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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융프라우철도의 100년 인기 비결] 정부·주민·주주와 소통해 해마다 새롭게 변신 또 변신 

 

인터라켄(스위스)=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압도적 경관과 화려한 즐길거리만으론 성공하기 어려워 ... 100년 간 관광지·프로그램 끊임없이 확장

▎왼쪽부터 아이거, 묀흐, 융프라우산. 융프라우산 왼쪽 평평한 능선 지하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융프라우요흐 기차역이 있다. / 사진:융프라우 철도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 산악가 조지 말로리가 1923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가장 높은 산이 목표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산을 오르는 일은 다르다. 알프스 최고봉은 프랑스의 몽블랑이지만 100년 전 4000m가 넘는 산 사이로 터널을 뚫어가며 산악열차를 개통시킨 곳은 융프라우다. 아이거와 묀흐, 그리고 융프라우의 3개 산이 만나면 절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3개 산 사이의 거리, 각각의 산봉우리 높이는 사람 눈에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1:1.618 황금비율에 맞춰져 있다.

10월 4일(현지시간) 스위스 베른주의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출발한 융프라우철도회사 기차는 오전 8시 47분 해발 1034m인 그란델발트역을 떠나 ‘유럽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로 향했다. 능선을 돌아가며 수직으로 약 1km를 더 올라가는 데 34분이 걸렸다. 해발 2061m인 클라이네 샤이텍역에 가까워지자 기차는 구름 위로 올라섰다. 봉우리 사이로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엔 친환경 마을로 유명한 뱅엔이 잠겨 있을 터였다. 구름조차 발 밑으로 멀어져 갈 때쯤 왼편에 예고도 없이 거대한 얼음과 바위의 장벽이 나타나 하늘을 가렸다. 산악인들에게는 악명이 높은 아이거산의 북벽이었다. HBO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거대한 북쪽 빙벽을 바로 아래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고개를 한껏 들고나서야 정상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여전히 평화로운 초록색 능선이 내려다보인다. 떠들썩하던 기차 안도 압도적인 경관 앞에서 잠시나마 조용해졌다.

위압적인 아이거 북벽 지나 터널로


1896년 스위스 산업계의 거물이었던 아돌프 구에르 첼러는 당시 가장 높은 기차역이던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해발 4158m 융프라우의 능선까지 산악철도를 놓기 시작했다. 아이거와 묀흐 암벽에 터널을 뚫고 톱니바퀴 철도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이 철도는 1912년 8월 1일 개통됐다. 첼러는 1899년 사망했지만 스위스 정부가 대신 나섰다. 산악철도의 끝에 있는 융프라우의 비경이 스위스를 관광대국으로 도약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융프라우요흐역으로 가려면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열차를 바꿔 타야 한다. 다시 출발한 기차는 아이거산을 관통하는 7km 길이의 터널을 지나 해발 3454m인 융프라우요흐역 지하플랫폼에 섰다. 자외선차단제 뚜껑을 열자 기압 때문에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2000m 이상 고산지대에선 중력 저하로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공기 중의 산소 양도 10~20% 정도 적다. 일행 중에서 두세 명이 약한 고산병 증세를 호소했지만 도중에 산을 내려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날은 융프라우철도회사와 시계 브랜드 오메가가 골프계의 젊은 전설 로리 맥길로이를 초청해 빙하 위에서 유망주들과 골프 대결을 벌이는 날이다. ‘유럽의 정상(Top of Europe)’인 융프라우 산등성이(요흐)에서는 해마다 농구·육상·테니스 등 최고의 스포츠 선수들을 초청해 해발 3400m가 넘는 빙하 위에서 경기를 갖는다.

급한 마음에 무거워진 다리를 바삐 움직여 플랫폼에서 10분 쯤 더 걸어 들어갔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 나타났다. 융프라우 능선을 밟자마자 알레치 빙하가 한눈에 담겼다. 빙하는 왼쪽으로 살짝 틀어졌다가 다시 오른쪽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게 나아가는 강줄기 모습 그대로였다. 23km에 달하는 알레치 빙하는 2001년 알프스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융프라우철도의 우어스 캐슬러 CEO 겸 이사회 의장, 프로골퍼 로이 맥길로이, 올해 공동 마케팅 파트너인 오메가의 레이날드 애슐리만 CEO 겸 회장.
취리히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인 스위스 베른주의 작은 도시 인터라켄은 유럽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알프스 산맥의 입구이기도 하지만 스위스 중부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스위스 관광산업의 중추다.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고개를 돌리면 융프라우산을 볼 수 있다. 베른주에서 이 경치를 방해하는 건축물을 짓는 걸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1만 명이 채 안 되는 인터라켄은 융프라우철도회사의 본사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평직원으로 시작해 최고경영자(CEO) 겸 이사회 의장에 오른 지 10년 째인 우어스 캐슬러가 부임한 후 융프라우 철도를 이용하는 관광객 수는 60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융프라우로 가는 모든 기차,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이용하려면 융프라우 철도의 VIP 패스 등을 구매해야 한다. 2016년 스위스에서 1박 이상을 한 관광객 수는 2400만 명. 이 중 아시아 관광객이 510만 명이었다. 알프스 산맥이 있는 스위스 중부 지역을 찾은 관광객 5명 중 1명이 융프라우철도의 패스를 구매해 1박 이상을 했다. 오래된 관광지가 갈수록 더 각광을 받는 이유는 뭘까.

10년 새 관광객 두 배 가까이로 늘어


▎알프스에서 최초로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알레치 빙하.
20년 간 한국을 해마다 방문한 우어스 캐슬러 CEO는 “100년 넘은 철도 관광지를 해마다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하고, 즐길거리와 이벤트를 만들어 내려면 ‘소통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융프라우철도의 주주들은 주정부, 스위스 기업 등 다양하다. 그런 데다 오래된 철도를 중추로 해마다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정부, 지역 주민, 해외 지사·총판 등과 손발을 잘 맞춰야 한다. 소통과 협상은 신뢰가 없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융프라우철도는 해발 500m인 인터라켄에서 곧장 산 정상으로 갔다가 내려오는 게 아니다. 그린델발트에서 우측으로 가면 미니 골프장, 친환경 마을 등이 있는 멘리헨 코스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액티비티의 본거지 휘르스트가 나온다.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노선 중간에도 실제로 이 지역 사람들이 생활하는 주택과 목장 등이 있다. 자의로 주거지의 앞마당을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집 근처를 관광지로 내놓으려는 주민은 드물다. 캐슬러 CEO는 “스위스 정부의 환경 규제는 무척 강하다”며 “정부·주민들과 계속 소통하고 협상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100년이 넘는 기간 지역 주민들과 큰 분쟁 없이 관광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소통과 신뢰에 있었다. 융프라우철도 한국총판인 동신항운의 송진 대표와의 인연도 22년 째 이어오고 있다. 송 대표는 인터라켄 본사에서도 유명 인사다. 중국 남서부지역 지사의 장 리난 지사장은 “융프라우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 정말 많다”며 “융프라우요흐에서 한국 컵라면을 주고, 기차 안에서도 한국어 안내가 나올 정도”라고 설명했다. 송진 대표는 “융프라우를 찾는 이들의 특징은 재방문율이 높다는 것”이라며 “잠시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갔다 오는 게 아니라 며칠씩 묵으며 융프라우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융프라우철도는 공동 마케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올해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 오메가와 골프 홀인원 코스를 함께 운영하기로 했고, 스위스 대표 초콜릿 브랜드 린트 매장을 융프라우요흐에 유치하던 해에는 산 정상에서 테니스 경기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거의 해마다 육상, 농구 마케팅 이벤트를 다른 브랜드들과 함께 진행한다. 마티아스 버틀러 마케팅 담당 임원은 “스위스 대표 브랜드들과 공동 마케팅을 장기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건 ‘유럽 최고(Top of Europe)’라는 우리 브랜드 슬로건을 공유할 수 있는 기업을 찾아 방문객 수에 따라 비용을 공정하게 나눠 부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라켄의 툰 호수 위에서 유람선을 운영하는 BLS도 융프라우철도의 파트너사다. 융프라우철도 VIP 패스에는 석양을 보며 식사를 하는 유람선의 무료 승선권도 포함돼 있다. 10월 5일 툰 호수 유람선에 함께 탑승한 인터라켄 관광청의 레나토 줄리에르 이사는 “어떻게 하면 관광객 수요에 맞는 숙박을 해결할지를 고민 중”이라며 “호수 근처 마을에서 민박을 하려는 수요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유명 브랜드와 이색 공동 마케팅


100년이 넘은 관광지를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비결이 변함 없는 자연이나 소통, 신뢰만은 아니다. 꾸준히 변화 하는게 변함 없이 성장하는 주요 이유다. 내년부터 융프라우 일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융프라우요흐에선 내년 5월부터 스노우 펀 파크를 개장해 친환경 스노우모빌로 서킷을 달릴 수 있다. 알레치 빙하로 가는 입구에서는 오메가 홀인원 코스에서 골프 연습을 할 수 있고, 홀인원에 성공하면 오메가 시계를 받는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글라이더·카트를 즐길 수 있는 휘르스트 지역에는 에어쿠션 위로 몸을 던지는 에어백 점프가 새로운 즐길거리로 추가됐다. 현재 건설 중인 휘르스트 크리스털 피크는 사면이 유리로 된 전망 포인트이자 전시회 등의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인터라켄과 그린델발트역 사이의 쉬나케 플라테 철도에는 야생화 사이를 걷는 파노라마 꽃길이 새로 조성됐다. 인터라켄을 내려다보는 하더 쿨롬에서는 스위스 민속 음악 공연을 매일 하기로 했다.

작은 변화도 오랜 기간 공 들여 준비


▎1. 스위스 대표 초콜릿 브랜드 린트가 융프라우요흐에 2014년 입점한 기념으로 열린 테니스 경기. / 2. 인터라켄 시내에선 융프라우를 가리는 건축물을 지을 수 없다. / 3. 인터라켄 시내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하더 쿨룸 전망대. / 4. 툰 호수 유람선에서 본 인터라켄의 한 마을. / 5. 100년 전 융프라우 산악철도 건설에 필요한 전기를 친환경 수력발전소를 세워 자체적으로 공급했다. / 6. 곤돌라를 타고 가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휘르스트에서 관광객들이 산악 카트를 타고 있다.
작은 변화도 오랜 기간 준비하는 것도 융프라우가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장기 프로젝트인 V 케이블웨이는 올해 공사를 시작했다. 스위스 연방 교통국과 환경단체, 주민들과의 합의에만 5년이 걸렸다. 융프라우요흐에 곤돌라 등을 이용해서도 갈 수 있게 하고, 고산지대에 주차장과 새로운 터미널, 더 빠른 기차를 배치하는 것으로 3년간 사업비만 5400억원이 들어간다. 2020년에는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요흐까지 1시간 20분 정도면 갈 수 있게 된다.

기차를 타고 다시 인터라켄으로 내려오는 길에 왼편으로 작고 오래된 수력발전소가 눈에 띄었다. 융프라우요흐를 건설하기 시작할 때부터 필요한 전력을 친환경 자체 수력발전소인 뤼첸탈 발전소에서 생산해왔다. 1912년부터는 하행선 열차의 내려가는 힘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융프라우요흐 정상에서 사용되는 1000만L에 달하는 오염된 폐수는 폐수관을 통해 9.4km 아래에 있는 클라이네 사이텍으로 내려보낸다. 폐수는 그린델발트 정수시설에서 처리한다. 난방과 냉각, 비상전원, 쓰레기 처리시설과 같은 친환경 시설을 집중적으로 둘러보는 ‘융프라우요흐 테크니컬 투어’가 있을 정도다.

1455호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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