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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31)·끝 | 캐나다 순록이 줄어든 진짜 이유는] 주범은 늑대가 아닌 인간 

 

서광원 소장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진실 외면…상황 파악부터 실패하면 해결책 찾기 어려워

▎사진:© gettyimagesbank
지난 1950년대 말, 캐나다에서는 늑대에 대한 원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캐나다의 중부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툰드라 지대에 순록들이 사는데, 늑대들이 이들을 거의 멸종시키고 있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순록은 이 지역 사람들의 주식이라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의회는 정부를 향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늑대 제거 프로그램을 가동시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늑대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영양의 일종인 누는 나무가 다 크기 전에 어린 잎은 물론 줄기까지 송두리째 먹곤 한다. / 사진:© gettyimagesbank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해 한 젊은 과학자가 현지에 파견됐다. 그가 ‘불모지대’로 가기 위해 이 지역의 남쪽 끝에 있는 처칠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별의 별 소문을 접할 수 있었다. ‘늑대가 북극권역에서 매년 수백 명씩 사람을 잡아 먹는다’ ‘늑대 한 마리가 순록 수천 마리를 죽인다’ ‘이상하게도 에스키모 임산부는 건드리지 않아 에스키모 출산율이 높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늑대는 공포에 가까운 공공의 적이자 공공연한 적이었다. 일종의 ‘폭탄주’라 할 수 있는 ‘늑대 주스’까지 있었다. ‘늑대 주스’는 ‘무스’라는 이름의 맥주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어 확 취하도록 한 술이었다. 무스는 대형 사슴을 말한다.

충분한 경각심을 품은 그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늑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툰드라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누구나 인정하는 ‘늑대의 왕국’이었다. 이곳에서 7개월 정도 늑대들의 생태를 정밀하게 관찰한 그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늑대가 사람을 죽였다거나 죽인다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없었다. 소문만 있었다. 늑대가 순록을 사냥하기는 하지만, 멸종시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허위 사실이 공식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반면 진실은 은폐되고 있었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 지역의 늑대들은 적어도 수만 년 이상 순록과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아왔는데도 멸종 사태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를 기준으로 30~40년 전쯤부터 멸종 위기가 시작됐다. 소문대로 늑대들이 잔인해졌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중에서도 순록을 사냥해 모피를 파는 사냥꾼들과 그것을 거래하는 상인, 그리고 취미로 무차별 사냥을 하는 이들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 파견된 조사관 팔리 모왓에 따르면 이곳의 모피 사냥꾼들은 1년에 평균 200~300마리의 순록을 사냥하고 있었다. 최소한도로 계산하기 위해 이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 사냥꾼 한 사람당 100~150마리를 사냥한다고 치고, 여기에 사냥꾼 숫자까지 절반으로 줄여도 이들은 1년에 평균 1만 마리 이상의 순록을 죽이고 있었다. 한 해 평균 최소 1만 마리에서 최대 4만 마리 이상을 죽이고 있었으니 멸종 사태가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경쟁자’인 늑대를 내세우고 있었고, 의회는 이들의 커다란 목소리만 듣고 정부에 늑대 소탕 정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시행착오에서 교훈 배워야


▎2차 대전 당시 활약한 미국의 ‘선더볼트(thunderbolt)’ 전투기.
실태 파악을 통해 ‘진범’을 찾았으니 멸종 위기가 해소되었을까? 진실은 완전히 실행되지 못했다. 늑대들은 자신들이 억울함을 말할 수 없는 반면 이해관계자들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서나 큰 목소리들은 주장을 사실처럼 말하고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배우기보다 다른 누구 탓으로 돌리기 바쁘다. 또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대충 덮고 넘어가기 일쑤다.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넘어가면 소모적인 시행착오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지난 2006년 캐나다에서 태평양 쪽에 위치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정부는 갈수록 줄어드는 산악 순록을 보호하기 위해 늑대 사냥을 공식화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늑대의 소행이었다. 당시 이 지역의 고산지대에 사는 순록은 1000여 마리 정도 밖에 남지 않은 멸종 위기 종이었다. ‘혐의’가 늑대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던 건 이미 한참 전, 인간의 순록 사냥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니 ‘용의자’는 늑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 정부의 정책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고산지역이라 늑대를 잡는 것도 어려웠던 데다 한다고 했는데도 순록의 감소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진범은 누구였을까? 한참 후인 2017년 캐나다 앨버타 대학의 로버트 세로야 교수 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순록이 감소하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커다란 사슴인 무스(말코손바닥사슴)와 다른 사슴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심각한 먹이 부족이 원인이었다. 연구팀이 이들 사슴을 줄인 곳에서는 순록의 숫자가 늘었고, 그대로 둔 곳에서는 순록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줄었다.

두 사례 모두 늑대의 소행이 아닌데 왜 늑대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일이 벌어졌을까? 늑대가 순록을 주요 먹잇감으로 삼고 있는 게 확실한 데다 녀석들이 순록을 사냥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녀석들이 어떤 놈들인가? 옛날부터 흉포함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장본인들 아닌가. 우리는 늑대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걸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로, 또는 동화로 배운다. 동물원에 가지 않는 한 평생 늑대를 볼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어린이들까지 녀석들이 얼마나 나쁜 녀석들인지 안다. 이런 오래된 인식 틀(Frame)에 두 눈으로 확인 가능한 데다 사실을 호도하는 이들까지 있었으니 쉽지만 잘못된 답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고, 그것만을 믿은 결과였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도 한때 코끼리가 ‘억울한 누명’을 오랫동안 썼던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큰 나무들이 점점 보기 힘들어지는 이유가 코끼리들이 그 나무들의 잎을 먹기 위해 드센 힘으로 넘어뜨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관찰 결과 ‘범인’은 코끼리보다 영양의 일종인 누였다. 이 녀석들이 나무들이 다 크기 전에 어린 잎들은 물론 줄기까지 송두리째 먹어 버렸던 것이다. 코끼리 다리만을 만져 보고 그게 코끼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오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여러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 믿음은 강화되고, 이후에는 그 믿음 대로 보게 된다. 우리가 전부를 볼 수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뿐더러 보았다 하더라도 그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은 데도 말이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선더볼트(thunderbolt)’라는 전투기를 개발해 상당한 효과를 봤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독일 전투기들에게 격추되는 일도 잦았다. 전투기 가격도 그렇고 조종사 한 명을 육성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난지라 미군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그중 하나가 비행기에 강철판을 덧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게 때문에 동체 전체를 강철판으로 두를 수 없어 주요한 부분에만 덧대야 했다. 그 ‘주요한 부분’이 어디였을까? 총알 세례를 받았는데도 용케 기지로 돌아온 전투기들에 답이 있었다. 총탄 세례를 유난히 많이 받은 곳이 그곳이었다. 당연한 답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발드라는 수학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정반대로 “총탄 구멍이 많지 않은 곳에 강철판을 대야 한다”고 했다. 아니 왜 총알을 별로 맞지 않은 곳에 강철판을 대야 한다고 했을까? 그들이 조사한 전투기들은 총탄을 맞았어도 다시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다른 곳, 그러니까 총탄 구멍이 별로 없는 곳에 맞은 전투기들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약점은 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 눈으로 보는 건 사실의 일부분이거나 그마저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눈의 한계를 믿지 않고 ‘보는 것’을 믿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는 것’을 믿는다. 이렇게 해도 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하고 가치가 높은 것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더 큰 가치가 있고 진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부는 1995년 산아제한정책을 중단했고, 2005년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 설치, 지난 10여 년 간 저출산 대책에 10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었다. 누군가 그 혜택을 입었겠지만 저출산 기조는 나아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될 조짐도 없다. 정책담당자들은 눈에 보이는 보육시설만 만들면 아기를 많이 낳을 줄 알았겠지만 그건 마치 사람들이 늑대 탓을 하고, 총탄 자국이 많은 곳에 강철판을 덧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보육시설 늘린다고 저출산 문제 해결?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나는 모른다’는 무지(無知)가 과학이라는 혁명을 태동시킨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낳지 않는 건 보육시설이 마땅치 않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생명체들은 아기를 키울 만한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 ‘번식 활동’을 하지 않는다. 낳아 봐야 잘 키울 수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저출산 성향이 가팔라지는 시점은 직장에 대한 불안과 내 집 마련이 극히 악화되는 시점과 정확하게 겹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직장과 요원하기 만한 내 집 마련이 해결되지 않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보육시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지 않은 것에서 시작된 예고된 실패였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나는 모른다’는 무지(無知)가 과학이라는 혁명을 태동시킨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세상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알려고 했기에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역설적으로 우리의 한계 또한 이 무지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인정하면 그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걸 모르면 그것이 한계가 되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안다고 하는 순간 모르게 되는 까닭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기업 3M의 고위 임원에 오른 신학철 수석부국장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보여준 성장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혁신의 지속 가능성 측면에선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기업이 아직도 기술 혁신에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해서) 세계 시장에서 소비자 요구를 읽어내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걱정됩니다.”

눈에 보이는 기술에서만 혁신을 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사람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소비자 요구를 탐구하고 추출해내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누군가 괜찮은 걸 만들어 내면 우르르 따라가는 일이 벌어진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곧잘 끄는데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을 보는 능력은 없다는 아픈 지적이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경영자

조직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사람만 보고, 들리는 말만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영자는 오래 갈 수 없다. 상황 파악에서부터 실패하는 데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려고 하는) 사람 너머에 진짜 일 잘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또는 들려주려고 하는) 것 너머에 진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들리는 칭찬보다 들리지 않는 불평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더 필요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한 ‘무지’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알고 난 후 자신의 눈을 찔렀다. 왜 하필 눈이었을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걸 참회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총명이라는 단어는 잘 듣는다는 총(聰)과 잘 본다는 명(明)을 뜻한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지금 어디를, 그리고 무엇을 보고 있을까? 보이지 않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을까? 우리의 진짜 미래가 시작되는 그곳을.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51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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