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집사와 대리인의 차이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기관투자가는 자금 운용을 맡긴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집사(steward)일까, 대리인(agent)일까? 집사와 대리인은 어떻게 다른가? 보건복지부가 7월 10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을 7월 말까지 확정해 시행하겠다고 거듭 밝히자, 상장회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연금은 기금의 규모가 635조원에 이르고 삼성전자·현대차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많은 대기업의 최대주주이거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회사만 해도 근 300개이다. 국민연금이 이 막대한 지분의 의결권을 적극 활용한다면 웬만한 대기업이라고 해도 지배권·경영권의 향방이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좋게 보면 기관투자가들이 고객이 맡긴 돈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관리·운용해야 한다는 원칙이자, 가이드라인이다. 그러나 명분이라면 이미 현행 법률의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에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신탁법에서는 기관투자가의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와 함께 충실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시장법에서는 의결권 행사 내용과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그 사유 등을 공시하도록 규정해 기관투자가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은 명분이 아니라 코드의 실질 내용이다. 코드는 2010년 영국에서 처음 제정된 관례에 따라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외에도 적극적인 경영관여(management engagement)를 권고한다. 의결권 행사는 기관투자가의 책임에 관한 기존의 법령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코드의 차별되는 특징은 경영 관여 활동에 있다. 코드에서 예시하는 경영 관여는 회사의 임원·이사 선임, 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현안 등에 대해 기관투자가들이 단독으로 또는 공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만약 국민연금이 이런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한다면 일부에서 제기하는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단지 기우(杞憂)만은 아닐 것이다.

스튜어드십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집사(또는 청지기)의 태도와 기능 정도이다. 평소에 낯선 이 말이 영국에서부터 기관투자가의 책임을 대표하는 용어가 된 배경이 흥미롭다.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9월, 미국의 거대한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휩싸이고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금융위기의 원인이 은행·금융회사의 위험관리 부실에서 비롯됐고, 이 과정에서 주식 지분을 많이 가진 기관투자가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고 판단했다. 상장회사들은 우리나라 상황과 정반대로 주인 없는 회사처럼 경영했고, 기관투자가들은 단기 이익에 집중하며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부재지주처럼 처신했다는 것이다. 이에 영국 정부는 금융자본가에게 자율규제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대책반 책임자는 모건스탠리 전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워커 경(Sir Walker)이었다. 워커는 대책반 구성 후 불과 9개월 만인 2009년 11월에 보고서를 작성,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처음 제정된 스튜어드십 코드이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새로 만든 내용이 아니라 영국의 기관투자가 협의회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기관주주 및 대리인의 책임 원칙’을 포장만 바꿨다는 사실이다. 고객이 위탁한 자산을 운용하는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회적 비판의 궁지에 몰렸던 기관투자가 또는 금융자본이 예전에 자신이 만든 매뉴얼로 화려하게 재기한 셈이다. 기관투자가는 워커 보고서를 계기로 기존의 대리인에서 집사의 새로운 타이틀을 달고, 산업자본을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는 책임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의 주범이 같은 문제의 해결사로 반전되는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영국에서는 금융자본이 산업자본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론적 관점에서도 기관투자가에게만 별도로 집사의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가도 회의적이다. 상장회사의 경우 주인(주주)과 대리인(경영자)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지금의 다수설이다. 주인과 대리인은 틈만 나면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주주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는 주주의 관점에서 경영자를 감독·통제해야 한다는 것이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의 요지다. 소수설이지만 여기에도 집사이론(stewardship theory)이 있기는 하다. 경영자는 주주의 재산 증식을 위해 성심성의 노력하는 사람이니 집사로 봐야 하며 집사인 경영자를 견제·통제하기보다는 믿고 맡기는 것이 경영성과가 더 낫다는 이론이 있다. 예를 들면 집사 이론은 이사회 의장직을 경영자가 겸임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대리인 이론은 양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리인 이론에서 보면 자금을 위탁한 고객이 기관투자가 또는 금융회사를 좀 더 효과적으로 견제·통제할 수 있는 장치에 관한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금융 자본가 스스로 선택한 착한 포장효과 때문인지 이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도 국민연금의 코드 가입과 시행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코드 가입은 기금의 수익성과 안정성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는 좋든 나쁘든 고스란히 국민에게 귀착될 것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코드 도입이 기금의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 우리 국민은 보험료를 지금보다 더 내고 보험금을 덜 받는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정부는 당연히 정반대 상황을 목표로 삼고 또 그러기를 기대한다. 즉, 스튜어드십 코드는 상장회사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며 연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의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세 마리 토끼를 잡을지, 아니면 단기 자본주의 폐해를 증폭시키고 연금 사회주의 후유증을 남길지는 지금으로서는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기대보다 우려가 많다. 이와 관련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브라이언 체핀스(Brian Cheffins) 교수의 비판은 우리도 경청할 만하다. 체핀스 교수는 기관투자가의 분산투자 구조상 수많은 투자기업에 일일이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 수익평가 및 보상주기가 1년 이하 단기이기 때문에 상장 회사의 장기 가치 추구를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 기관투자가의 경영관여는 일반(개미) 투자자와 이해상충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등등 코드의 문제점과 한계를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의 코드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계가 있음을 추가적으로 감안하면 일반 기관투자가와 달리 연기금의 코드 가입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1443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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