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무역전쟁 탓에 존폐 기로에 놓인 WTO] 분쟁 조정 못하고 강제력 없어 무용론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GATT→WTO→새 무역기구?…자유무역 vs 보호주의 진영 대립 가능성도

▎지난 20년 간 세계 자유무역을 선도해온 WTO가 최근 무역전쟁으로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 사진:플리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하다간 고용 등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발생할 수 있다. 리더 간 정치적 합의가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7월 25일(현지시간) 세계무역기구(WTO) 호베르토 아제베 사무총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미국·중국, 유럽연합(EU) 간에 무역분쟁에 우려를 나타내고 자제를 촉구했다. 무역마찰은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주요국 정치 지도자들의 대화에 나서달라는 것이다. 이는 WTO가 무역전쟁을 막을 힘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일견 세계무역체제의 붕괴를 방관하는 듯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튿날인 26일 윌버 로스 미 상무부 장관은 수입산 자동차 관세 부과 문제에 대해 “EU와의 협상 중에 관세를 매기지는 않겠지만 조사는 계속할 것”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기자들에게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무역확장법 232조를 통해 수입 자동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현재 미 상무부는 수입 자동차의 국가 안보 저해 요인이 있는지 조사를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이웨이’를 고수할 것이며 주요 교역국과의 무역분쟁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중국 역시 지난 3월부터 이어진 WTO의 수 차례 경고에도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에 맞불을 놓으며 무역전쟁을 촉발했다. 이쯤 되면 WTO의 존재 의미에 의문이 든다.

WTO는 세계적으로 무역장벽을 허물어 자유무역을 촉진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국제기구다. 보호무역을 취하는 나라에는 불이익을 주며, 국가 간 무역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가 간 대립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6일 있었던 WTO 회원국 회의에서는 데니스 시어 미국 제네바대표부 통상담당 대사와 장샹천(張向晨) WTO 주재 중국 대사가 서로 “중상주의적 국가”라고 비방하며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WTO에 권위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WTO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다”고 보도했다. WTO의 존폐 여부까지 도마에 오른 실정이다.

중국이 조약 위반해도 대응 못해


현재의 WTO의 위기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 1995년 조직 출범 이후 교역 감독에서 중립성을 지키기보다는 WTO 조직 논리에 따라 강대국의 손을 들어줬다. 국제 조약을 어기더라도 이를 제제하지 못하는 국제기구의 태생적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중국에 대한 관용이 대표적 사례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한 후 서방 국가들은 중국이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규칙을 따라 줄 것으로 기대했다. 가입 당시 중국도 “상호 시장 개방의 원칙을 따른다”고 공약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중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 지급과 해외 투자자금에 대한 규제, 수입 제품에 대한 유·무형의 무역장벽을 쳐서 자국 경제 보호에 나섰다. 중국은 국유 기업을 통해 불투명한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해 시장을 왜곡시키는 한편 철강 등 제품의 공급 과잉을 초래했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엄격한 규제를 받는 한편 시장 진입의 대가로 지적재산권을 양도를 요구 받고 있다. 이런 조치들은 WTO 조약 위반이지만 현 체제에서는 중국의 이런 행위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 중국의 이런 조치는 원고가 입증 책임을 지는데 중국이 자료 공개를 거부하는 데다 자칫 더 큰 무역보복으로 확산될 수 있어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WTO도 “중국 정부가 기업을 관리하고 있다”며 자료 제공을 요구한 바 있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해왔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2009년 미국산 자동차와 닭고기 제품에 반덤핑 조사에 나서는 등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WTO가 자유무역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과 불신이 커진 이유다.

WTO는 1년 운영비로 19억7508만900스위스프랑(약 2조 2394억원, 2016년 기준)이란 큰 돈을 사용한다. 자유무역 체제 유지를 희망하는 회원국들이 낸 분담금으로 예산을 조달하기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도 588만9434스위스프랑을 내고 있다.

이런 기류는 지난 10년 간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확대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같은 신체제 도입 움직임이 나타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당초 자유무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서 논의됐다. 세계 경제를 한 데 묶어 자유무역을 벌이자는 목표로 협상이 진행됐다. 냉전 체제 붕괴 이후 WTO 체제가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자국 산업을 보호와 압축 성장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참여를 꺼리면서 논의가 더 깊어지지 못했다. 일종의 그랜드 FTA 구상이 무산되면서 WTO는 무역협정의 틀을 제공하는 수준으로 입지가 축소됐다. 이후 이해관계가 맞는 국가끼리 양자 간 FTA가 일반화됐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TPP·RCEP 등 역내 경제를 묶는 체제가 보편화됐다. WTO는 갈 길을 잃은 셈이다.

미 몽니에 상소기구 작동 불능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앞장 서서 미국이 WTO를 탈퇴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만약 미국이 WTO에서 이탈할 경우 자국중심주의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부쳐 다른 회원국들의 연쇄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 무역질서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 WTO는 무역분쟁 심의조차 못할 위기에 놓였다. WTO 상소기구 최종심 상급위원회의 의결 정족수가 부족해서다. 수석위원의 정수는 7명인데, 현재 3명이 임기 만료로 퇴임했고, 9월 추가로 1명의 임기가 만료돼 3명 만 남게 된다. 수석위원은 164개 회원국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은 자국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상급위원회 수석위원의 임명을 저지하는 중이다. 현재 빗발치고 있는 제소를 2019년까지는 처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은 WTO 심의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노린 듯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등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더욱 강경한 자세로 나서고 있다. 리카르도 라미레스 에르난데스 WTO 상소기구 전 수석위원은 5월 고별 연설에서 “WTO가 서서히 목 졸려 죽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WTO 개혁에 주요국 공감대 … 기싸움 치열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국제 자유무역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위키피디아
상황은 고약해졌지만 WTO를 폐기할 것인가 고쳐 쓸 것인가,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측면도 있다. 최근 주요국 정상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일단은 고쳐 쓰자는 분위기다. 중국과 EU는 7월 16일 WTO 개혁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WTO 개혁은 EU가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EU는 WTO에 기술 강제 이전과 산업 보조금에 대한 규정 마련을 촉구했다.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주장으로 읽힌다. 미국의 공세에 협력하자는 중국의 제안도 거절했다. 미국의 강공에 부담을 느낀 중국도 WTO의 틀 안에서 해법을 찾자며 일단 EU의 주장에 맞장구 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7월 30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서 열린 제레미 헌트 영국 외무부장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국과 미국이 WTO 체제를 통해 무역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 속에 EU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에 맞설 뜻이 있는 국가를 찾는 중국의 긴박감이 감지된다”고 외교가 반응을 전했다.

일단 미국도 논의에 동참할 뜻은 있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 2일 네덜란드 총리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WTO 탈퇴 계획은 없다. 그러나 WTO는 미국을 나쁘게 대한다”고 말했다. “WTO가 변화하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미국은 WTO 규정을 거스르거나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분쟁 조정에 나서는 방향으로 WTO 재설계에 나설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의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미 정부가 WTO 규정을 무력화할 수 있는 새 법안의 초안을 마련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현재 WTO 탈퇴보다는 개혁을 목표로 일본, EU와 논의를 벌이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을 협상에 활용하며 당근과 채찍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행동과 2016년 영국의 EU 탈퇴 경험 등을 고려하면 미국의 WTO 탈퇴 가능성도 아직은 배제할 수 없다. WTO가 분쟁 조정 능력에서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며 이익이 맞는 나라들끼리 헤쳐 모이거나 WTO 체제를 완전히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역 규칙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새 협정이 꾸려지고, 미국 등 보호주의 정책을 고집하는 국가들끼리 뭉치는 ‘포스트 세계화’ 가능성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칼럼에서 “중국은 미국을 고립시키는 한편 또 다른 무역전쟁의 피해국을 모아 새로운 반미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며 “많은 나라가 중국의 부당 행위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 이후 중국은 인도와 일본 같은 나라와 가까워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images/sph164x220.jpg
1446호 (2018.08.1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