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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14) 지식사회의 부재] 아이디어 검증 시스템 부실하고 예리한 비판도 치열한 토론도 부족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woojinb@hanwha.com
세계화·녹색성장·창조경제 아이디어 실패작으로 … 최근 소셜 미디어 가세한 옥석 가리기 활발

▎사진:ⓒgetty images bank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독일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파우스트]에서 한 말이다. 이는 ‘인간은 노력하는 과정에서 방황하며 시행착오를 저지르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는 편이 가만히 있는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편보다 낫다. 다만 여기엔 단서가 달린다. 시행착오를 거쳐 너무 늦지 않은 단계에서 더 나은 선택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개선과 향상을 추구하는 한 시행착오를 범한다. 중요한 것은 가급적 이른 시기에 시행착오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궤도를 찾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노력에 열심이고 그래서 방황도 많이 한다. 그런데 방황이 방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정책적인 노력이 시행착오를 거쳐 적절하게 가다듬어지지 않고, 어긋난 방향으로 시행된 끝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모든 실행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은 아이디어라고도 불린다. 정책도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한국의 정책적인 방황이나 시행착오, 실패의 뿌리는 틀리거나 적합하지 않은 아이디어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큰 실패 사례가 1997년 외환위기였고, 이는 근본적으로 세계화, 세계일류, 요소환원주의 등 부적합하거나 어긋나거나 틀린 아이디어의 실패였다. 외환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이들 아이디어에 대한 분석은 앞서 다룬 바 있다.

아이디어의 실패는 김영삼 정부 이후에도 반복됐다. 노무현 정부는 서울을 동북아시아 금융허브로 육성한다는 아이디어를 채택해 추진했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로 한국 경제를 다시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아이디어가 모두 성과를 내지 못했음은 다들 알고 있다.

실패의 뿌리는 틀리거나 적합하지 않은 아이디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녹색성장은 국내 환경과 제약이라는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해외 아이디어를 이식하려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텍스트에 해당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3년 4월 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녹색성장위원회 보고대회 및 격려오찬에서 양수길 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장(가운데), 김형국 전 녹색위원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이 꼭지의 주제는 개별 아이디어가 왜 실패했는지 사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회에서는 한국에서는 왜 맞지 않는 생각이 자주 주요 아이디어로 채택되는지 그 메커니즘과 원인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적합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자리를 잡고 급기야 헤게모니를 쥐는 원인은 한국 지식사회의 부실한 검증 시스템 탓이 크다. 여기에는 다시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토론 문화 부재, 권위주의, 일방향 지식 전달과 암기식 학습 문화, 가치를 앞세워 사실을 재단하는 경향, 권력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지식시장, 해외의 사조에 대한 경도, 군집행동으로 나타나는 쏠림 등이 그런 요인이다.

그 메커니즘을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 학자가 오래 된 난제를 새롭고 혁신적으로 푸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은 종종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부류다. 언론매체가 경쟁적으로 크게 다루고, 정치권의 관심을 끈다. 정치권에서 논의하면 행정부에서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행할지 논의가 무성해진다. 각종 콘퍼런스가 개최되고 대학교수와 연구 기관의 전공자들이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발표하고 토론한다. 논의가 언론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아이디어는 가지를 치면서 부풀어오른다. 비판하는 말은 대세에 묻히고 만다. 결국 아이디어는 실행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 간혹 아이디어를 검증해야 할 언론매체가 엉터리 아이디어를 직접 만들어 전파하기도 한다. 외환위기를 막판에 촉발한 일부 언론의 ‘국민기업 기아자동차 살리기’ 운동이 대표적인 반면교사의 사례다. 일방향 지식 전달과 암기식 학습 문화, 권위주의, 토론 문화 부재가 어우러져 나타나는 한국적인 현상이 있다. 지식인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는 현상이다. 공자가 진단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즉 생각만 하고 타인과 의견을 나누며 배우지 않은 탓에 독단에 빠져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서로 날카롭게 부딪히지 않는다. 오류를 적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집단적인 검증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다수가 침묵하는 가운데 소음이 되고, 점차 묵음으로 처리된다. 오류가 있는 아이디어를 낸 학자는 그 오류를 제거하거나 바로잡거나 보완하는 대신 독단에 빠진 가운데 자신의 아이디어와 함께 오류를 키워나간다. 한국에서는 그런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인도 모든 사안에서 늘 적절한 해법을 생각해낼 수는 없다.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위험을 낮추기 위해 도입한 토론 방식이 ‘데블스 애드버킷’이다.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의미인 데블스 애드버킷은 사안에 대해 일부러 반대 의견을 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성원 모두 찬성하거나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을 때, 그는 간과된 변수나 위험은 없는지, 다른 대안과 비교 평가를 충분히 했는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제기한다. 토론이 활발한 서구와 달리 한국의 지식인들은 예리한 비판과 치열한 토론에 나서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문화, 나서지 않는 문화, 시류에 편승해 한몫하려는 경향 등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대학 교수가 노출된 오류의 위험

한국 지식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대학 교수들은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인 배경으로 인해 자신만의 생각으로 점점 깊이 들어갈 위험에 크게 노출돼 있다. 정확히 이 주제를 다룬 자료는 거의 없다. 그래서 정황이 될 이야기를 통해 이 주제를 살펴본다.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모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는 교수들은 다들 한국 대학생들의 수동적인 학습태도가 문제라고 말한다. 허종욱 비지니아워싱턴대 사회학 교수는 “내가 지난 11년 동안 한국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면서 가장 놀란 것은 학생의 질문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라고 들려줬다. 허 교수는 워싱턴중앙일보 기고 ‘가르치지 말고 질문하게 하라(2017.7.15.)’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이 교수는 책 [도발하라]에서 “대학 강단에서 20년 가까이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해가 지날수록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매우 성실하지만 너무나 수동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호기심에 찬 질문도 없고 반대 의견도 없이 듣고 필기하는 한국 대학생의 문제는 대개 문제해결 능력이나 창의력을 함양하는 측면에서 논의된다. 한국의 오래된 암기식 학습으로는 문제해결 능력도 창의력도 키우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가르쳐주는 것을 잘 받아 적고 열심히 외워 시험답안에 정리해서 적기만 하면 복사기 이상의 학생이 되기 어렵다”며 “스스로 사고하고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지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이근 교수는 중요한 논점을 끄집어낸다. 그는 한국 대학 강의실의 이런 분위기로 인해 교수가 가장 비생산적이게 됐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선생은 학생들이 가만히 있으니 얼마나 가르치기 쉽고 긴장감이 떨어지겠는가?”라며 “선생과 교수가 가장 편안하고 비생산적인 직업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을 들려줬다.

해외 아이디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태

나는 이근 교수의 통찰력에 동의하면서 한 단계 더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질문을 받지 않은 채 강의하면서 생각이 샛길로 흐를 위험에 점점 더 크게 노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수가 해당 분야 학회에서 날카로운 비판과 치열한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가운데 강의에서도 신선한 질문이나 패기있는 반박도 접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골수가 되기 쉽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이런 측면에서도 맞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학상장은 스승은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기가 지닌 지식의 정합성과 적합성을 보완해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는 스승은 특히 학생들의 문제 제기를 통해서도 자신의 지식을 정제해나갈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이뤄지지 않고 그래서 교수의 지식이 정체되거나 옆길로 빠지곤 한다.

한국의 교수들 가운데 ‘사이불학즉태’의 경우가 다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 경우가 소수일지라도, 그들이 내는 틀린 아이디어가 대중적인 호소력을 바탕으로 확산될 수 있다. 아이디어의 시장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셤의 법칙과 비슷한 원리가 작용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양화 아이디어’는 재미가 없는 반면, 논리 비약이 있더라도 감정에 호소하는 ‘악화 아이디어’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정도의 서술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최근 이슈가 된 ‘원전 사고 발생 확률 27%’가 참고할 사례다[박스 기사 참조].

해외 아이디어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행태도 검증 시스템의 구멍이다. 한국은 선진국의 발전 경로를 따라 밟아왔는데, 이는 해외의 아이디어를 빠르게 수입해 실행하는 일이었다. 한국 사회의 아이디어 검증 시스템에 부실한 가운데 해외 아이디어는 상당수가 옥석을 가리는 대상에서 예외가 됐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국내의 여건에서 새로 검토해야 한다. 텍스트가 아무리 훌륭해도 콘텍스트(맥락)가 들어맞지 않으면 호소력이 떨어진다는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금융허브나 녹색성장은 국내 환경과 제약이라는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식하려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텍스트에 해당한다.

요즘 논의되는 4차 산업혁명은 어떤가. 세계 주요국 중 한국에서만 4차 산업혁명이 유행하는 것은 한국 지식 사회의 무비판적인 해외 사조 수용이라는 행태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은 콘텐트가 산만해 문제인 아이디어다.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는 혁신을 그러모아 이름을 지은 것일 뿐, 4차 산업혁명에는 하나로 꿰어지는 줄기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은 그럴듯하게 포장한 개념이지, 실행하는 아이디어로는 적절하지 않다. 실행 단계에서는 다시 그 각각의 분야를 우리의 실정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취사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실질적인 작업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쭉정이 걸러내는 작업 전방위적으로 전개

희망적인 대목이 있다. 몇 년 전부터 겉만 그럴듯한 쭉정이를 걸러내는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로 연결된 전문가와 전문가의 식견을 전파하는 일반인들의 활동이 이 작업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근거 없이 음식 공포를 조장하던 방송 프로그램이 퇴출됐고, 사이비 식품 전문가들의 입지도 급속도로 좁아졌다. 위험한 민간요법을 전파하거나 시술하고 과학적인 의료를 거부하라는 주장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또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명분 아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유사역사학의 허상이 규명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엉터리 아이디어를 냈다가 크게 빗나간 사람들의 실력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경제 아이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전문가들이 논평과 함께 보완할 부분을 적시한다. 한국 사회의 부실한 아이디어 검증 시스템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보안될 수 있다고 본다. 소셜 미디어와 언론매체의 상승작용도 기대한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이디어다. 틀린 아이디어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게끔 아이디어를 철저히 검증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가동해야 한다.

‘교수의 오류’ 단적인 사례 - 한국 원전 중대사고 확률이 27%라니

“한국에서 (중대 사고로 분류되는) 5등급 원전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약 30%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가 최근 서울 금호고 ‘탈핵 강의’에서 한 말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주장이 충분히 논의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전파되고 확산되는 사례다. 또 이 주장은 원자력의 영역에서 나왔지만 관련 산업과 경제와도 관련이 높은 주장이다. 김 교수가 다른 강의에서 활용한 파워포인트를 보면 이 확률을 계산한 원리가 나온다. 세계 원전 442기 중 6기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이 확률은 1.36%, 즉 0.0136이다. 우리나라에는 원전이 23기 있다. 이들 원전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사고가 날 확률은 0.27, 즉 27%다. 김 교수의 계산은 틀리지 않다. 원전 1기가 사고 날 확률이 0.0136라면 사고가 나지 않을 확률은 0.9864다. 23기 원전에서 전혀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확률은 0.9864×23이다. 이를 계산하면 0.73이 나온다. 원전 23기 중 한 곳 이상에서 사고가 날 확률은 1에서 0.73을 빼면 된다. 0.27, 27%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약 30%의 원전 사고 위험을 지고 살고 있다는 말이다. 미심쩍지 않은가? 이른바 원전 마피아라고 하지만 이렇게 큰 위험을 호도한 채 원자력 발전소를 늘리지는 않았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계산은 맞다. 그러나 전제가 어긋났다. 김 교수의 이 자료가 소셜 미디어에 공유되자 반박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A씨는 “442기 원전 중 6기에서 사고가 났다고 해서 사고 확률을 1.36%라고 하는 처음 가정 자체가 잘못”이라고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사고 확률은 각 세대별 원전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한 종류의 사고가 발생한 뒤에는 같은 사고는 나지 않게 남은 원전들이 준비를 하므로 그 부분도 계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의 가정을 단순 적용하면, 원전이 예를 들어 74개인 경우 그 중 하나 이상에서 언젠가 사고가 날 확률은 10만분의 9998이 된다.미국은 원전이 약 100기로 알려졌다. 김 교수의 계산법으로는 미국에서 원전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100%에 더 가까워진다. ‘442기 중 6기’라는 과거의 발생 빈도를 앞으로도 적용되는 확률이라고 보기때문에 이런 비현실적으로 높은 확률이 나오는 것이다. 미국 드리마일, 소련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 사고는 각각 안전도를 높여 사고 위험을 낮추는 계기가 됐다.

이 오류의 확산은 시사하는 바는 많고도 크다. 이 오류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항을 간과해 빚어졌다. 그것도 대학 교수가 저질렀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서 주장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그 경계를 몰랐다. 지나친 사명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원전 전문가들도 이 아이디어의 확산에 적극 대응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전문가들은 오류가 번지지 않도록 대중과의 소통에 더 나서야 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에서 의학과 미생물학을 공부했고 동국대 의대 교수로 2009년 경주환경운동연합을 통해 반핵운동에 입문했다. 2010년 경주핵안전연대를 조직했고 2011년에 출범한 탈핵에너지 교수모임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탈원전 선언을 하자 선거본부에서 탈핵에너지전환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2013년 [한국탈핵: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을 위한 탈핵 교과서]를 써냈다.

1400호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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