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작은 것이 꼭 아름답지는 않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최근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책을 다시 읽었다. 영국의 경제사상가 슈마허(Ernst Schumacher)가 1973년에 쓰고 ‘인간 중심의 경제학 연구’라는 멋진 부제를 붙인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막 공부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그 당시 슈마허의 이 책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78∼1980년은 유가 급등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던 2차 석유 파동 시기였다. 자연자본을 소득의 수단으로만 삼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지속하면 21세기가 오기 전에 석유자원은 고갈되고 환경파괴와 오염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된다는 그의 예언은 그래서 더욱 힘이 실렸다. 책을 읽지 않은 이들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주문을 외울 만큼 이 책의 영향력은 컸었다.

1970년대는 경제발전 지상주의를 외치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환경오염 문제, 노동인권 문제가 불거지던 시기였다.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먹고 살아야 하는 궁박함에서 점차 자유로워지면서 경제 외적 욕구와 갈증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국민총생산(GNP), 높은 경제성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슈마허의 주장은 우리나라 상황만 놓고 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에도 경제 발전에 대한 슈마허의 비판적 성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의 자연자본과 함께하는 지속가능성장, 인간적인 일자리와 조화되는 중간기술과 같이 슈마허에서 비롯된 개념은 이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세부 내용에서는 틀린 부분이 많고 그가 주장하는 몇몇 정책대안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부분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철학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짧고 강렬한 주문(呪文) 같은 표현에 매료돼 우화(寓話)까지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공공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슈마허 본인이 강조했던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석유자원 고갈에 대한 그의 전망은 누가 봐도 틀렸다. 자원의 희소성과 사용가치는 시장가격에 투영된다. 2차 석유파동 당시 유가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았다. 지금의 유가는 배럴당 55달러 수준이니 그동안의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지난 40년 동안 실질 유가는 크게 하락한 셈이다. 여기에 대해 아주 길게 보면 언젠가는 화석연료가 고갈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 종말이 올 때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감소하면 가격이 상승하고, 가격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으면 인류는 태양광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옮겨갈 것이다. 대부분의 이상주의자들이 그렇듯 슈마허는 가격신호(price signal)에 적응적으로 진화하는 문명의 발전법칙을 간과했다.

둘째, 경제 발전과 환경파괴·오염은 비례적 관계에 있다고 보는 관점도 정확한 게 아니다. 슈마허는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환경파괴·오염이 심각하다고 했는데 이 지적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이다.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초기에는 환경오염도 함께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제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 더욱 발전하면 환경오염은 감소하게 된다. 정태적 시점이 아닌 동태적 시점에서 보면 환경과 경제성장은 역U자 관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환경 쿠즈네츠 곡선(Kuznets Curve)’으로 불릴 만큼 여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입증된, 정형화된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1970년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화두가 국내에서 회자될 무렵, 서울의 공기는 탁하고 청계천은 오염되고 한강물에서는 냄새가 났다. 그 당시 금호동이나 옥수동은 왜 동네 이름이 금빛 호수, 맑은 물인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비탈진 골목에서는 주택가임에도 비 오는 날이면 누렇고 푸른 정체 모를 화학제들이 생활 오폐수와 뒤섞여 흘러내리며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랬던 동네에 지금은 깔끔한 아파트·빌딩이 반듯하게 늘어서 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서 층층이 몰려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환경에 관한 한 예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게 사실이고, 이는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

셋째, 소규모 기업을 찬양하고 대기업을 괴물 취급하는 그의 인식과 정책 제언은 문제투성이다. 기업도 작은 게 인간다울 것이라는 예단에 슈마허는 소기업의 사유재산권은 자연스럽고 생산적이며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기업은 타인의 노동에 기생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가공물(fiction)이며, 대기업의 사유재산권은 공정하지 못하고 기업 내부의 온갖 관계를 왜곡시키는 비합리적 요소라고 비판한다. 회사의 주주에게 주는 배당금을 불로소득이라 하면서 주식회사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가 하면, 대기업을 국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의 공동 소유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은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소기업은 선하고 대기업은 악인가? 소기업은 인간적이기 때문에 사유재산권을 허용하고 대기업은 공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사유재산권을 제한해야 할까? 어찌 보면 뻔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나라 기업정책 현실이 알게 모르게 슈마허의 인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남다른 지원과 보호를, 대기업에 대해서는 남다른 견제와 규제를 부과하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그렇다. 기업 규모에 비례해서 규제를 차등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다른 나라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한쪽에는 따뜻한 지원을, 다른 한쪽에는 가혹한 회초리를 휘두르는 점에서 정책의 성격이 남다르고 특별하다.

이와 관련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2년 3월 첫 주에 ‘작은 것이 아름답지 않다(small is not beautiful)’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재정파탄 일보 직전의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에서는 중소기업 비율이 매우 높은 반면에 독일·프랑스·영국은 대기업 비율이 높은 특징이 있다고 하면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는 질 좋은 일자리, 생산성, 경쟁력 등 모든 면에서 취약하기 때문에 적어도 기업에 관한 한 ‘작은 것이 아름답지는 않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비교하면 우리나라 중소기업 비율은 PIGS에 못지않게 높다. 중소기업 비율은 사업체 기준으로 99.8%, 종사자 기준으로 88%에 이른다.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2017년 기준 중앙정부 288개, 지자체 1059개로 총 1347개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책금융 규모는 약 4%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중소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그간의 정책이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는 반증이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는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표방하며 중소벤처기업부를 신설했다. 이런 정책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대통령 임기 중에 대기업 비율이 얼마나 늘었는가를 기준으로 정책의 성과를 평가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1410호 (2017.11.2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