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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 맞은 한반도] 이번에는 불신의 악순환 고리 끊나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대기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 약속보다 북·미 신뢰 회복이 급선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끝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 전쟁포로와 실종자 유해 송환·발굴 등의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이대로 이행된다면 현대사의 획을 그을 만한 내용이다. 특히 북한과 미국이 70년 상호불신의 적대 관계를 끝내는 출발점이라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이번 회담이 실질적인 냉전 종식이자 현대사의 변곡점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 회담이 다변적인 정상회담, 문화와 스포츠 분야의 풀뿌리 교류, 상대에 대한 편견과 불신의 극복으로 이어진다면 한반도는 대전환기를 맞을지 모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열었다. / 사진:연합뉴스
싱가포르에서 열린 역사적인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의 목적은 북한 비핵화였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미국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안전보장(CVIG)의 주고받기를 목표로 북한과 힘든 협상을 벌여왔다. 마이크 폼페이오가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장으로, 두 번째는 국무장관으로 평양을 두 번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고 카운터파트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협상을 벌였다. 김영철-폼페이오 협상을 기반으로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와 미국의 대북 협상 전문가인 성 킴 주 필리핀 대사가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 전날 밤까지 치열한 줄다리기를 했다.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미국은 CVID 이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못을 박았다.

포괄적·전체적으로 회담 결과 봐야


▎사진:연합뉴스
이런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에 비핵화의 방법과 단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이 단 한 번의 일괄타결에서 단계적 비핵화로 후퇴했다. 선 핵폐기, 후 보상이라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이른바 리비아 모델은 자취를 감췄다. 핵 과학자들을 초빙해 비핵화에 관한 ‘과외공부’를 한 트럼프가 비핵화라는 것은 여러 단계에 걸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어려운 과제라는 현실을 알게 된 결과로 보인다. 트럼프의 현실주의 선회에도 CVID 고수란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회담 전날 밤 회담 준비에 몰두해야 할 김정은이 싱가포르 관광명소를 둘러보러 외출할 때 일부 언론인들은 김정은이 무슨 자신감을 가진 것 같은 눈치를 챘다. 트럼프는 두문불출 했다.

6월 12일 김정은과 트럼프는 단독 회담, 확대 회담, 업무 오찬을 가졌다. 그리고 진통 끝에 정상회담의 공동 합의문이 나왔다. 합의문에는 CVID는 들어있지 않았다. 4개항으로 된 합의문의 제3항에 “북한은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commit)한다”는 짧은 한마디만 들어갔다. 이와 달리 미국은 북한이 대북 적대정책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한·미 합동 군사연습을 중단한다고 약속했다. 트럼프는 기자들 앞에 섰다. 귀국 후 보수진영과 반트럼프 언론으로부터 받을 공격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기자들은 트럼프에게 북한에 일방적인 양보를 한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많은 기자가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Trump haters)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북한에 내어준 것 없다,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합의문에 나와 있다, 북한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북한은 곧 비핵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트럼프는 CVID가 합의문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두고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북한을 불신하는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벌써 “그것 봐(I told you)”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김정은에게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세계 외교무대의 데뷔전이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대통령과의 세기적 담판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한몸에 받으면서 화려한 무대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CVID를 내어주지 않고 트럼프와 인간적인 친분을 맺고 한·미 합동 군사연습 중단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희대의 흥정꾼(deal maker) 트럼프는 김정은을 몇 만 명에 하나 나올 재능 있는 협상가라고 불렀다. 단기적으로 합의문만 가지고 보면 싱가포르의 도박에서 이긴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이다.

단기적 승자는 김정은, 장기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방한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회담 결과는 트럼프의 말 대로 포괄적·전체적으로 봐야 한다.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에 큰 기여를 했다. 김정은을 처음으로 국제무대로 불러낸 것은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드는 데 피할 수 없는 첫걸음이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회담을 앞두고 김정은이 진정성을 가졌는가는 만나서 1분 안에 간파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진정성이 없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트럼프가 회담 후 김정은을 훌륭한 사람, 최고의 협상가라고 칭찬했다. 합의문에 CVID가 들어가도 서로를 믿지 못하면 이행을 확신할 수 없다. CVID 대신 포괄적인 의미의 비핵화 약속이 들어가도 신뢰가 있으면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추진할 수 있다.

지난 70년 동안 북·미 간 적대관계는 상호불신에서 비롯됐다. 미국이 아무리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해도 북한은 믿지 않았다. 북한이 어떤 약속을 해도 미국은 믿지 않았다. 불신은 불신을 낳고, 불신의 악순환은 두 나라 관계를 무한대결의 구도에 가뒀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이 불신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다. 김정은도 트럼프와의 만남을 통해서 국제사회의 규범(norm)을 알아가는 과정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가 싱가포르 회담에 인민무력부장 노광철을 대동한 것도 미국과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을 군과 공유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것이 북·미 정상회담의 최대의 성과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서로를 서로의 나라로 초청했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올 가을 세 번째로 만난다. 문재인·트럼프 두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이어가면서 신뢰를 쌓아 현안을 풀어가면 된다. 일본 총리 아베는 아베 대로 김정은과의 회담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진핑과 푸틴의 가세도 중요하다. 한국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냉전시대와 같은 한·미·일 대 북·중·러의 세력균형 구도가 재연되는 것이다.

냉전구도의 재연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주변 4강이 모두 참여하는 북방 경제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못지않게 대북 경제 진출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나라가 바로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원산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에 관광투자를 노린다. 동해안은 김정은이 관광산업 중심지의 하나로 생각하는 원산이 포함된다. 부동산 개발업자 트럼프도 동해안에 주목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아름다운 동해안은 호텔 사업에 적당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동 강변의 트럼프 타워를 제안했지만 부동산 천재의 안목으로는 동해안이 더 유망한 것 같다.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 이행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베를린의 쾨르버재단 초청 강연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으며,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며,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의 결단을 내린 직접적인 동기의 하나로 생각된다. 평창은 판문점으로, 판문점은 싱가포르로, 싱가포르는 다시 서울과 평양으로 연결된다. 이 길고 힘든 여정에서 김정은-트럼프의 신뢰관계는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정상회담 합의문에 CVID 들어가지 않았다고 비핵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회를 거듭하는 다변적인 정상회담, 문화와 스포츠 분야의 풀뿌리 교류, 상대에 대한 편견과 불신의 극복이 평화의 관건이다. 그 평화의 과정에 비핵화가 있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있다.

김정은은 빨리 대북 경제제재를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를 하나씩 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북한이 바라는 북·미, 북·일 수교를 앞당기는 길이다. 핵·경제 병진 정책에서 핵을 내려놓은 김정은에게는 경제건설이 급선무다. 비핵화 이행, 북·미, 북·일 수교로 대북 투자가 러시를 이뤄야 한다.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장기 저리 차관도 필수적이다.

트럼프에 따르면 북한은 조만간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할 것이다. 서울로, 도쿄로, 워싱턴과 뉴욕으로 핵을 운반하는 것은 미사일이다. 미사일의 핵심 기술은 엔진과 유도장치다. 그것을 개발하는 시험장을 폐쇄하는 것은 비핵화 조치의 중요한 일부다. 남·북, 북·미, 북·일 간에 신뢰가 쌓이고 교류가 늘어나는 데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도 가속이 붙을 것이다. 신뢰라는 소프트웨어 없이 CVID라는 하드웨어는 믿을 수 없다는 인식 위에서만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낙관론은 항상 빗나가지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낙관론자들이다.

지리의 저주가 지리의 축복으로?

지리전략가(geostrategist)들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국은 강대국 간 대결의 무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지리 운명론을 주장한다. 하퍼드 매킨더와 니콜라스 스파이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설은 21세기형 정보·통신·교통의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답일 수 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 경의선과 경원선이 복원되고 남북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종단하는 고속도로가 열리면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접점이 된다. 지리의 저주가 지리의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평화가 정착돼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1439호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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