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5) 가수 이장희] ‘울릉 천국’에서 펼치는 제2의 음악인생 

 

이필재
정상의 싱어송 라이터에서 추락…미국서 인생유전

▎가수 이장희씨는 울릉도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 사진:박종근 기자
“나는 정말 자연이 좋아요. 내가 울릉도에 사는 이유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게 있어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거기에 빠지지 못하고 머뭇거려요.” 고희를 넘긴 가수 이장희 씨는 “울릉도가 아름다운 건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 날부터 자연을 좋아했다. 자연이 좋아 혼자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의 울릉도 공연에서 기타를 치는 오랜 친구 강근식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땐 오토바이를 팔아 설악산으로 같이 여행을 떠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1980년엔 타이티를 찾았다. 천경자의 타이티행 이후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을 거라고 했다. 페루의 마추픽추도 그 시절에 혼자서 갔다. 남극·북극·실크로드를 찾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땐 러시아에서 비엔나까지 버스로 여행을 했다. “80년대 한국에 오면 미국 생활에 젖어 자꾸 영어가 튀어나왔어요. 88년 영어 물을 빼려 설악산에 들어가 암자에서 석 달 간 지냈습니다. 그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자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내 인생의 중요한 모멘텀이었습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돈도, 명예도, 여자도 아니었어요. 사노라면 어려운 일이 닥치게 마련이죠. 그럴 때면 자연을 찾아 자연에 묻힙니다. 자연은 무엇보다 아무 때나 찾을 수 있어요.”

은퇴 후엔 알래스카에 살고 싶었다. 길고 삭막한 겨울은 하와이에서 보내려 했다. 1996년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를 찾았다. 열흘 간의 울릉도 여행이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이듬해 울릉도에 농가를 마련했다. 2004년 아예 울릉도로 이주했다. 3~4년 농사를 짓다 힘들어 꽃밭을 가꿨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울릉천국이라고 명명했다. 울릉도의 삶을 담은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라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몇 년 전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찾아와 그의 집 뜨락에 공연장을 짓자고 제안했다. 조용히 살러 울릉도에 들어간 그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음악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연습실로 쓸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을 돌렸다. 땅을 팔라는 경북도 측에 그가 1650㎡(500평)을 기증했고 마침내 집 앞에 4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막상 건물이 생기고 나니 가수 하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40여 년 잊고 살았지만, 노래는 나로 하여금 과거 대학까지 중퇴하게 만들었어요. 울릉도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공연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죠.”

명문고 출신의 아들이 가수로 살겠다고 연세대를 중퇴할 때 그의 어머니는 눈물로 말렸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했다. 일찍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몹시 귀여워하던 옆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미친 듯이 슬퍼했지만 이튿날이 되자 잊혀졌다. 인생은 허망한 것이었다. 죽으면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삶. 열한 살 꼬마는 장차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에 빠져 산 그는 혼자서 기타를 배웠다. 음악 공부도 독학으로 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같은 주옥 같은 노래를 만들었지만 그래서 음표를 제대로 못 읽는다. 싱어송라이터로 한창 잘나갈 때, 라디오 황금 시대 디제이로서 정점에 섰을 때 그는 나락에 떨어졌다. 대마초를 입에 댔다 구속된 것이다. 대마초 가수 1호였다. 그가 디제이를 하던 동아방송이 속한 동아일보를 비롯해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다. 때는 12월 구치소 창살 밖엔 흰눈이 내렸다. ‘내가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출소를 했지만 당국이 노래를 못하게 막았다. 먹고살기 위해 씨엠송을 만들자 문공부 고위직 관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장희씨, 그런 거 하지 말라는데 계속하면 어떻게 해요?” 원망하지 않았다. 옷 장사를 시작했다. 대학 졸업장이 없어 취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마저도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이라는 짐의 무게는 누구나 같아요. 정상으로 돌을 밀어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에게 돌의 무게란 무의미하죠. 문제는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 건가에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클럽을 하다 방송국을 차렸다. 라디오코리아. 돈이 없어 방송시간을 임차해 썼다. 6개월 만에 흑자를 냈다. 은퇴를 앞두고 있을 때 방송시간을 빌려준 방송국 측이 임차료를 두 배로 올렸다. 우물쭈물하다가는 65세까지 은퇴를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애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하고 스스로 방송국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를 매각해 내가 부자 된 줄 알아요. 없어 보이느니 부자로 보이는 게 낫기는 합니다, 적시에 매수자가 나서 팔았다면야 한몫 챙겼겠죠. 돈을 더 벌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그는 대마초 파동 당시 박지만씨에게 자신이 대마초를 가르쳤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굳이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주변을 정리했다. 입지 않는 옷, 읽지 않은 책, 수많은 사진과 잡다한 수집품들이다. 자신이 죽으면 한꺼번에 버려질 것들이라고 말했다. 울릉천국 공연장 부지를 도에 기증한 그는 나머지 재산도 너무 늦지 않게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다. ‘나 죽으면 울릉도로 보내주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 그가 지은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의 한 대목이다. 그는 울릉천국에 살다 때가 되어 울릉도에 묻히는 꿈을 꾼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가장 확실한 가능성입니다. 황혼이 드리우면 갈 때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죠. 하이데거 말대로 우리는 그 죽음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누구도 스스로 선택해 태어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웰다잉, 웰다잉 하는데 잘 죽는 길은 곧 잘 사는 겁니다. 결국 잘 죽는다는 건 나의 생각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예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다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안 깨어난다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는 인생에 성공이란 없다고 말했다. 누구의 인생도, 심지어 부처의 삶도 성공한 인생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마다 자신의 얼굴에 드러날 뿐이죠. 어려움을 견디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헤쳐 나갈 뿐입니다. 나는 인생에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봐요. 그냥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거지. 그러나 자기 생각대로 살면 아무래도 행복하겠죠. 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후회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호사와 행복을 혼동합니다. 돈은 친구나 애인과 좋은 곳에서 만나 좋은 음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만 벌면 족해요.”

치매 걸리면 스위스 행 비행기 탈 것

그는 이런 인생관이 어려서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가 네 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피난 길에 오른 그는 폭격과 기총소사를 피해 논두렁에 엎드려야 했다. 전후 마산에 정착했을 땐 전쟁터의 탄피를 갖고 놀았다. 전후 첫 세대로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것이다. “정작 무서운 건 치매를 일으키는 알츠하이머병이에요.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사는 건 사는 게 아닙니다. 치매에 걸리면 스위스로 가 존엄사를 택할 겁니다.

1446호 (2018.08.1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