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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각광받는 인공지능 왜?] 딥러닝·그래픽처리장치 발전으로 날개 달다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포털의 검색기능,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강화 … 지능·인격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도 필수

▎순다 피차이 구글 CEO가 10월 4일 신제품 발표회에서 키노트 연설을 하고 있다. / 사진:구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애증의 단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AI 연구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내놓은 건 아니었다. 학자들과 투자자들에겐 그 단어가 가진 뉘앙스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SF 영화 제작진에게 AI는 창작의 원천 같은 존재였다. 도대체 AI를 뺀 SF영화라는 게 가능이나 할지 모르겠다. 인공지능학자들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얘기할 때 영화의 예를 들곤 한다.

이름 값을 못하던 AI가 최근 몇 년 간 전성기를 맞고 있다. 배경은 사실 아주 오래된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의 뇌 구조를 모델링한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이란 개념이다. 인간의 뇌는 뉴런이라는 세포의 네트워크로 이뤄져 있다. 하나의 뉴런이 다른 뉴런에 의해서 작동되고, 이는 또 다른 뉴런을 작동시킨다. AI 연구진들은 데이터가 뇌에 입력되면 생각이나 행동이라는 출력물이 나오는데, 그 중간의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 주목했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이 알려지지 않은 과정에 학습 등 고등 지능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 구조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를 본뜬 인공지능망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AI 연구진들은 이 때문에 수십 년 간 몇 차례의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이름값 못하다 제3의 전성기 맞아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왜 AI가 다시 르네상스 시기를 맞았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세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첫째, 인공신경망의 좀 더 깊은 곳인 심층부에서 기계를 학습시키는 새로운 방법이 만들어졌다. 둘째, 인터넷과 클라우드 서버가 보편화 되면서 기계가 학습할 수 있는 교과서 격인 문서·이미지·동영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런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컴퓨터 연산 능력의 혁신이 필요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마지막 변화인 그래픽처리장치(GPU)의 변신이 이뤄졌다.

앤드류 응 스탠퍼드대 교수는 2009년 PC나 비디오게임기에 들어가서 그래픽 수준을 높이는 데 쓰이는 칩인 GPU의 또 다른 능력을 밝혀냈다. GPU는 여러 명령어를 동시에 병렬 처리할 수 있는데 이 기능이 머신러닝의 기법 중 하나인 딥러닝의 학습 속도를 몇 백배 향상시켰다. 딥러닝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했고 놀라운 결과물을 내놨다. 지지부진했던 음성인식 정확도가 몇 년 새 크게 향상됐다. 이미지 인식률이나 번역의 정확도도 크게 개선됐다.

앤드류 응 교수는 2012년 구글 브레인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컴퓨터 프로세서 1만6000개를 연결해 인공신경망을 구축했다. 이후 유투브 영상 1000만개를 추출해 컴퓨터가 디지털 이미지를 이용해 스스로 훈련하는 방식으로 고양이의 이미지를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이 디지털 이미지에 라벨을 붙여 기계를 훈련하는 지도 학습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즉 각각의 이미지에 ‘고양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과정 없이도 딥러닝 알고리즘을 통해 컴퓨터가 스스로 고양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고 이미지를 식별해낸 것이다.

딥러닝은 구글의 검색기능을 강화시켰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면 자동으로 친구 이름을 태깅할 수 있게 됐다. 애플의 ‘시리’나 아마존의 ‘알렉사’와 같은 AI 비서, 테슬라의 자율주행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기술이 됐다. AI라는 말이 나온 지 61년이 됐지만, 이렇게 많은 곳에서 실제로 활발히 쓰인 적은 없었다.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는 193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 신경학의 연구 결과에서 시작됐다. 인간의 뇌가 뉴런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착안해 전기적인 네트워크를 제어하고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인공지능학이 나왔다. 인공지능이란 말은 다트머스대학 수학과 조교수 존 맥카시가 1956년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발표를 하면서 처음으로 썼다. 맥카시는 이 컨퍼런스에서 “최대 장애물은 기계의 용량 부족이 아니라 우리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프로그램을 짜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은 두 번의 암흑기를 거쳤다. 한 번은 1970년대, 다른 한 번은 80년대 후반에서 1993년까지였다. 한마디로 돈이 끊겼다. 연구방법은 계속 발전했지만 결과물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약한 인공지능은 산업현장에서 쓰이게 됐지만, 인간과 같은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 강한 인공지능 부분에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딥러닝과 그래픽처리장치 등의 비약적 발전으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번영·자유의 시대 vs 인간과 기계의 투쟁 시대

인공지능 관련 기술은 앞으로 더욱 발전할 전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공지능의 미래를 논할 때 먼저 정의해야 할 게 있다. 인간의 ‘지능’이 무엇인지, ‘인격’이 무엇인지, ‘자유의지’는 과연 존재하는지와 같은 것이다. AI의 이미지 판별력이 수치상으로 인간을 뛰어넘었다고 치자. 전투에 투입된 AI가 군용 드론으로 쏜 포탄에 민간인과 아군이 사망했다. AI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그랬을까? AI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할까? 지능을 가진 AI를 인격체로 대우해야 하는가? 이런 복잡한 문제는 모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이경전 경희대 교수는 “인공지능에 자의식이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은 바둑·포커·체스 등에서 인간을 이겼고, 피부암 이미지 판독에서도 인간보다 뛰어나며, 심장병 발작 진단 정확도에서도 의사를 이겼다. 이 교수는 이는 대단한 일이긴 해도 정답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하나씩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인공지능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철학과의 존 설 교수는 “컴퓨터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컴퓨터는 고작 기호를 조작할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의미할 순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존 설 교수는 한 걸음 더 나가 컴퓨터가 기호를 조작할 수 있다는 얘기조차도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이 부분에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스탠퍼드대학 법정보학센터 교수인 제리 카플란은 [인공지능의 미래]라는 책 서두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향후 수십년 동안 인공지능은 현 사회 구조를 한계점까지 몰고 갈 것이다. 우리 미래가 영화 [스타트랙]에서처럼 전례 없는 번영과 자유의 시대가 될 것인지, 아니면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인간과 기계의 끊임없는 투쟁의 시대가 될 것인지는 상당 부분 우리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학자도 SF영화를 빼고선 인공지능을 잘 설명할 수 없는 모양이다.

1405호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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