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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13) | 위문후의 인재들] 마음 사로잡고 능력 펼칠 환경 만들어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새로운 나라 세운 후 적재적소에 등용…인재가 또 다른 인재 영입하는 선순환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열국지]의 배경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이 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학설에 따라 이견이 있긴 하지만, 진(晉)나라의 세 가문 조씨·위씨·한씨가 각기 제후로 독립한 BC 403년을 기준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하가 임금의 땅을 빼앗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질서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모시던 군주의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반드시 ‘악(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대환경, 정치적 상황, 흥망의 순환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더욱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업에 성공하는 인물들은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진나라를 몰락시키고 위(魏)나라의 초대 군주가 된 문후(文侯, 재위 B.C.445~396)도 그런 사람이었다.

진나라 몰락시키고 위나라 초대 군주에 올라

위문후는 즉위하자마자 전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귀족에게 세습된 특권을 폐지했으며 법치를 확립했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다. 특히 수많은 인재를 등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해 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우선 이회(李悝, 괴라고도 발음)를 보자. 위문후가 재상으로 발탁한 이회는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토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나라 전 국토의 토지를 면밀히 조사해 효과적인 토지 운용 방안과 농업 생산력 향상 방안을 제시했다. 또 그는 ‘평적법(平糴法)’을 시행한다. 평적법이란 곡식 가격이 쌀 때는 나라에서 그보다 비싸게 수매해주고, 반대로 곡식 가격이 비쌀 때는 나라에서 그보다 싸게 내놓는 것이다. 가뭄 등 재난이 닥치면 비축한 곡식을 싼 가격에 방출하기도 한다. 물가 안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등에서도 시행할 정도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성(魏成)과 적황(翟璜)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위성은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을 추천했는데 모두 당대의 현자로 존경받던 인물들이다. 위문후는 극진한 예를 다해 자하와 단간목을 스승으로 모시고, 전자방을 친구로 예우했다. 이는 세 사람을 추종하는 인재들까지 위나라 조정으로 유입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적황이 추천한 인물들도 만만치 않았다. 위문후가 폭정을 일삼는 중산국의 군주 희굴을 정벌하려 하자 적황은 그 적임자로 악양(樂羊)을 추천했다. 악양은 아들이 희굴의 인질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또 위문후가 요충지인 업 땅을 다스릴 인물을 구하자 적황은 서문표(西門豹)를 소개했다. 업 고을 태수로 부임한 서문표는 관개사업을 실시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미신을 타파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적황은 위나라의 서쪽 국경을 방어할 책임자로 오기(吳起)를 천거했다(오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다룬다). 오기는 국경을 굳게 지키며 다른 제후국들과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서쪽의 강국이었던 진(秦)나라가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이처럼 적황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훌륭했을 뿐 아니라 본인 자체의 도량도 뛰어났다. 위문후가 적황을 공석인 상국(相國, 수석재상)에 임명하려고 대부 이극에게 의견을 묻자, 이극은 “적황보다 위성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상국자리는 위성에게 돌아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적황이 이극에게 항의했다. “나는 악양, 서문표, 오기를 추천해 임금의 근심을 덜어드렸소. 대체 내가 위성보다 못한 것이 뭐란 말이오?” 이극은 적황을 꾸짖었다. “위성이 추천한 자하·전자방·단간목은 임금께서 스승 아니면 친구로 사귀시고 계시오. 하지만 그대가 추천한 사람들은 임금께서 모두 신하로 삼으셨소. 위성은 자신의 녹봉을 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쓰고 있지만 그대는 자신만을 위해 쓰고 있지 않소? 그런데도 어찌 스스로를 위성에게 견준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적황은 이극에게 큰 절을 올리며 “비루한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청컨대 선생의 제자가 되고자 하니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하들이 하나같이 훌륭하니 나라가 잘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재상과 장군, 책사들이 최적의 자리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니 위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신하들이 한데 모일 수 있었을까? 위문후가 인재를 좋아해서? 신하들이 추천한 인재를 잘 수용해줘서? 단순히 그것뿐일까?

위문후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처음 단간목이 자신의 초빙을 거절하자 그는 아예 숙소를 단간목의 집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 단간목이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한 달 넘도록 찾아가며 진심을 다했다. 임금이 매일같이 문 앞에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정성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위문후는 사소한 약속도 어기지 않았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친 어느 날 오후, 문후는 부랴부랴 궐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주위에서 이유를 물으니 어떤 신하와 사냥을 나가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비가 내려 사냥을 할 수 없을 텐데 어찌 헛걸음을 하십니까?”라고 하자 문후가 말했다. “내가 이미 약속을 했다. 나오지 말라는 연락도 하지 못했으니 그 사람은 분명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록 사냥을 할 수 없더라도 내가 직접 나가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이러한 위문후이다 보니 신하와의 약속, 백성과의 약속을 절대 저버리는 일이 없었고 덕분에 위나라의 군신 간의 신뢰는 매우 견고할 수 있었다.

아울러 위문후는 신하에게 한번 임무를 맡기면 전적으로 믿고 간섭하지 않았다.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 전략적인 이유로 3개월 간 공격을 지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악양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며 비난하고 모함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위문후는 듣지 않았고 변함없이 악양을 신뢰해주었다.

당근뿐만 아니라 채찍도 적절히 활용

그렇다고 위문후가 인재들에게 무조건 잘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냉정함을 발휘했다. 악양이 승전을 거두고 돌아오자 문후는 막대한 상과 벼슬을 내리면서도 그의 병권을 모두 거둬들였다. 악양은 승리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버린 사람이다(중산국 군주 희굴이 악양의 아들 악서를 인질로 잡아 협박했지만 악양은 듣지 않았다. 결국 악서는 죽임을 당한다). 이는 신하로서의 책임감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인륜을 버린 자는 앞으로도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문후는 그 싹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요컨대 위문후는 정성과 믿음, 전폭적인 지원으로 인재의 마음을 샀다. 인재가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무릇 선비는 선비를 좋아하는 임금이 있으면 그곳에서 벼슬을 살고, 뜻이 맞으면 그 임금을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인재를 사랑하고, 인재가 품은 뜻을 수용해 실천해주었기 때문에 위문후의 조정에는 그토록 많은 인재가 넘칠 수 있었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56호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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