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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배울 메이지유신의 7가지 성공 요인] 부국강병 위한 대타협과 희생정신 절실 

 

배국환 재정성과연구원 이사장(前 기획재정부 차관)
노조·규제개혁 문제 해결 급해 … 자율과 책임 작동하는 지방분권 장치 마련해야

▎쇼인 학당(松下村塾·쇼카손주쿠)에 걸려 있는 문하생 사진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로 차 있다.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에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맨 위 오른쪽이 기도 다카요시(유신 삼걸 중 한명).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역사란 고정 불변한 과거 사실(史實)의 기록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역사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정의했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150년 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해서도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왕정복고사관이다. 유신주체의 입장에서 정의를 내린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에도막부 말기 사쓰마조슈 등 일본 서남지역의 유력 번들이 개혁에 먼저 성공해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후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과 막부타도 운동을 거쳐 유신정부를 수립하고 천황제 근대국가를 수립한 사건이다.”

최근 메이지유신에 대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역사적 전개 과정이나 당시의 인물 하나하나가 대단히 재미있고 교훈적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철천지 원수 같겠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웅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그들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그들의 눈으로

메이지유신은 1868년 왕정복고 시점을 전후로 약 40년 간 진행된 혁명적 사건이다. 전반부는 페리흑선이 에도만에 나타난 1853년 이후부터 왕정복고가 이뤄질 때까지의 기간으로, 막부의 힘이 빠지는 사건이 이어진다. 후반부는 봉건 막번체제가 서구적 문명화, 부국강병, 천황제 입헌군주제 등을 도입하는 과정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민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메이지유신의 앙시앵 레짐은 봉건 막번체제인 에도막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서구 국가와 비교할 때 구체제의 특징이 매우 상이하다는 점이다. 서구의 혁명을 보면 일반시민이나 노동자·농민이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그들과 대적하는 것이 보통이다. 메이지 유신은 사뭇 다르다. 서구의 계급 투쟁적 혁명과는 달리 당시 지배계층인 사무라이 간에 국가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자주독립 확보와 국가체제(국체)에 대한 선택을 두고 벌이는 한편의 대하 드라마다. 서구화나 천황제를 근간으로 하는 제도의 도입 과정이 주를 이루는 후반부보다는 사무라이 간의 치열한 논쟁과 사생결단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전반부가 우리에게는 훨씬 유익한 메시지를 준다.

봉건 막번체제에서 근대화 역량 축적

봉건 막번체제의 에도막부는 서구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지방분권을 동시에 채택하고 있었다. 반역과 반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막부는 번에 대한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가동했다. 참근교대제(1년은 영지, 1년은 에도 상주)와 같은 인질제도를 통해 에도막부는 의도하지 않게 일본 사회를 바꿔놨다. 에도를 순식간에 인구 100만의 도시로 성장시킬 수 있었고, 대도시는 자생력을 갖추고 굴러갔다. 생산·소비·경쟁·교육·자치·정보유통 등 근대화를 위한 조건이 이때 이미 상당부분 축적되고 있었다. 다만, 200년 이상 평화가 지속되면서 외부로부터의 정치적·군사적 위협이 없다 보니 체제 내부의 긴장감이나 변화에 대한 욕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페리흑선의 내항은 그런 점에서 볼 때 메이지 유신의 시발을 자극할 수 있는 ‘격발지점(trigger point)’이었다. 당시 일본 국민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 개념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행정권·경찰권·징세권을 가진 번주가 왕이나 다름 없었다. 막부의 쇼군이나 교토 황거에 유폐돼 있는 천황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서구 열강이 침입해도 각 번이 대응해야 하는 특이한 국가 형태였다. 따라서 강력한 외부 충격을 받았을 때 국론이 분열되고 대응 방식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대정신은 존왕양이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국체를 바로 세우고 천황 중심으로 하나의 일본이 되어 외국과 대응해야 한다는 미토번의 존왕양이론이 사무라이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전개된 메이지유신은 그런 맥락에서 성공 요인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메이지유신의 첫 번째 성공 요인은 이론이나 사상적으로 탄탄하게 무장된 시대정신을 들 수 있다. 어떤 혁명이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상이나 철학이 뒷받침된 정신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메이지유신은 18세기 후반부터 일본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한 국학자의 신도국가론, 천황존숭론이 미토번을 중심으로 이론체계가 확립됐다. 사쿠마 쇼잔, 요시다 쇼인 등을 거쳐 힘을 발휘해 사무라이의 정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천황과 쇼군과의 관계, 국가와 번과의 관계와 같은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는 정신적·이론적인 도구체계가 생긴 것이다.

둘째로 막부의 강력한 번 통제 시스템에도 웅번들의 경제력·군사력의 약진을 들 수 있다. 에도막부를 탄생시킨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 배분 과정에서 반대파(도자마)들의 영지는 당연히 변방 외지에 조그맣게 배분했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쌓인 원한과 함께 동서 갈등이 메이지유신으로 나타난 측면이 강하다. 사쓰마·조슈 등 웅번들은 막부 몰래 밀무역 등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웠다. 훗날 이것이 막부를 타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지방분권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사무라이의 정신세계 바꾼 정신적·이론적 체계 정립

셋째로 부국강병을 촉진시킨 외부의 강력한 충격이다. 페리흑선 내항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1840~42)의 전모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서구 열강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도 인지했고, 무력으로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막부는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이국선에 대한 발포를 중지시켜 분란을 미연에 막고자 했다. 페리흑선은 미꾸라지만 있는 어항 속에 메기 한 마리를 넣는 것과 같았다. 잠자고 있는 미꾸라지에게 포식자 메기는 강력한 운동성을 불어 넣었다. 이러한 자극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메이지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회자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넷째로 막부말기 쇼군들의 정치력 부재를 들 수 있다. 불행하게도 도쿠가와 가문은 건강 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의 자연환경은 무덥고 습해 천연두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취약했다. 그런 가운데 1식1찬을 하는 소식 습관 탓에 영양상태도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막부말기 12~14대 쇼군들은 모두 병사했다.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한 사람이 없었다. 반막부파 입장에서는 호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막부는 쇼군의 유고시에도 거의 문제가 없도록 전문경영인(로주) 시스템으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는 권위의 부재를 의미한다. 설상가상으로 막부의 다이로 이이나오스케가 암살된 사건이 발생된 이후 막부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반막부파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다섯째 에도시대에 축적된 근대화 역량이 메이지유신의 자양분이 됐다. 에도시대는 언론·출판 분야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요소가 잘 자라고 있었다. [서양사정]이라는 책은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세상에 거저 되는 건 없다. 축적된 에너지가 있어야 폭발한다. 폭발을 도와주는 마그마 활동이 에도시대 265년 내내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유신 지사 키워 유신 건국기의 동량으로


▎쇼인 학당 입구에 서 있는 돌비석. 메이지 유신 100주년(1968년) 기념물이다.
여섯째 일본인 특유의 대양이적 인재가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한 것을 들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260여개 독립국가인 번이 각자의 인재를 키우고 양성한 결과일 수 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는 중앙정부 위주의 인재에 국한돼 인재풀이 협소해지지만 지방분권이 강한 국가에서는 다양한 인재가 각 지역에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대양이 적이라는 표현은 당대 스승의 스승이라고 일컬어졌던 사쿠마 쇼잔이 쓴 말이다. 쇄국만 하면 소양이이고 서양의 기술을 배워 서양을 제압하는 것이 대양이라 했다. 사카모토 료마, 가쓰 가이슈, 요시다 쇼인 등 중간급 스승이 모두 쇼잔의 제자다. 이들이 유신의 현장에서 이룩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샷초동맹을 주선했고, 에도성 무혈 입성을 중재했다. 수많은 유신 지사를 양성해 유신 건국기의 동량으로 만든 것도 이들이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쇼인의 제자들이다.

끝으로 격변기에 일본이 맞이한 천운이다. 천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로 작용한다. 당시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룩한 근대화의 요소를 간직한 채 누군가 뺨을 때려 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금상첨화로 식민지 건설보다는 통상과 중간 보급기지 건설에 관심이 있었던 미국이 먼저 문을 두드린 것이다. 지정학적인 장점도 함께한 사건이었다. 한편 미·일 수호조약(1854년), 통상조약(1858년) 체결 전후로 서구 열강은 일본에 신경을 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일본에게 통상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15~20년 벌어준 것이었다. 크림전쟁(1853~56), 제2차 아편전쟁(1856~60), 남북전쟁(1861~65), 보불전쟁(1870~71) 등으로 미·영·프·러·독 등 주요 서구 열강이 전쟁 중이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내부적인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막부는 자체 개혁을 하고 반막부는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이상이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7가지 이유다. 이외에도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 화폐경제의 붕괴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모두 막부의 힘이 빠지는 것으로, 반막부파의 성공에 일조했다. 이런 성공 요인을 떠올리면서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난제를 뚫고나갈 계기를 찾아보자.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는 메이지 유신 당시의 일본보다 훨씬 중대하고 광범위하다. 북핵 문제의 해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일자리 창출, 저출산·고령화 대책처럼 큰 흐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과 더불어 지방 선거, 헌법 개정, 부동산 가격 안정, GM사태 해결 등의 문제도 도사리고 있다.

우선 큰 흐름을 읽는 키워드는 메이지 시대에 등장했던 ‘부국강병’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말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안보위기 극복과 경제 부국 건설은 늘 시대적 과제였다.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철학, 정책수단과 방법이 문제일 뿐이다. 사상과 철학이 빈곤한 정책은 쉽게 무너진다. 메이지 시대 존왕양이(尊王攘夷) 파와 공무합체(公武合體)파 간에 전쟁과 정변으로 얼룩진 상처를 남기면서 치열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다. 사상적 배경이 튼튼한 존왕양이가 결국 승리하고 종국에는 존왕개국으로 가면서 건국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치열한 논의 과정이다. 포퓰리즘을 버리고 국회에서 여야를 떠나 부국강병의 길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현안은 북핵 문제다. 북핵 문제에 여야가 따로 있겠는가. 색깔론에 매몰돼선 곤란하다. 안보는 하드웨어적인 국방력도 중요하지만 역대 전쟁의 역사를 보면 국제 외교에서 결판난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그런 부분이 부족해 보인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를 둘러싼 미·중·일·러 4강 체제는 굳건하다. 이들 국가와 긴밀한 협조 없이는 안보를 장담할 수 없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당시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취약했던 일본이 양대 강국을 다 이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국제외교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국제외교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갖춘 인사를 국제외교 분야에 배치해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어내면서 미묘한 부분에서도 정교하게 퍼즐을 맞춰야 한다. 다행히 최근 북핵 관련 정상회담 추진 등 외교채널이 정상 작동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다음은 경제 문제다. 일본이 지난 20년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보냈듯이 단기간에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이 겪었던 20년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는 조건이 다르다. 그들은 에도시대부터 축적된 에너지가 살아 있다. 메이지 시대를 거쳐 근육이 생겼고 1950~60년대 고도 성장기에 이르러 선진 강국의 반열에 섰다. 최근 일본의 경쟁력이 살아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이런 내공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화 기간도 짧고 이제 겨우 선진국 문턱에 발을 걸쳤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과 노하우가 우리에게는 빈약하다. 경제학적으로 일자리는 성장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동안 이것저것 다 해봐도 답이 안 나오니 이제 방법을 바꿔 소득이 주도하는 성장으로 치환법을 쓰고 있다. 공격을 받자 혁신성장을 함께 추진하는 것으로 경제정책이 믹싱됐다. 이것저것 다 해보면 좋겠지만 경제에는 제약조건이란 게 있다. 돈과 시간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자원을 집중하길 바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이다. 노조 문제와 규제개혁 문제다. 둘 다 대타협을 이룬다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일본의 고용시장에 훈풍이 불고 있다. 우리는 냉냉하다. 일자리 해결을 위해 단기적으로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답이 아니란 걸 정부도 알고 있다. 민간 부문에서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어려움은 점점 가중될 것이다. 산업구조와 특성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제조업 경쟁력이 살아나고 있는 일본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제조업 중 경쟁력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될성 부른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최근 GM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 선제적 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일자리 문제의 고질병 원인은 노조에게도 있다. 현대차 노조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는다.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북구에서 이뤄진 노사정 대타협이 우리나라에서는 왜 되지 않는지 테이블에 올려 놓고 끝장을 봐야 한다. 공멸할 것인지 공명심을 가지고 국가를 위한 선택을 한 메이지 유신의 사무라이처럼 후손에게 명예로운 선조가 될 것인지 이제 우리도 선택할 때가 됐다. 사무라이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체 해체 방식’을 택했다. 대단한 결단이다. 그걸로 사무라이 중 상당수가 어려움을 겪었다. 칼을 뺏긴 사무라이는 영혼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산화됐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사무라이들의 사회적 자살”이라고 말한다. 노조가 그렇게 하란 말은 아니다. 적어도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치열한 논의를 하란 뜻이다. 일자리 문제를 푸는 첫 번째 열쇠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부국강병으로 가기 위한 선결 요건이다.

다음은 앞으로 있을 헌법 개정 사항 중 지방분권에 관한 것이다. 정부안에 이미 지방분권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돼 있다. 지방분권은 자치행정, 자치입법, 자치재정, 자치 복지 등 4분야에 걸쳐 실질적인 자주권과 책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중앙의 권력을 지방으로 넘기기만 한다고 분권이 되는 건 아니다. 교통정리 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돈을 넘기면서 국가사업과 지방사업의 가름마도 다시 타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에 일본과는 근본 자체가 다르다. 그만큼 권한 이양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에도막부 시절 무소불위의 쇼군들은 각 번에 ‘무가제법도’라는 반역통제 사항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번정부에 주었다. 번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일본의 경쟁력을 키웠다.

북핵, 개헌, 4차 산업혁명, 청년실업 등 난제 수두룩


▎메이지유신 초기 기차.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양쪽에 다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 본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업을 넘기고 싶은데 미덥지 않아 못 넘기고 상왕을 하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자식도 늙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립성이 없는 자식이 나중에 사업을 물려받으면 이미 이미 때가 늦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국가와 지방 간의 문제도 비슷하다고 본다. 우리나라 지방정부가 많이 업그레이드되긴 했지만 아직 중앙정부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책임 장치도 빈약해 보인다. 이런 문제를 동시에 해결 하면서 지방분권이 이뤄질 때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에도막부의 서남지역 웅번들이 외국 군대와 싸울 정도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배경에는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가치가 크게 작동 했다. 자율과 책임의 기제가 작동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다면 연방정부 수준의 지방분권을 못할 것도 없다. 국가경쟁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메이지유신의 성공 과정과 우리 경제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대양이적 자세로 일본을 바라보자.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그들처럼 시대정신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답을 찾고 담대한 마음으로 대타협을 해야 한다. 아베가 가장 존경한다는 요시다 쇼인은 시대정신을 위해 제자들에게 젊은 피를 끓게 하는 좌우명을 던졌다. ‘목숨을 바쳐 정성을 다하면 움직이지 않는 게 없다(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건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쇼인의 좌우명처럼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해 부국강병에 기여하는 것이다.

※ 존왕양이(尊王攘夷) -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다. 1857년 흑선 내항으로 일본이 미국에 의해 원하지 않는 개항을 한 이후 등장했다. 일본 천황을 지지하고, 서구 열강은 배척할 것을 주장한 존왕양이파의 정견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 공무합체(公武合體) - 에도막부 말기(1850년대~1860년대) 일본 조정(公)의 전통적인 권위와 막번체제(막부와 여러 번을 연계해 지배하던 체제)의 통치력을 통합하려는 정책론·정치운동을 일컫는다. 공무합체론(公武合體論)·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공무일화(公武一和) 등으로도 불린다.

1428호 (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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