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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9) 재벌의 자신감] 재벌은 '군맹무상群盲撫象(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다)' 정부는 '화호유구畵虎類狗(호랑이 그리려다 개를 그리다)'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woojinb@hanwha.com
실력 과신한 재벌, 세계 일류 환상에 빠져... 정부는 세계화 미명 속에 재벌 밀어주다 국가 부도 직면

▎1996년 9월 17일 전경련 회장단이 한승수 부총리와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95년 6월 3일자에 한국 특집 기사를 실었다. 다음은 그 기사의 도입부다.

‘공장 방문은 끝났다. 맥주가 잔에 채워진다. 두 시간 동안 질문하느라 지친 기자는 더 이상 물어볼 게 없다. 침묵이 흐른다. 그러자 이 한국인 공장장은 자신이 무언가 물어볼 차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국인 기자에게 묻는다. 이번 세기가 바뀌면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리라는 것을 믿느냐고. 깜짝 놀라게 하는 질문이다. 이는 폴란드가 5년 안에 독일을 추월할 것 같으냐는 물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장장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일본은 따라잡을 겁니다.” 그는 선언한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이코노미스트 기자는 “한국인들은 짧은 시일에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을 근거로 자신들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설명했다. 그 공장장의 확신에 찬 예상은 1990년대 중반 한국 재벌 전반에 팽배한 자신감을 대변한 것이었다. 한국 재벌은 한국 경제 성장의 공이 온전히 기업인의 실력 덕분이라고 자평했다. 한국 기업과 산업은 세계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반면 행정과 정치가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 기업과 산업은 족쇄만 풀린다면 세계 일류로 바로 진입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한국 경제의 권력, 재벌로 이동


▎1990년대 초중반 국내 재벌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왼쪽부터 김우중 대우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구자경 LG 회장.
재벌이 한목소리로 요구한 것은 자본시장 자유화였다. 국내 금리가 너무 높으니 해외자본을 자유롭게 빌려 쓰게끔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정부가 내건 국정 기조인 ‘세계화’에서 명분을 얻었다. 세계화 시대에 자본의 국적을 따질 수 없다는 논리가 득세했다. 빗장이 풀리자 재벌은 외채를 잔뜩 짊어졌다. 금융회사가 들여온 외채도 상당 부분 기업에 흘러갔다. 그렇지 않아도 과중한 부채에 더해진 외채는 재벌의 상환 능력을 한참 초과한 것이었다. 외채는 결국 한국 기업부문과 금융부문의 뇌관이 됐고 한국 경제를 대외균형으로부터 탈선시켰다.

재벌의 자신감과 논리는 책 [한국 경제의 권력이동]에 담겼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공병호 연구위원이 1995년에 써낸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재벌이 한국경제호의 키를 잡아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필연론을 폈다. 그는 우선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정부의 현명한 경제개발계획 덕분이 아니었으며, 재벌이라는 이름 아래 따가운 눈총을 받아온 소유기업가들에 힘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경제의 심장은 기업과 기업가이고 따라서 기업과 기업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부단한 성장을 거듭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 경제의 권력은 이미 대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 성장사는 정치의 힘과 시장의 힘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점진적으로 정치의 힘이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의 힘에 의해 대체되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논거를 댔다.

그는 정치권력이 시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론도 자신의 궤변을 뒷받침하는 데 갖다 붙였다. 그는 ‘시장은 아무리 좋은 컴퓨터라 하더라도 다 기억시켜 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의사결정이 오가면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하이에크의 한정적으로만 유효한 설명을 덧붙였다. 자율에 상응하는 보상과 책임이 따르는 시장의 규율이 없는 한국의 시스템에서 자율만이 중요하다고 외친 것이다. 시장의 규율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는 방종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재벌 총수들의 발언은 이보다 직설적이었다. 최종현 전경련 회장은 1995년 2월 제22대 회장으로 재추대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문어발을 하든 소유집중을 하든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현 경기는 과열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책이 필요 없다”며 거시경제 정책에도 훈수를 뒀다. 최 회장의 바통을 넘겨받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정부 때리기’에 나섰다. 이 회장은 같은 해 4월 이른바 ‘북경발언’을 통해 “우리의 정치인은 4류 수준, 관료행정은 3류 수준, 기업은 2류 수준”이라고 평가하면서 행정부와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 주도로 성장한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지분’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정부 당국이 발끈했다. 정부 당국은 주도권을 요구한 총수의 기업에 대해 손보기에 들어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종현 회장의 선경(현 SK)그룹 계열사에 대해 부당내부거래와 하도급 조사를 벌였다. 국세청은 선경건설에 대해 세무조사를 했다. 삼성그룹은 저리의 산업은행 설비자금 대출에서 거의 제외됐다. 삼성전자의 미국 컴퓨터 회사 AST 지분 인수건은 4개월을 기다려서야 해외투자심의위원회를 통과했다.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공장 건설도 지연됐다.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공장 건립 계획은 1995년 1월 일본경제신문 보도로 알려졌지만 삼성은 이후 7개월 동안 계획을 구체화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재벌의 비전과 전략 채택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재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93년 7월 2일 김 전 대통령이 재계 인사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식사를 하고 있다.
설화(舌禍)에서 비롯된 긴장은 그러나 정부 당국과 개별 재벌과의 사이에서 일시적으로만 지속됐다. 김영삼(YS) 정부는 집권기간 내내 재벌 전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꾀했다. YS는 재벌 전반에 대한 생각을 1995년 3월 유럽 순방에 수행한 기업인들과의 만찬에서 들려줬다. 그는 “선진국일수록 기업 간의 경제 협력에 정부가 더 관심이 많고 정부와 기업 간의 협력을 중시한다”며 “앞으로 기업과 정부가 협력해서 무역을 늘리고 선진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그는 유럽에서 귀국한 뒤에는 경제 5단체장을 만나 오찬을 들면서 ‘경제 제일, 기업 우선’을 강조했다.

재벌 회장의 발언과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신경전에 해당했다. 실질적인 부분에서는 김영삼 정부 초기부터 재벌이 정부를 이끌었다. 철학이 부족했던 김영삼 정부는 비전과 전략을 재벌로부터 빌렸다. 세계화, 규제완화, 요소비용 절감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비전과 전략은 모두 재벌의 것이었다. YS가 “이젠 세계화다”라고 하자 재벌은 “세계화는 내가 잘 안다”며 지적인 우위를 주장했고, YS는 이를 인정했다. YS는 재벌의 캐치프레이즈를 키워드로 채택하기도 했다. ‘세계경영’은 대우의 것이었고, ‘세계일류’는 삼성의 것을 따왔다.

김영삼 정부는 아예 재벌로부터 배우기를 자원했다. 공무원들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 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민주자유당이 앞장을 섰다. 민자당은 1994년 1월 중앙당 사무처 요원 등 850명을 삼성그룹에 위탁 교육시켰다. 이건희 회장은 같은 해 3월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전국 도지사, 시장, 군수 등 내무공무원 300여 명을 대상으로 ‘21세기를 향한 변화의 방향’을 주제로 특강했다. 경제기획원, 재무부 등의 공무원 350명은 같은 달 구자경 회장에게서 럭키금성의 교육기관인 인화원에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업의 혁신노력’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들었다.

물론 정부가 이와 같은 재벌의 비전과 전략을 아무런 주저 없이 채택해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세가 그렇게 정해졌고, 남은 건 시행 속도뿐이었다. 주도권을 쥔 재벌이 가장 집착한 것은 요소비용 경감이었고, 그 중에서도 금리였다. 재벌은 금리가 높아 장사를 할 수 없다며 금리를 낮추던지, 아니면 금리가 낮은 해외자금을 손쉽게 쓰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인용된 통계를 보면, 매출액에 대한 차입 이자의 비율인 금융비용부담률은 1992년 상반기 중 6.2%였다. 100원어치를 팔아 6.2원을 차입금에 대한 이자로 치렀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1991년 일본 기업의 금융비용부담률은 2.1%였고 대만 기업은 2.5%였다. 한국의 회사채 금리는 1991년 말 연 19%까지 치솟았다가 1992년 말에는 연 14% 수준으로 하락했지만, 일본의 4.5%, 대만의 8.1%에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다.

재벌 요구 따라 해외자본 자유화


그러나 이는 원인을 제거한 채 결과만 따지는 것이었다. 높은 금융비용부담률은 금리뿐 아니라 차입금 규모에 따라서도 높아진다. 기업이 차입금 의존도를 낮추지 않는 한, 금리가 떨어지더라도 금융비용부담률은 낮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통계로 확인됐다. 국내 기업의 차입금 평균금리는 1990년 12.7%에서 1995년엔 11.7%로 낮아졌다. 그러나 금융비용부담률은 같은 기간 5.1%에서 5.6%로 오히려 높아졌다. 높은 차입금 의존도로 금융비용이 증가한 것이다.

높은 차입금 의존도가 국내 금리를 밀어올린 측면이 있었고, 그런 구조 속에서 국내 금리를 크게 낮추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재벌은 ‘자체신용으로 금리가 싼 외화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결국 낮은 금리의 해외자본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해줬다. 정부는 한편으로는 재벌의 요구에 따라 저비용 구조 개선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준비하면서 해외자금 이용 기회를 확대했다.

자본자유화는 1992년부터 추진됐고, 김영삼 정부는 그 속도를 올렸다. 전에는 해외증권 발행과 관련된 자금의 용도가 첨단 시설재 도입 및 국산으로는 불가능한 기타 시설재 도입 등으로 한정돼 있었다. 발행기업의 자격도 납입자본금 규모 및 순이익 등이 까다롭게 규정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3년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따라 해외증권 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됐고 발행용도에 외채 조기상환과 기술도입비 조달이 추가됐다. 발행자 요건도 종전의 3년 연속 순이익을 기록한 기업에서 최근 3년간 누계 기준으로 순이익이 발생한 기업으로 완화됐다. 해외증권 발행, 외화대출 등 자본자유화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됐다.

금융회사는 기업의 외화자금 수요를 맞추기 위해 앞다퉈 외화자금 중개에 나섰다. 일반은행의 해외점포는 1994~96년 28곳 순증했고, 같은 기간 단자사 24개가 종금사로 전환하면서 새로 외국환업무를 취급했다. 자본자유화와 함께 금융 감독 강화가 병행됐어야 했다. 정책당국은 오히려 외화자산운용에 대한 규제를 풀었다.

요컨대, 분별력을 상실한 정부는 재벌의 요구를 수용해 이자비용을 낮춰주기 위한 자본자유화에 나섰다. 재벌은 자신의 실력을 실제 이상으로 믿어 세계 일류가 가깝다는 환상을 추구했다. 재벌의 의사결정은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는데, 2, 3세로의 경영권 이양은 이를 더욱 조장했다. 하지만 많은 2, 3세는 의욕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재벌은 마음껏 영역을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유례없는 규모로 해외자본을 끌어다 썼다. 그러나 실력은 오래가지 않아 드러났다.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단기외채 비율이 높아져 외채구조도 취약해졌다. 반면 외환보유액은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된 상태에서 한국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돌아서 순자본유입이 마이너스가 되면서 급격히 감소했다. 빚 독촉이 빗발쳤지만 갚을 여력이 없어진 한국 경제는 마침내 지급불능의 위기에 빠졌다.

[박스기사] 전경련 회장 인터뷰에 드러난 재벌의 자신감 - “풀어라, 우리가 책임진다”


▎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
재벌은 한국 경제를 잘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했다. 1980년대부터 세계화를 연구했다는 최종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풀어라, 우리가 책임진다”고 호언장담했다. 최 회장이 1995년 1월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그는 “경제는 우리 기업인들이 책임집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도 잘 협조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도대체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세계화의 추세가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이어 “뭐니 뭐니 해도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 개도국 등 경쟁국 중에 이런 금리부담 속에서 기업 하는 나라는 없다”며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에 금융자율화와 외환자율화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면서 “요즘 환율의 움직임을 보면 당국이 외화유입을 미리 걱정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 회장은 1994년 12월 외환제도 개혁안과 관련해, “다 풀어도 아무 걱정 없어요”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방에 대한 우리 대처능력은 약하다고 보면 약하지만, 민감하다, 강하다고 보면 또 충분히 그럴 실력이 있어요. 그거 걱정하느라고 만날 붙잡고 있는데 뭘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다 풀어야 돼요.”

‘문어발’이라고 비판받은 사업다각화에 대해 그는 “그룹 내의 개별 업체들이 전문업체에 뒤지는 게 무엇입니까”라며 “문어발식이 상대적으로 경쟁에 뒤떨어진다면 문어발 확장을 할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업종을 정해놓고 그 틀에 가둬놓는 방식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면서 “믿고 풀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뭘 모르고 밀어붙인 것은 재벌이었다. 한국 재벌은 걱정할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주도권을 쥔 한국 경제는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1386호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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