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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4) | 오명 전 과학기술 부총리] 

 

이필재
70대는 가장 행복한 시기...“평생 현역으로 살겠다”

▎인터뷰를 한 식당 라비앙로즈에서 오명 전 부총리가 포즈를 취했다. 영업시간 전이었는데 기자와 마실 커피를 팔순을 바라보는 그가 손수 날랐다. / 사진:김현동 기자
“나이가 들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필요합니다. 젊은 사람들 일 간섭하지 말고 그 세계에 빠져드는 게 ‘노추’를 피하는 길이죠.” 오명 전 과학기술 부총리는 자기만의 세계로 소설 집필을 구상 중이다. 모델은 일본의 여성 작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다. 자신의 삶을 베이스로 픽션을 가미해 소설의 줄거리를 완성한 후 여성 작가와 공동작업을 벌일 생각이다. “관련 팩트 중에 국가 기밀이 많고 당사자들이 살아 있어 논픽션으로는 부적합해요. 문학엔 소질이 없어 여성 작가를 참여시켜 불모지대처럼 연애 이야기도 집어넣으려 합니다.”

그는 소확행(小確幸)의 지지자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좇는다. 삼시세끼 끼니 걱정 없고, 건강한 아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여행 다니고, 자녀들은 열심히 살아 제몫을 해내고 후배들이 인생 상담 차 찾으니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은 주관적인 겁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매주 후배들과 골프도 치고 둘레길도 걷죠.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70대는 욕심만 버리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입니다. ‘당신은 살 만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할지 모르지만, 과거 다들 못 살 때도 행복해 하는 사람은 행복했습니다.”

후배들이 그를 따르는 건 과거 도울 일 있을 때 돕고 평소 베풀었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 가든 화제를 독점하지 않고 남들만큼만 얘기하는 N분의 1 법칙, 1분 얘기하고 2분 듣고 3분 생각하는 123법칙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오 전 부총리는 이공계 출신 첫 부총리다. 네 정권에서 장관을 지냈다. 보수 정부에서 주로 일했지만 진보 정부에도 몸담았다. 진보 진영 사람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가 되는 테크노크라트였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 과기 부총리로 입각할 당시엔 노무현 대통령이 삼고초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3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을 했고, 동아일보 사장·회장과 아주대·건국대 총장을 맡았다. 그 후 웅진에너지 등의 회장으로 재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마흔하나에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돼 장관 재임기까지 8년여 간 근무했다. 집집마다 편지를 배달하고 전화를 놓아주던 말석 부처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그는 정보화 사회의 주무 부처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체신부 간부들에게 그는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은 모두 우리 체신부가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임 후 1년 내내 세미나를 열어 공부하며 설득하다 보니 간부들의 생각이 서로 같아졌다. 나중엔 국장들이 2000년대 정보화 사회의 밑그림을 스스로 그렸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생각이 점차 같아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버텀업으로 브레인스토밍이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조직의 마스터 플랜을 스스로 짜게 만들어야죠. 리더는 이 전체의 과정을 조율하는 지휘자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단원 중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주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죠.”

전체 판세를 읽고 큰 방향을 결정하는 한편 필요할 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집행의 타이밍에 대한 판단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가 주도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한국철도기술연구원을 만들 때 그랬다. 철도기술연구원엔 오명홀이 있다. 현존하는 국내 청사 강당 중 개인의 이름이 붙은 유일한 곳이다. 행정가로서 그의 주요 공적으로는 한국의 통신혁명을 주도한 것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전화 신청시 당일 가설, 4DM 반도체 개발, 미국보다 빠른 초고속 인터넷을 실현한 광케이블통신망 구축 등이 당시 이루어졌다. TDX는 외국 정부가 벤치마킹하는 국가 연구개발(R&D)의 성공 모델이다. 한국이 IT 강국인 동시에 정보복지 국가가 된 것도 그의 재임시 정보화사회로의 이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보 독과점에 따른 권력과 부의 편재가 생겨나지 않도록 면밀히 준비한 덕이다.

“남북관계가 격변하는데 북한이 개방을 하면 우리나라가 1차적으로 정보통신 인프라를 깔아줘야 합니다. 북의 경제는 물론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될뿐더러 우리에게도 이익이죠.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았을 때 김정일의 오른팔과 북의 엑스포 참가를 전제로 이 협상을 마쳤는데 남파간첩 이선실 사건으로 백지화되고 말았죠.”

교통부·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있을 땐 고속철도를 건설하는 한편 한국형 고속열차를 개발했고 세계 1위인 인천국제공항의 초석을 놓았다. 이 공항의 골프장 자리는 자가용 비행기 시대에 활용하기 위한 제5, 제6 활주로이다.

“당시 영종도와 무의도 일대 바다를 매립해 3000만평 규모의 세계자유도시를 만들어 동북아 금융 허브로 육성하려 했는데, 복잡한 정치적 사정 등이 작용해 무산됐죠. 지금도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였고,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자유도시’가 성사돼 홍콩에 있던 해외자금이 들어왔다면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을 겁니다.”

초대 과기 부총리 시절엔 우주기술 개발에 앞장섰다. 첫 우주인을 배출했고 국내 첫 인공위성 나로호를 쏘아올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인공위성이나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발사 기술은 같다. 그는 공직자는 역사 앞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윗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아랫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 애써야 합니다. 해당 정책에 가장 밝은 간부들의 평가가 역사의 평가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아랫사람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는 경기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것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꼽는다. 고된 훈련으로 모진 고생을 했지만 그 덕에 허약했던 체력이 중간 이상으로 강해졌고 강인한 정신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원규 경기고 교장은 “육사가 장차 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이 될 것”이라며 진학을 권했다고 한다. 정작 담임교사는 유복한 집안에 수학을 잘하는 오명이 육사에 가겠다고 하자 당황했다.

“무엇보다 애국심, 동료와 힘을 합치는 협력의 정신,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얻게 됐죠. 이게 저의 리더십의 바탕이 됐습니다.”

육사 생도 생활은 그에게 서울공대 편입, 미국 뉴욕주립대 유학으로 이어진 일종의 코스워크 같다. 그의 버킷 리스트는 소설과 더불어 자신이 한 일을 정리해 책으로 내는 것이다. 이 일들을 마무리해야 지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나는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현역으로서의 삶을 매듭짓는 건 아니다. 그는 현재 국내 최고 수준의 과학자와 영재들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국내에 유학 중인 외국 대학생들에 대한 멘토링 사업, 은퇴 과학자의 해외 봉사활동 지원도 하고 있다. 몇 개 단체의 장도 맡고 있다. “은퇴하지 않는 영원한 현역으로 일하다 어느 날 하느님이 부르시면 가려 합니다”고 덧붙였다.

묘비명은 한국의 IT 그랜드 디자이너

그에게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묘비명은 ‘한국의 IT 그랜드 디자이너 여기 잠들다.’ 이 나라가 너나없이 힘들었던 시절 태어나 늘 할 일과 도전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 중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기에 행복합니다. 이제 우리 목표는 ‘국민이 가장 행복한 선진국’이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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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호 (201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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