른 목관악기와 달리 입에 물고 바람을 불어 넣는 리드(Reed)가 없어서다. 그냥 풀 피리처럼 대롱에 뚫린 구멍에 바람을 넣어 소리를 내는 것이라 초보자는 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러나 김씨는 레슨 6개월 만에 간단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음표조차 읽지 못해 ‘악보 문맹’이었던 그가 반년 만에 이렇게 된 비결은 역시 레슨의 힘이 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다시 확인시켜주는 결과다. 악기도 돈을 들이면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보에는 많은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런데 문자가 아니라서 전문가의 ‘해독’이 없으면 알 길이 없다. 음표를 보는 순간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지만 플루트만 해도 타이·슬러·텅잉 같은 기법도 알아야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춘 소리를 낼 수 있다. 김 씨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궁금한 점들이 많아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봤다.

Q. 레슨은 누구에게 소개를 받나. 어떻게 레슨 선생님을 구할 수 있나.

A. (웃으며)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인터넷에 들어가면 차고 넘칠 만큼 정보가 많다. 이제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보니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다. 이들을 전문적으로 연결해주는 인터넷 중개업자도 많다. 대형 소개업체는 누적회원 15만 명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을 포함해 현재 인터넷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소개업체는 수없이 많다.

Q. 강사들은 믿을 만한가.

A. 강사는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연령대에 맞춰도 되고 성별을 고를 수도 있다. 20대 강사부터 중년 강사까지 다양하다.

Q. 가능한 악기는 무엇인가.

A. 배우고자 하는 악기는 거의 다 된다고 보면 된다.

Q. 악기라면 과거에는 통기타 정도였는데, 관악기 같은 것들은 레슨비가 궁금하다.

A. 이용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각만큼 부담이 크지는 않다. 플루트와 피아노처럼 강사가 많은 쪽은 한 번에 3만원이 일반적이다. 한 달 4주를 기준으로 12만원이란 얘기다. 전공자가 많지 않거나 희귀한 악기일수록 비싸다. 플루트는 3만원이지만, 오보에는 7만원을 받는 식이다.

Q. 악기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A. 기타는 20만원 정도면 초급자가 쓸만한 걸 살 수 있다. 명품 일렉트릭 기타는 수백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관악기도 보급형 국산은 20만원도 안 하지만, 명품 외제는 초급자용도 수십만원, 100만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10억원이라고 하질 않나. 초보자는 보급형으로 시작하면 문제가 없다. 갈수록 악기 욕심이 나겠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게 중요하다.

이같이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 악기를 배우면 좋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나긴 노후를 보내려면 인적 관계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기나긴 세월, 혼자 보내는 시간도 많은데 이때 혼자 행복하게 놀려면 악기 하나 정도를 익혀 두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악기를 하면 집중이 잘 되니 정신 건강에도 좋다. 음표를 빨리 읽어야 하고 연주 기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 것이 전공자들의 설명이다. 악기 하는 사람 치고 치매가 잘 걸리지 않는다니 말이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평소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클래식도 이해하게 되고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악기를 연주할 공간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음주 문화가 개선되면서 서울 강남 바에 가면 기타를 칠 수 있는 곳은 드물지 않고, 피아노와 드럼, 색소폰,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악기 연주로 노후 행복을 예약해둔 사람들 얘기를 더 들어보자. 전북 전주시에 살고 있는 박모(54)씨는 주변 여성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린다. 그의 방은 웬만한 가수 부럽지 않은 음악 장비를 갖추고 있다. 고성능 소형 앰프에 보면대를 갖추고, 기타는 통기타와 일렉트릭을 모두 갖고 있다.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그의 집을 방문해 레슨을 받는다. 실력이 빨리 늘지는 않지만 그냥 음악 이야기가 좋다는 것이 수강생들의 반응이다. 취미 활동으로 하다 보니 따로 레슨비는 없다. 그저 음악을 이야기하고 노닥거리는 것만으로 좋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그는 음악이 있으니 나이가 들어서도 다양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게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최모(55)씨는 최근 피아노를 시작했다. 그는 “음악이라면 역시 피아노라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다시 시작하게 됐다”며 “너무 재미있어 새벽 1시까지 피아노를 치는 날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웃사람들은 그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어폰을 끼고 치는 피아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기 배우려면 50대가 골든타임

백세시대에는 악기와 음악도 노후생활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악기를 하려면 50대가 골든타임이다. 환갑이 지나면 손이 굳어지고 악보를 읽는 속도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공자나 전문가만 한다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 그 순간 악기와 음악을 친구로 얻게 된다. 취미가 소일거리로 발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인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연주할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노인복지센터는 물론이고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 공연의 수요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런 자리는 전문가보다는 봉사활동 차원에서 아마추어가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약간의 봉사료를 받고 노인들에게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 자리에 앉아서 감상하는 노인이 되는 것도 좋지만, 그 앞에서 서서 연주를 하게 된다면 더 보람찬 노후생활이 될 것이다.

건강에도 좋다. 주말에 한강변에 나가보면 여기저기서 악기 연주 소리가 들린다. 50대 중년은 통기타를 집단 연주하고, 60대 이상은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이런 자리에 나가 연주하는 것만으로 소일거리가 되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악기 연주가 단순히 악기를 다루는 데 끝나지 않고 정신 건강은 물론이고 왕성한 취미 활동으로 신체적 활력까지 유지하게 해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여가활동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다(dongho@joongang.co.kr).

1380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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