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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8) 자산(子産)의 정치] 군자의 네 가지 道 두루 갖춰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정나라 명재상으로 이름 남겨…세제·법 정비하고 예법 국익에 활용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일찍이 공자는 어떤 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은혜로운 사람이다.”(논어 헌문편). “그는 군자(君子)의 도(道) 네 가지를 갖췄다. 몸가짐이 공손하고 윗사람을 공경했다. 백성을 은혜롭게 보살폈고 백성을 의롭게 다스렸다.”(논어 공야장편).

이처럼 공자가 높이 평가한 이는 공손교(公孫僑), 자(字)가 자산으로 정나라 재상을 맡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불린다. 열국지에서는 “우리의 아들딸을 자산이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네 / 우리 논밭에서 나는 수입을 자산이 늘려주시네 / 자산이 죽고 나면 그 누가 우리 자손과 살림을 보호해줄까?”라는 정나라 백성들의 노래를 소개하며 “이 노래만으로도 자산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산은 정나라가 매우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재상으로 발탁됐다. 춘추시대의 대표적 약소국이었던 정나라는 진(晉)나라와 초(楚)나라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껴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초나라를 지지하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았고 진나라와 화친을 맺으면 초나라의 보복이 가해졌다. 외국의 침략을 받은 횟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더구나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계속됐다. 정변이 일어나 군주가 쫓겨나고 집권자가 살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숙청과 보복의 칼바람으로 수많은 신하가 죽어갔다. 자산의 아버지 자국(子國)도 이 과정에 목숨을 잃는다. “밖으로는 나라가 작아 강국의 핍박을 받고, 안으로는 가문이 비대하고 총애를 다투는 이가 많아 다스리기가 어렵다!”라는 자산의 한탄은 당시 정나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재상에 발탁돼

하지만 자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열국지에 소개된 자산의 업적을 그대로 옮기면, 그는 도시와 시골의 실정에 맞게 법제를 제정했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직분과 책임에 맞게 성실히 복무하도록 했으며 정전제를 기반으로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었다. 지배층의 수입 중 일부를 징수해 백성을 위한 구휼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충성스럽고 검소한 사람을 높여주고 교만하고 사치하는 사람을 억눌렀다. 정변을 일으킨 자들을 주살했고 신상필벌을 엄격히 적용했다. 토지의 경계를 정리하고 구역마다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도록 했다. 법조문을 새겨놓은 큰 솥을 만들어 법치를 천명했으며 향교를 활성화하여 교육을 진흥시켰다. 덕분에 정나라는 차츰 부강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자산의 정치는 특히 두 가지 수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그는 예법(禮法)을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자산은 젊은 시절부터 철저하게 예를 지켜 존경받았는데, 한 번은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모아 장사를 지내준 적이 있었다. 권력자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산을 죽이려 했지만 “자산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예를 베푼 것입니다. 예를 지킨 사람을 죽이는 건 상서롭지 못합니다”라는 주위의 만류에 뜻을 접어야 했다. 그는 “모든 행동이 예를 엄수하여 조금도 예에서 벗어나는 바가 없었는데” 자신에게 상이 내려졌을 때도 예법의 조항에 어긋난다며 사양한다. 이러한 자산의 언행은 나라 밖으로까지 퍼져 숙향·계찰·비심 등 당대의 현자들로부터 예를 안다며 극찬을 받았고, 진나라 군주 평공도 “자산은 참으로 박학다식한 군자로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예에 대한 권위를 공인받은 것이다.

자산은 바로 이 같은 평판을 가지고 예법을 국익에 이용한다. 자산이 활동할 당시만 해도 주나라 예법인 ‘주례(周禮)’의 권위가 살아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힘을 잃고 유명무실했지만 보편적 준칙으로서 그것이 갖는 명분만큼은 여전했다. 각 제후국들이 겉으로나마 주나라 왕실을 받들었듯이 주례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주례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져 공공의 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자산은 이 주례의 규정을 제시하며 진(陳)나라에서 요구한 공물의 양을 대폭 줄였고 침략할 트집을 잡으려던 진(晉) 나라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진나라의 실력자 조문자가 “자산의 말이 예법에 맞다. 이를 거역하면 우리가 불리하다”라고 대답했고, 또한 “자산이 예로 대항했기 때문에 진나라 육경이 두려워했다”라고 사서에 기록될 정도다. 예의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이 명분으로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자산은 주례의 법도를 내세우며 정나라 내부의 권력자들도 차례로 제압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자산은 언로와 소통을 중시했다. 정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향교(鄕校)에 모여 정치를 비평하길 즐겨했다. 워낙 시끄럽고 나랏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연명(然明)이라는 대신이 자산에게 향교를 헐어버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한다. 그러자 자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람들이 향교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정치의 득실을 논하고 정책의 잘잘못을 논한다면 참으로 좋지 않은가? 그것을 보고 그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내가 추진하고 그들이 싫다고 하는 것은 내가 고치면 되지 않겠는가? 그들은 나의 스승일진데 왜 향교를 헐어 버려야 하겠는가? 나는 착한 일을 성실하게 하여 원망과 비판을 줄인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권위를 내세워 원망과 비판을 방지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더욱이 권위를 내세운다고 하여 사람들의 의논을 제지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을 막는 것과 같아서 가득 찬 물이 일시에 터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된다.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작은 물길을 열어 자유롭게 소통시켜 놓아야 한다. 부디 나로 하여금 비판을 듣고 약석(藥石)으로 삼도록 해 달라.”(춘추좌씨전).

언로 막히지 않도록 노력

언로가 막히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좋은 아이디어가 사장될 뿐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직언과 고언들을 놓쳐버리게 된다. 불만과 원망이 해소되지 못해 머지않아 폭발하는 순간이 온다. 나라 전체에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평소에 말의 통로를 열어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개진되도록 해야 한다. 더욱이 향교처럼 여론이 집약되는 공간이 있으면 그를 통해 정치의 잘잘못과 정책의 방향 등을 점검할 수 있다. 여론의 비판이 나오면 반성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며, 지지가 나오면 더욱 흔들림 없이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자산의 이 발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자주 언급되는데 언로와 비판 수용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산의 말을 하나 더 소개한다. “만약 나라에 유리한 것이라면 나의 생사 따위는 관계치 않고 추진해 갈 뿐이다. 내가 듣기로 일을 잘하는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요컨대 열린 태도와 치열한 노력,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자산은 명재상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43호 (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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