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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도체는 왜 몰락했나] 일본이 몰랐던 3가지 선발의 변신, 후발의 추격, 시대의 변화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번역=김다혜
1980년대 후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50% 웃돌아 ... 도시바 매각되면 점유율 5% 이하로 축소될 듯

▎2012년 2월 28일, 자금난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일본 최대 D램 반도체 업체인 엘피다메모리의 사카모토 유키오 사장(왼쪽) 등이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시계추를 30년 전으로 돌려보자. 1988년 일본제 반도체의 세계 점유율은 50%를 웃돌았다. 이 시기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 개정을 둘러싸고 매달 워싱턴에서 교섭이 이뤄졌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강경 태세에 이도 저도 못하자, 일본의 통산성 관료는 등 뒤의 커튼을 향해 ‘어떻게 반문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커튼 뒤에는 히타치제작소, NEC, 도시바, 후지쯔 등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 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USTR의 배후에도 모토로라 등 미국의 반도체 업체 담당자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커튼을 사이에 두고 불꽃 튀기는 협의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에 맺은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제 반도체의 덤핑(부당염가판매) 수출 방지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본의 우위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 열세에 있던 미국 업체들은 강경 모드로 나선다. 양국 반도체 협정 개정을 위해 교섭을 개시하며 일본 국내의 미국제 반도체 점유율을 10%에서 20% 이상까지 끌어올리는 조항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1991년 신 협정에서 명문화되었다. ‘비하인드 더 커튼(Behind The Curtain)’의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히타치의 가네하라 카즈오 전 이사는 “통산성은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미국 측의 조건에 응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신 협정 이후, 일본 반도체 업계의 흐름은 바뀌었다. 일본 정부는 외국제 반도체를 사용하도록 전기·전자 업체들에 강력하게 지도했다. 히타치에서 반도체 개발을 지휘했던 마키모토 쓰기오 전 전무는 “사내 가전이나 컴퓨터 사업부 등에 판매하는 경우, 가장 먼저 외국제 반도체의 유무에 관심을 보였다. 사외에도 히타치제작소 반도체와 연관이 있는 외국제 반도체를 소개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진행됐다”라고 이야기한다.

미·일 반도체 협정이 효력을 잃어버린 1996년, 일본 내 외국제 반도체 점유율은 20%를 넘었다. 이 무렵 주력 제품인 D램(D-RAM)의 용도는 워크스테이션용에서 PC용으로 크게 바뀌었다. 미국의 반도체 업계는 인텔의 PC용 프로세서 ‘펜티엄’의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부활했다. 이때부터 일본 반도체의 몰락은 한 순간이었다. 1997년부터 실리콘 사이클(반도체 산업의 주기)의 대불황으로 일본 업체들은 하나같이 업적 악화에 빠졌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전기의 반도체 부문이 엘피다에 흡수되었다. 후지쯔는 1999년, 도시바는 2001년에 범용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삼성의 집념을 눈치채지 못했던 일본

앞서 나온 히타치의 가네하라 씨는 “일본 반도체가 약해진 것은 미·일 반도체 협정 때문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한다. 그 ‘패인’은 크게 세 가지에 있다.

첫째, 한국에 비해 대응이 늦어진 점이다.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는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왕성한 개인용 PC 수요에 대응해갔다. 일본은 품질 향상을 위해 D램 제조에 회로패턴을 그리는 포토마스크(유리기판 위에 반도체의 미세회로를 형상화한 것)를 23장 정도 사용했다. 그에 반해 한국은 15장 이하였다. 고성능을 추구하기보다 가격을 낮추는 전략이 시대에 부합했다. 1996년경에는 첨단개발도 일본을 따라잡았다.

일본의 제조업체들이 하나같이 침체기에 빠진 1997년 이후에도 삼성은 확대 투자를 지속했다. 불황기에는 대량 제조장치를 싸게 사들여 증산 투자에 승부를 걸었다. 당시 이건희 사장(현 회장)의 지시 하에 경쟁업체들을 따돌렸다. 삼성은 일본 업체들을 따돌린 1990년대 후반, 일본기업의 반도체 기술자를 불러들여 정보를 흡수해갔다. 삼성은 가와니시 쓰요시 전 도요타 부사장에게도 “한국에 공장을 보러 와 달라”고 접근한 적이 있다. 그는 “삼성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훔쳤을지 모르나 그 때문에 한국이 강한 것은 아니다. 이건희 사장은 D램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그 후에도 강렬한 위기감과 리더십이 있었다. 일본에는 그것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최고라고 안심하고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실패요인은 시대에 뒤처진 국가 프로젝트에 매달린 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기울기 시작한 1995년 무렵부터 경쟁력 강화를 위해 통산성(2001년에 경제산업성으로 바뀜)이 나섰다. 산학 연계 프로젝트를 설립해 연구개발을 위해 예산을 투자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6년에 일본 내 반도체 연계 합병기업인 ‘반도체 첨단 테크놀로지(Selete : 셀레트)’가 탄생했다.

그 배경에는 한 개 회사만으로는 반도체 개발·설비투자에 거액 투자가 불가능한 힘든 현실이 있다. 반면 기술자들은 1976년에 개시한 관민합동 프로젝트 ‘초(超) LSI기술연구조합’의 성공 경험이 있었다. 경쟁 상대인 복수 회사가 기술을 공동개발하는 통산성의 대형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머쥐며, 이후 D램이나 일본산 장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활을 노린 것이다.

셀레트에서는 직경 300mm의 차세대 반도체 웨이퍼를 사용한 생산기술 개발이 진행됐다. 일본 업체 10곳과 삼성전자의 참가로 총 11사로 결성됐다. “당시 삼성의 강점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도시바, NEC는 삼성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셀레트 전 전무인 고미야 히로요시 씨). 4년에 걸쳐 11사의 기술자들이 한데 모여 논의를 거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성과를 낸 것은 삼성이었다. 삼성전자는 2001년에 세계 최초로 300mm로 D램 양산에 성공했다. 2년 후 엘피다도 성공하면서 뒤늦은 경영판단은 극명해졌다.

‘반도체 마을’의 붕괴, 실패로 끝난 국가 프로젝트


▎2017년 4월 11일 쓰나카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이 도시바 메모리 매각 관련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히타치나 NEC, 도시바, 후지쯔는 그로부터 몇 년 후 300mm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당시 공장 건설에는 경제산업성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파운더리(제조수탁전문업체)인 타이완의 TSMC가 세력을 확장해갔다. 이에 대항해 ‘일본 파운더리 구상’을 내걸고 각 사로부터 출자를 모집해 거대한 300mm 반도체 공장 건설을 꿈꾼 것이다. 기획에 참여한 기계진흥협회 경제연구소의 이노우에 코우키 수석연구원은 “경제산업성은 각 사가 개별적으로 공장을 건설해도 규모에서 파운더리에 대항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한다. TSMC는 거액의 설비투자를 지속하며 최첨단 장치를 갖추고 우량고객을 잇달아 흡수해갔다. 일본의 장점인 제조 프로세스 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처음에는 히타치와 타이완의 파운더리 UMC와의 합병회사인 트레센티(Trecenti) 테크놀로지의 나카 공장(이바라키현 나카시 소재)을 일본 파운더리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2003년 르네사스 테크놀로지 발족을 위해 히타치가 트레센티를 흡수해 후보에서 제외됐다. 2002년부터는 국비 315억 엔을 투자해 회사별로 제 각각이던 플랫폼 통일에 경제산업성 주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NEC의 사가미하라 사업소 내에 연구소를 설치해 각 사가 기술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주도격이었던 NEC가 자진해서 야마가타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방침을 전환했다. 뒤쫓듯 도시바, 후지쯔도 300mm 공장 건설을 목표로 하며 이 시도는 공중분해됐다. “2003년경에는 반도체 마을이라고 불린 업계 내 협조관계가 붕괴해, 일본 파운더리가 성립할 상태가 아니었다”(이노우에 씨). 라이벌이 새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면 우리도 공장을 갖지 않으면 추월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조급하게 움직인 것이다.

세 번째 실패요인은 세계의 변화를 따르지 못한 점이다. 후지쯔의 전자 디바이스사업 본부장이었던 후지이 시게루 씨는 “일본이 로직 반도체에서 패한 것은 패블리스 메이커(개발전문업체)와 파운더리 구조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후지이 씨는 2001년 미국에서 고객의 변화에 직면하고 충격을 받았다. 반도체 패블리스 벤처가 잇따라 탄생해 우수한 ‘ASSP(특정용도의 표준 LSI)’가 시장의 주류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특기였던 ‘ASIC(고객전용반도체)’로 승부를 겨루기 어려워졌다.

두뇌로 승부하는 미국에 일본은 상대가 안 돼

ASSP와 ASIC는 설계상에 차이가 있다. ASIC가 고객의 특별주문품인데 반해 ASSP는 특정 용도에 특화되어 있다. 패블리스 벤처가 개발하는 ASSP는 특정 고객에 의존하지 않고 인텔의 프로세서와 같이 범용품을 지향한다. 설비투자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리소스를 연구·개발(R&D)에 쏟아 붓는다. 미국 업체들은 ‘다양한 반도체를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콘셉트가 있었다. 가전이나 자동차 등 반도체를 하청업체와 같이 만들어온 일본 업체는 이러한 아이디어 승부가 부족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소니가 2006년에 개발해 가정용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에 탑재한 차세대 프로세서 ‘셀(Cell)’은 가전 등 폭넓은 소니 제품에 채용됨으로써 ‘타도 인텔’을 지향했다. 하지만 소니의 사내 사정으로 인해 게임기 이외에는 채용이 늦춰졌다. 마찬가지 사례가 후지쯔에도 있었다. 2011년에 세계 1위를 획득한 슈퍼컴퓨터 ‘케이(京)’의 개발자인 이노우에 아이치로 씨는 “케이의 반도체를 탑재한 서버를 팔아넘길 예정이었으나 직전에 중단되었다”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케이의 기술을 탑재한 고성능에 소형 로우엔드 서버가 샘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서버 부문은 하이엔드 제품이 팔리지 않게 될 것이라 맹렬히 반대했다. 케이가 세계기록을 갱신한 다음날, 이노우에 씨의 직속 부하 100명 이상이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고 한다. 세계 제일의 슈퍼컴퓨터 기술은 범용품에 활용되지 않았다.

2012년 파산한 엘피다의 사카모토 유키오 전 사장은 “일본의 패인은 종합전기가 반도체 사업을 경영한 것이다. 사업이 잘 되는 동안에 분사화하여 경영을 분리했다면 부활할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2016년에 7%까지 내려간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은 도시바 메모리가 외자에 매수된다면 더욱 축소될 것이다. 일본 반도체가 부활할 날은 과연 올까?

1388호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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