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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12) | 자로의 생애] 주군을 위해 기꺼이 죽음 택한 굳센 용기 

 

안회·자공과 더불어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신념에 따라 두려움 없이 행동

▎일러스트 김회룡
긴 창이 몸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무예가 뛰어난 그였지만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 젊은 장수들을 홀로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흘린 피에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내리쳐진 칼날에 그의 관모(冠帽) 끈이 끊어졌다. 그는 중얼거린다. “군자는 죽을지라도 관모를 벗지 않는 것이 예의지.” 힘겹게 관끈을 맨 그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공자(孔子)가 사랑하던 제자 자로(子路)는 이렇게 눈을 감았다. 만년에 공자의 곁을 떠나 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그는 자신의 주군 공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정변이 일어나 공회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홀로 적진으로 뛰어든 것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였던 위나라 대부 고시(高柴)가 “이미 막을 수 없는 상황이요. 그대가 위나라 책임자도 아닌데 이런 정치 문제에 무엇 하러 관여하려 하시오? 나와 같이 이곳을 떠납시다”라고 말렸지만 자로는 듣지 않았다. “내가 공회가 준 녹을 받아먹은 이상 어찌 이 일을 두고 볼 수 있겠소. 위기에 처한 주군을 돕지 않고 자기 몸만 생각할 수는 없소.” 결국 자로는 죽음을 맞이한다.

“고시는 돌아올 것이나 자로는 죽고 말 것이다”

이 때 위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고시는 돌아올 것이나 자로는 죽고 말 것이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공자는 말했다. “고시는 안전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로는 용기를 좋아하고 목숨이란 걸 그다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자로를 죽이고 집권한 위나라 군주 장공이 보낸 것이었다. “이번에 새로 보위에 오른 군주께서 선생님을 무척 사모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음식을 보내셨습니다.” 공자가 받아 음식 단지를 여니, 고기로 담근 젓이 가득 들어있었다. 공자는 통곡했다. “자로의 살이로구나. 자로의 살이로구나. 내 항상 자로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까 염려했더니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열국지]에 따르면 그날 이후 병을 얻은 공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기록에 따라 다소 다르게 서술되어 있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동일하다.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자로는 주군을 위해 용감하게 나섰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자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헛된 죽음이라는 평이 많은데, 자로의 주군 공회는 그가 목숨을 바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공회가 자발적으로 반란에 동조했다는 견해도 있다). 혈혈단신 쳐들어간 것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또한 이것이 ‘자로’다운 죽음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의리를 위해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는 인물,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굳센 용기의 인물, 그런 사람이 바로 자로이기 때문이다.

자로는 본래 안회(顔回)·자공(子貢)과 더불어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논어]에 등장하는 횟수만 봐도 이들 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더욱이 자로는 공자와 나이가 아홉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공자로부터 구박도 많이 받았지만 공자에게 직접 따져 묻고 대들 수 있는 것도 자로가 유일했다. 자로는 스승의 호위무사를 자임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는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뒤로는 나에 대한 험담이 들려오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스물 한 살의 자로가 처음 공자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그는 본데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수탉의 깃털을 모자에 꼽고 허리에 칼을 찬 그는 공자에게 찾아와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예(禮) 따위는 대체 배워 뭐하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감화를 받으며 그는 점점 달라져갔다. 학문적인 깊이와 역량, 지혜는 다른 제자들에게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곧은 성품과 굳센 용기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君子)에게 세 가지 덕이 있고 했다.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의혹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신념에 따라 행동함에 있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자로는 바로 그런 용기 있는 군자였다.

자로가 남긴 일화는 무수히 많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몇 사람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공자는 곁에 있던 안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써주면 출사하여 세상을 위해 일하고, 세상이 나를 버리면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는 것.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와 자네뿐이 아니겠나?” 함께 있던 자로는 질투가 났다. “선생님께서 3군을 지휘하신다면 그것은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자로는 공자가 그것은 당연히 너와 할 것이라고 말해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 무예와 군무(軍務)에 밝은 것은 단연 자로가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다른 대답을 한다. “맨손으로 호랑이와 맞서는 사람, 큰 강을 걸어서 건너다가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임할 때는 반드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 나는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용맹과 의기만 높을 뿐, 사리분별에 어두웠던 자로를 경계하는 말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이 계속 좌절되자 공자는 우울해하며 말했다. “지금 세상은 도를 이룰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하는구나. 이 땅에서는 나의 바람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볼까? 그 때 기꺼이 나를 따라가 줄 사람은 자로이겠지.”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기뻤다. 스승이 자신을 콕 집어 이야기했다며 우쭐해했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를 야단쳤다. “용기라는 면에서는 자네가 나보다 낫지. 그렇지만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 헤아려 알맞게 하는 것이 없지 않은가?” 자로가 좀 더 사려 깊게 행동하고 학문을 닦길 바랐던 것이다.

앎과 행동 일치시키고 끊임없이 노력

같은 이유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도 남겼다. “유(由, 자로의 이름)야! 앉아 보거라. 내가 자네에게 육언(六言)과 육폐(六蔽)에 대해 말해주마. 인(仁)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게 되는 데 있다. 지혜로움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방자하게 되고, 신의를 지키기를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진리를 해치게 된다. 정직함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폐단은 급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용기를 좋아 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럽게 되고, 굳센 것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경솔하게 되는 것이니, 부디 명심해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가 더욱 성장하길 바라는 스승의 사랑일 뿐, 공자가 자로를 낮춰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자들이 자로를 깔보자 너희들은 자로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며 꾸짖었다. 가난한 밥상, 해진 옷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라며 “다 해어진 값싼 솜옷을 입고 값비싼 담비 가죽 옷을 입은 자와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거리낌이 없는 이는 자로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논어]에는 “자로는 승낙한 것을 뒤로 미루는 일이 없다”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으면, 또 다른 좋은 말을 듣게 될까 걱정하였다”라는 말도 나온다. 자로는 순수한 사람이었으며 앎과 행동을 일치시킨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한 공자는 자로에게 “유야. 내가 자네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지식의 양과 깊이에 있어서 다른 제자들에게 뒤쳐졌던 자로에게 큰 격려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라며 응원을 보낸 것이다.

이 같은 공자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자로는 한 사람의 군자로 성장해갔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워주면 기뻐하며 고치려고 노력했고, 순수하고 우직하게 언행일치를 실천했다.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스승의 처신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반론을 던졌는데, 공자가 반란을 일으킨 공산불요(公山弗擾), 필힐(佛肹)의 초청에 각각 응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신을 써주겠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보려 했던 것이지만, 자로가 못마땅해 하며 스승의 면전에서 항의한다. “정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 둘 일이지 어찌 그런 자에게 가십니까?” “전에 스승께서는 선하지 못한 자의 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필힐은 선하지 못한 자입니다. 하온데 스승께서는 왜 그 자에게 가려고 하십니까?” 자로의 서슬 퍼런 비판에 공자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이런 자로가 공자의 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이 넘어서였다. 긴 방랑을 끝마치고 고향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집필 활동에 매진하며 오랫동안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떠나보냈다. 자신과 함께 있느라 포부를 펼쳐보지도 못하는 제자들이 안타까웠던 것이다(완전히 이별한 것은 아니다. 각지에서 관직 생활을 하게 된 제자들은 자주 공자를 찾아뵙고 문안을 여쭈었다). 이 때 자로는 위나라로 갔고 공회라는 귀족의 신하가 된 것이다.

거칠고 우직했지만 그만큼 솔직담백

그러나 앞서 소개했듯이 자로는 위나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공자가 자로를 두고 걱정했듯이 용기는 그것을 적절히 제어할 사려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법이다. 그러지 못하면 무모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자로의 선택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평생 자신이 말한 바를 실천해왔고,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선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거칠고 우직했지만 그만큼 솔직담백했다. 죽음 역시 그 연장선상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보다 나은 주군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자로가 나아가는 용기 못지않게 멈출 줄 아는 용기, 물러날 줄 아는 용기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사려와 용기를 겸비한 멋진 롤모델을 가졌을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53호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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